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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의 경구 "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구나"

매천 황현 선생
 매천 황현 선생
ⓒ 매천 황현 선생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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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일제에게 강점당하는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소식을 듣자,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식음을 전폐한 채 언저리를 정리한 다음, 유서와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위 글은 절명시 세 번째 결구로, 선비(지식인)로서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잘 드러낸 경구(警句)다.

이씨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이씨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무는 없다. 다만 오백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나라가 망하는 날에도 목숨을 바친 선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떳떳한 양심과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편이 옳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애통해하지 마라.
- 김택영 <황현전>

이 글은 매천 황현의 유언으로 자녀들에게 자신이 죽어야 할 명분을 밝혔던 말이다.

선비란 학문을 닦은 사람을 옛스럽게 부른 말로, 오늘날 지식인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난세일수록 지식인들의 세상살이가 어려운 것은 동서고금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나라 지도자들에게는 치세의 길을 제시함과 아울러 백성들에게도 바른 삶의 길을 가르쳐 주는 향도등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느 역사학자는 조선 왕조가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오백년을 이어온 가장 큰 요인은, 선비들이 죽음을 무릅쓴 직간(신하가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충직한 선비들 때문에 임금이 구중궁궐 속에서도 선정을 베풀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음을 이조실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천 황현 선생 생가 본채
 매천 황현 선생 생가 본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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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

내가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를 앞두고 인물 선정에 자문을 구하고자 순천대학교 사학과 홍영기 교수를 찾았을 때, 홍 교수는 매천 황현 선생을 주저 없이 천거하였다. 학문이 얕은 내가 매천 선생은 의병장도 아닌데도 굳이 천거한 까닭을 묻자, 다음 세 가지로 답하였다.

첫째, 의병이나 독립운동은 총칼로만 한 게 아니다. 붓으로 맞선 것도 무력 못지않다. 매천은 최익현 의병부대의 격문 기초를 작성했다. 둘째, 의병장 녹천 고광순의 시신을 수습하고, 약전을 집필하는 등 의병들의 죽음에 대해 극진한 찬사로 애도하여 그분들의 희생을 높이 기렸을 뿐 아니라, <매천야록>에 '의보(義報)'란을 만들어 1908년 1월부터 1910년 6월까지, 전국 의병 활동을 상세하게 수록하여 후세에 역사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셋째, 국난을 당했을 때 선비들의 세 가지 대처 방안인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 수의(守義 초야에 묻혀 의를 지킴), 순의(殉義 의를 위하여 죽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는데, 매천 선생은 순의 곧 순절(殉節 충절을 지켜 죽음)을 선택하여 후세의 귀감이 된 분이기 때문이다.

홍 교수의 지론을 듣고 보니 이론의 여지가 없어 답사 순례지에 넣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고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도 붓으로 하는 독립운동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것을 직접 들은 바 있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의 유래도 아마 이런 점에서 유래된 듯하다. 선비들이 목숨이 두려워, 또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곡학아세(曲學阿世 진리에 어그러진 학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함)한 결과, 그 영혼을 망친 정신의 피해가 해방이 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치유치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

황현 선생 생가 아래채
 황현 선생 생가 아래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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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추앙받았던 최남선, 이광수를 비롯한 친일 문인, 언론인, 학자들의 곡학아세는 무지몽매한 이 땅의 젊은이들을 일제 총알받이로 내몰지 않았던가.

반면 프랑스에서는 전후 민족반역자 처리에 있어서 지식인들을 더 준엄한 잣대로 심판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은 1944년에 드골 장군이 나치협력자 처리 전담재판소 개설과 '비(非) 국민제도' 창설을 골자로 하는 훈령을 발포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 드골정부는 특히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을 대부분 사형·무기징역 등 중벌로 다스렸다. 나치 지배 하에서 비시정권에 협력한 원로언론인 6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비롯해 저명한 작가·시인들도 예외 없이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 나치 처단 후 드골은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언정 민족반역자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정운현 지음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선비, 곧 지식인의 값어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높은 도덕성에 있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 해방 후 단 한 사람도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처단치 못한 결과, 아직도 이 사회 주류는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불법에, 편법에, 표절에 지식인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욕심 많게 권력까지 움켜쥐고 있다.

이런 세상에 매천 황현 선생의 삶을 더듬는 나의 답사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룬 부도덕한 지도급 지식인들이 내 글을 읽지 않겠지만, 설사 읽을지라도 자기는 아니라고 다른 이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마냥 애국애족을 부르짖는 코미디를 연출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그들만이 나라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국난에 이런 할아버지들이 나라를 지키려다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전한다.

오늘만 잘 살면 그만이다

2007년 12월 8일,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광양행 오후 2시 30분 차에 올랐다.

광주를 출발한 버스는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곡성, 석곡, 주암을 거쳐 승주를 지났다. 승주 선암사 탐방과 호남 의병전적지 순례로 서너 차례 지난 곳이라 그새 낯이 익었다. 순천을 비켜간 버스는 한 시간 남짓 만에 광양시외버스터미널에 닿았다.

황현 선생 생가 대문
 황현 선생 생가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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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장 버스터미널 택시정류장에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젊은 기사였다. 그에게 매천 생가에 가지고 하였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리더니 뒤에서 대기 중인 기사에게 물어 가는 길을 알아 와서는 그제야 출발했다.

다른 지방 기사도 아닌 제 고장 광양 기사가 매천생가도 모르다니. 기사는 매천이 누구냐고 반문하기에, 내가 그분의 생애를 일러주자 미처 알지 못했다고 사죄했다.

이런 세상이고 보니, 밥술이나 먹는 이는 자식에게 제 나라 말보다 남의 나라 말을 먼저 가르치고자 태평양을 건너가고, 지도급 인사조차도 제 나라 맞춤법도 모른 채, 공교육마저도 영어로 하자는 한심한 발상을 하는데도, 백성들은 그저 잘 살게 해준다는 말에 춤을 추며 하루 빨리 부자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기사에게 왕복 차삯과 대기료를 주기로 하고, 먼저 생가를 둘러보고는 거기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매천사당을 가자고 하였더니, 그는 그곳에 매천 사당이 없다고 우겼다. 나는 미리 입수한 사적지 지도를 보고 가는 데도 말이다. 마침 생가 들머리에 사당가는 길 표지판이 나오자 그제야 기사는 차를 그쪽으로 몰았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구먼요."

그는 자기 고장 출신의 매천을 몰랐던 게 겸연쩍은 양 거듭 사과했다. 얼마나 잘 먹고 살아야 백성들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질까? 사실 이즈음에는 최저 생계비 보장으로 굶는 이는 거의 없고, 20~30년 전에 견주면 거의 집집마다 차를 굴리면서 모두 부자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기갈이 든 사람들처럼 도시나 시골이나 온통 돈 돈 돈이요, 경제 경제 경제타령이다. 우선 당장 잘 살게 해준다면 산도 뭉개버리고 강줄기도 바꿔도 좋다. 후손들은 바다에 잠겨도, 기름 뜬 물을 먹어도 그저 오늘만 잘 살면 그만이다. 하루 빨리 부자 되어 태평양을 건너면 그만 아닌가. 도덕 양심이 밥 먹여 주나. 지도급 인사 좀 보시오. 그들 가운데 도덕과 양심을 지키며 바로 산 이가 몇이나 되나?

남(일본)은 수십만 동병(動兵)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하게 살 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하는 것이여. 태평천하! ……
- 채만식 <태평천하>

일본에 유학 간 손자의 피검 소식에 짐승처럼 고래고래 소리치는 윤직영 영감이 소설 속에서만 있는 인물 같지 않다.

아무도 살지 않는 어딘가 썰렁한 생가와 굳게 닫힌 사당을 멀찍이서 바라본 뒤,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돌아왔다. 기왕이면 매천 선생이 글을 쓰시다가 돌아가신 구례에다 숙소를 정하고자 곧장 순천행 버스를 탔다.

매천 황현 선생 사당
 매천 황현 선생 사당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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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홍영기 지음 한국사 시민강좌 41집의 <황현>, 정운현 지음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주섭일 지음 <프랑스의 대숙청>, 돌베개 <답사여행의 길잡이6>, 국가보훈처 공훈록 등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태그:#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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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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