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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3일, 7시가 막 넘어서는 시각.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와 헐레벌떡 다시 1번 출구 방향으로 뛰어 갔다. 번화한 혜화 거리의 연인들 사이를 뚫고 마침내 발견한 흥사단 간판. 마침 남녀 두 사람이 입구에서 인사를 하며 토론회 장소를 안내했다. 한글문화연대가 주최한 토론회 주제는 '영어 몰입 정책, 국가경쟁력 좀먹는다'.

 

마침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중년의 여성분이 비장한 목소리로 선언문 같은 것을 낭독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번 토론회를 주최한 '한글문화연대'의 고경희 대표였고, 선언문이 아니라 '인사말'이었다. 다음에 방송 아나운서 같이 보이는 여성(실제 YTN 이광연 아나운서였다)이 참석한 몇 인사들을 소개했다.

 

잠시 잘못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분위기에 편승해 마련된 형식적인 토론회 자리인가?' 그러나 마이크를 이어받은 정재환 사회자를 보자 앞서의 편견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바로 다른 생각에 이끌렸다. '정재환이라는 사회자가 개그맨이었던 그 사회자구나.'

 

'전국국어교사모임' 주관으로 열린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석했던 박거용 상명대 영어교육과 교수도 발제자가 아닌데도 참석해 토론을 지켜봤다. 영어교육정책 논란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활발히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이런 토론회들이, 박거용 교수처럼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함으로써 생각을 모으고 관계를 형성해 힘을 모아가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해 본다.

 

이어 본격적으로 진행된 토론회는 재치와 날카로움의 빛을 유감없이 발휘한 사회자의 입담과 깊이 있는 연구와 치밀한 논리로 무장한 발표자들의 청산유수 같은 발언으로 좌중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3월 13일 흥사단 강단에서 한글문화연대의 주최로 열린 "영어몰입교육, 국가 경쟁력 좀먹는다" 토론회

 

영어공용화 주장해 온 소설가는 왜 한글로 계속 소설 쓰나?

 

"밤거리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바로 술 취한 아빠들과 아이들이다"라며 밤 늦게까지 아이들이 경쟁을 위해 학원 공부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을 꼬집은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논리'에 대해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이 우리말을 아주 잘하지만, 그들이 사회 지도층을 형성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라며 그 허구성을 꼬집었다.

 

또 진중권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영어공용화를 주장해 온 복거일씨에 대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왜 아직까지 한글로 소설을 계속 쓰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조선일보>도 아직까지 한글로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말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김영명 '한글문화연대' 고문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문제를 지적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현 정부에 대해 "분신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분신하라고 할까봐 그것도 못하겠다"고 말했다. 

 

김영명 고문의 농담에 정재환 사회자는 "실현가능하지 않은 정책을 막자고 하는데 실현가능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응하면 되겠어요? 실현가능한 방안을 찾아야겠지요"라고 말해 토론회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렇듯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통쾌한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가 어우러진 시국선언이, 첫 시작의 어색한 비장함을 금세 대체했다.

 

발표자들이 토론회 가운데 이구동성으로 지적한 것은 바로 현 영어교육 정책과 그를 둘러싼 논의의 허구성이다. 허구성과 비논리성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부모와 교사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정부 정책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여 우리의 진정한 능력을 획득할 것인지가 이번 토론회의 핵심이다.

 

한학성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영어교육 논의의 허구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모든 국민에게 학교 교육만을 통해 유창한 영어 능력을 길러주겠다는 발상의 비현실성, 지금 당장 현재와 같은 대입 제도를 유지한 채 사교육 없이 대학에 가게 해주겠다는 발상의 비현실성,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입시와 취업, 승진 때문으로 우리끼리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인데, 그런 현실적인 동기를 외면하고 병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할 생각이 없으면서 '세계화에서의 영어 경쟁력'이라는 구호로 정책을 강행하고 있는 것의 허구성, 영어가 국가 경쟁력이라는 허구적이고 단순한 주장에 바탕해 정책을 내고 실패해도 일말의 검토도 없으면서 모든 국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진정성의 부재,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에 대해서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가정하면서 정작 영어 교사나 대학 영어 전공생들의 영어능력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며 외교관의 영어 능력에 대해서도 별다른 논의가 없는 모순적 태도."

 

정책입안자들이 자기 자녀들 한국 공교육에 맡길까?

 

진중권 중앙대 독어독문과 교수는 "실제로 이 정책을 입안하고 찬성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자녀를 외국에 보내지 말고 한국의 영어 공교육에 맡기라고 하면 아무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고, 이병민 교수는 "외국의 사례에 대한 배경과 조건에 대한 제대로 된 검토 없이, 무조건 그들과 비교하여 그들처럼 되자고 하는 것은 모두 허구적인 것이다"라고 성토했다.  

 

이렇듯 현재 정부 정책에는 모순과 비논리와 허구성이 판을 친다. 그럼에도 무조건 강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영명 고문은 권력의 본질은 자기 확장이며, 이번 영어교육 정책은 권력의 자기 확장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짚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다음은 김영명 고문의 말이다.

 

"한국사회는 일제시대를 통과하며 무계급 사회로 진입했는데, 이제 다시 돈을 많이 쏟아 부을수록 계급을 구획하기 훨씬 용이한 영어로 계급을 구분하려는 것이다. 정말 그들이 국민들로 하여금 영어를 잘 하게 하려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파주영어마을을 하고, 초등영어교육 시수를 높이면 영어를 잘 할거라 그들은 정말 믿는가? 영어강조 세력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인데, '너네 왜 그러냐'고 따져봤자 소용없다. 왜 맞는 말이 안 통하고 틀린 말이 통하는 것일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영어 세력들의 자기 이익을 확장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시민,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현 정부의 영어교육 방향이 정상적인 교육이 아니라는 것에 조직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질의응답 시간에 발언을 한 김정도 바른길 영어교육 연구소 소장은 비논리에 논리로 대응해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으니 강력한 법적 운동을 벌여나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심지어 김 소장은 "잘못된 정책으로 막대한 재정과 사교육비를 초래해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피해를 끼친 데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법도 고려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영어는 둘째치고 우리글도 독해 못하는 아이들

 

정재환 사회자는 '우리나라가 OECD 국가가 되고 세계 경제 10위권에 들었는데 영어 실력은 꼴등인 현실이 안타깝다'는 한 참석자의 발언을 듣고 "그러면 영어가 국가경쟁력은 아닌 건 분명하네요"라고 응대해 다시 한번 좌중을 끄덕이게 했다.

 

이어 정재환 사회자는 "영어에만 과도하게 투자하면 자연히 다른 분야에 대한 투자가 떨어지고 그러다 보면 영어 외 영역의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영어몰입교육, 국가 경쟁력 좀먹는다'는 토론회 제목이 지적하는 바를 다시 강조했다. 그렇게 쏟아 붓는 영어교육정책마저 그 실효성이나 효과가 부정적이기 그지없으니, 우리는 결국 영어도 못 건지고 다른 능력도 못 건질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실제로, 이전에는 독해나 문법을 강조해 그 영역의 실력은 어느 정도 되고 말하기 능력이 떨어졌지만, 요즘엔 회화 능력을 너무 강조해서 독해와 문법을 소흘히 해 독해 능력이 너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정책과 진정성 없는 정책으로 인해 회화 실력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 영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심지어는 한국어로 된 글의 독해 능력도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만연하다. 

 

진중권 중앙대 독어독문과 교수는 학생들의 국어실력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말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말이 안 되는 것은 머리를 못 굴리는 것이다. 자기 견해가 없다. 생각이 중요하다. 어휘력이 많다는 것은 세계를 훨씬 세세하게 본다는 것이며 말을 잘 한다는 것은 생각을 논리적으로 잘 한다는 것이다. 말을 쉽게 한다고 자부하는 나의 수업을 듣고도 백지 답안지를 내는 학생이 1/4이나 된다. 자기 생각이 없으면 아무리 발음이 좋아도 제대로 대화할 수 없다."

 

도대체 그렇게 읊어대는 우리의 경쟁력은 어디서 확보해야 할지 난감하다. 이제 우리의 경쟁력을, 우리 자신의 참된 능력을, 국가의 허구적이고 비논리적인 정책에 맡기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요모조모 따져서 야무지게 챙겨야 하지 아닐까 한다.

 

무조건 '어쩌나?' 하고 이 학원 저 학원 문만 두드리고, 시키는 정책 받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학생들에게 적용해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을 피해자로 몰아갈 게 아니라, 이런 토론회에서 나오는 알찬 자료들을 챙겨 공부해서 우리의 참된 경쟁력을 좀먹는 사태의 심각성을 더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

 

그 심각성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여 우리 자신의 행복과 참된 경쟁력(능력)을 지키기 위해 저항해야 할 것이다. 혼자는 어렵다. 힘을 모아야 한다.

 

 3월 13일 흥사단 강단에서 한글문화연대의 주최로 열린 "영어몰입교육, 국가 경쟁력 좀먹는다" 토론회

 

제 밥 그릇 당당히 지키는 것이 국가 발전과 함께 간다

 

다음은 마지막으로 김영명 고문의 당부다.

 

"학부모 교사 단체들이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밥그릇 지키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제 밥 그릇 당당히 지키는 것이 국가 발전과 함께 갑니다. 또한 옳은 걸 널리 홍보하기 위해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많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행복과 능력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아 저항해야 합니다."

 

끝으로, 이 토론회를 주최한 한글문화연대 부대표를 맡고 있는 정재환 사회자는, 우리 말글 교육을 제대로 세워가고 그 맥락에서 올바른 영어교육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글문화연대와 같은 단체에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했다.

 

회비를 내지 않는 누리집 회원으로 참석해도 되고, 회비를 정기적으로 내는 회원으로 참석해도 굳이 말리지 않겠다고 하니, 말리기 전에 빨리 정회원으로 가입해도 좋을 듯하다. 정재환 사회자는 "우리는 계속 이 싸움을 해갈 것인데, 300명인 한글연대의 회원 수로는 이런 사안에 힘있게 대응하기 아직 역부족"이라고 했다.

 

잘못된 현실을 바꿔나가는 쌍두마차는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는 것과 더불어 무시할 수 없는 결집력을 보이는 것이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오늘 나도 한글문화연대 회원으로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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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의 작은 마을에서 친구들과 살면서 마을 안팎으로, 나라 안팎으로 어떻게 하면 함께 행복하고 공의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관심 분야는 언론/교육/마을공동체/환경/번역 등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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