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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안옹주. 드라마 <이산>.
 화안옹주.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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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손의 즉위를 계기로 <이산>의 인물구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종전에 세손의 등극을 극렬히 반대하던 사람들은 죽거나 사라지거나 혹은 뒤로 밀려났다. 그중의 한 명이 바로 화완옹주다.

언제나 야심차고 또 약간은 표독한 표정으로 양자 정후겸과 함께 세손의 제거를 획책하던 화완옹주. 그런 그를 보면서, “저 사람 정말로 정조의 고모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그는 조카 이산에게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 

화완옹주의 ‘악행’. ‘악행’이란 표현은 물론 정조를 기준으로 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객관적 표현이 아니다. 화완옹주 입장에서는 이산 대신 은전군(이산의 배다른 형제)을 옹립하는 편이 더 옳은 일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산이 승리했고 또 조선의 후예들이 이산을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화완옹주 본인의 극구 부정에도 불구하고 그를 ‘악녀’라고 부를 수 있다.

드라마 <이산>에서는 정순왕후가 화완옹주보다 세손의 등극과정에서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화완옹주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드라마와 달리 정순왕후-김귀주 라인은 정조의 등극 자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담담한 편이었다.

이산이 자신의 조카이고 또 비참하게 죽은 오빠의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화완옹주는 이산을 그저 정치적 라이벌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똑똑한 정후겸을 죽은 남편 정치달의 양자로 들이고는 세손 이산을 향해 정치적 대결을 걸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조카 겸 세손인 이산을 향해 위험하고도 대담한 대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대결에서 패배했다. 대결에서 패배한 자, 그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승자의 고모라 해도 열외가 될 수는 없다. 자기가 먼저 계급장 떼고 싸움을 걸었으니, 패배한 후에 계급장을 내보이며 “내가 너의 고모니라”라고 호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침녘에 활활 떠오르는 ‘태양’이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갈아치우려 한 화완옹주. 그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이후에 화완과 그의 양자는 벌을 피할 수 없었다. 화완은 일단 사저로 돌아갔고, 아들 정후겸은 정조 즉위년(1776) 8월에 사사되었다.

아들 정후겸의 죽음으로 사실상 오른팔을 잃은 셈이었지만, 새로운 집권세력은 ‘악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집권세력은 화완옹주 문제를 처결하라며 젊은 임금을 계속해서 압박했다. 화완옹주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새로운 권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혈육애가 강한 정조였다. 자신을 낳아주신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았고 또 그로 인해 남몰래 가슴앓이를 해온 정조였다. 그는 왕실에 더 이상의 비극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고모를 보호하고자 했다.

 양자 정후겸과 함께 도주하는 화안옹주. 드라마 <이산>.
 양자 정후겸과 함께 도주하는 화안옹주. 드라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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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선은 정조 혼자만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가 인정한 것처럼,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가 주도하는 조선사회의 공론은 ‘화완옹주를 저리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정조는 비록 제한적으로나마 여론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조가 부득이하게 취한 조치는 화완옹주를 섬에 가두는 것이었다. 여론은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을 희망했지만, 그는 그것으로써 여론을 무마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아무리 부모일지라도 자식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면 그 자식의 마음속에서 ‘나쁜 충동’이 생길 수도 있는 법이다. 부모에게도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있는데, 하물며 고모에게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으랴. 하루에도 몇 번씩 고모에 대한 분노로 가슴 한구석이 울컥 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참고 또 참았을 것이다.

만백성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일국의 군주가 사적 복수심 때문에 공권력을 마구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의 권력기반이 여전히 취약한 측면도 있었다.

또 아무리 밉다 해도, 화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고모였으니 정조로서는 자신의 분노를 한없이 드러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고모 겸 정적인 화완옹주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정조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화완옹주에 대한 정조의 애증. 그 애증의 ‘애’와 ‘증’ 중에서 이후 점점 더 커진 쪽은 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화완옹주를 얽매고 있는 족쇄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주었다.

섬에 유배된 그를 경기도 근처로 옮겼다가 나중에는 한성으로 불러들였고 그 후에는 죄를 용서해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정조는 끝까지 자신의 고모를 보호했다.

그러한 태도는 한편으로는 매우 인간적이고 훈훈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재앙의 불씨를 스스로 살려두는 것이 된다. 정조 사후에 그의 정적인 정순왕후 등이 개혁을 원위치 시키고 정조 세력을 탄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의 관용은 어찌 보면 자파 세력의 사회적 성장을 스스로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살아나지 못한 '정치적 무능력자' 화완옹주

그 같은 정조의 태도에 평소 불만을 품고 있던 조선의 관료들은 정조 사후에 단단히 작정을 하고 화완옹주의 처벌을 추진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순조 즉위년(1800) 8월 1일에 제기된 삼사 관원들의 상소였다.

이 상소에서 삼사 관원들은 새로 즉위한 순조 임금에게 요구했다. 당신은 선왕의 아들입니다. 선왕에게는 화완옹주라는 원수가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사실상 화완을 죽이라는 주청이었다. 삼사 관원들은 정조 때문에 이루지 못한 화완옹주의 처벌을 뒤늦게나마 순조 시대에라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국왕의 비답은 이러했다. “윤허하지 않는다!”

순조 임금의 비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순왕후의 비답이었다. 나이 11세에 왕위에 오른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또 다른 악녀’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악녀’가 ‘악녀’를 구한 것이다.

이처럼 순조 즉위년에 정순왕후 덕분에 또 한 번 목숨을 건진 화완옹주. 삼사의 관원들은 그런 원수가 편히 사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다 했지만, 그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결국 목숨을 건졌다.

이후 화완옹주는 점차적으로 사회의 이목에서 멀어져갔다. 정적인 정조 임금이 사라졌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치적 무능력자’였던 것이다.

사료에서 그의 사망 연대를 확인할 수 없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어느 ‘매스컴’도 그의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상태에서 그는 조용히 인생을 마감했다. 양자 정후겸을 내세워 인생을 ‘요란하게’ 살아보고자 했던 화완옹주는 결국 그렇게 ‘조용히’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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