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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이산>.
 드라마 <이산>.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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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산>을 이끌어가는 흐름 가운데에 하나는 ‘후궁 간택’이라는 사안이다.

장태우의 등장과 역병의 창궐로 인해 정조가 위기에 빠진 상황인데도 혜경궁 홍씨는 후궁 간택을 서두른다. 이런 상황일수록 후궁 간택을 빨리 서두르는 게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그리고 혜경궁이 적극 추천하는 후보는 홍국영의 누이동생(훗날의 원빈 홍씨)이다. 같은 홍씨라고 팔을 안으로 굽히는 걸까?

그런 시어머니에 맞서 효의황후도 독자적 움직임을 전개한다. 성송연 때문에 은근히 가슴앓이를 해온 그는 시어머니가 홍국영의 여동생을 적극 후원하자, 뜻밖에도 성송연을 새로운 ‘내 남편의 부인’으로 적극 추천함으로써 시어머니의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려 한다.

송연이만큼 내 남편이 의지할 여자가 없으며 실세 홍국영이 군주의 처남까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지만, 어찌 보면 이이제이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어찌 생각하면, ‘내 남자의 여자’를 하나라도 줄여보자는 심산은 없었을까? 홍국영의 동생이 후궁이 되면 ‘내 남자의 여자’가 1명 더 추가되는 것이지만, 송연이가 후궁이 되면 그 숫자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 물론 착하디착한 효의황후가 그런 생각까지야 했을까?

이 같은 드라마 상황을 놓고 보면, 송연이는 혜경궁과 효의황후 간의 알력 구도 하에서 효의황후의 라인에 섰다는 말이 된다. 홍국영의 여동생을 내세운 혜경궁을 꺾기 위해 효의황후가 뽑아든 대항 카드가 바로 송연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럼, 성송연의 모델인 의빈 성씨(~1786년)를 둘러싼 실제 상황은 어떠했을까?

성송연은 효의왕후 '라인'?

결론부터 말하면, 의빈 성씨는 어느 한편에 선 적이 없으며 홍국영과도 대립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사료상으로는 그렇게 판단된다. 아래의 세 가지 근거가 그런 결론을 뒷받침한다.

첫째, 성씨가 후궁이 된 시점은 홍국영이 죽은 뒤였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성씨는 홍국영이 죽은 이듬해인 1782년에 정3품 소용(후궁의 8등급 중 5단계)이 되었고 다음 해인 1783년에 정1품 빈(1단계)으로 승격되었다.

이 점을 본다면, 그는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 홍씨(1779년 사망)와 홍국영(1781년 사망)이 모두 죽은 뒤에야 비로소 후궁의 자리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후궁이 되는 과정에서 홍국영 측과의 알력이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효의황후의 지원을 받는 성송연. 드라마 <이산>.
 효의황후의 지원을 받는 성송연. 드라마 <이산>.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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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씨는 서명선의 적극 권유에 힘입어 후궁이 되었다. 이 말은 서명선이 정조와 성씨의 ‘소개팅’을 주선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씨가 1782년에 후궁이 되는 데에 서명선의 주청이 큰 힘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성씨는 효의황후가 아닌 서명선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후궁 자리에 올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효의황후가 아무리 선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역사픽션 <이산>에서처럼 그렇게 적극적으로 남편의 중혼을 추진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효의황후가 성씨를 적극 추천한다는 설정은 극의 재미를 위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이 드라마에서 서명선을 등장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설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씨가 후궁이 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서명선은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홍인한이 세손을 압박하던 때에 결정적 상소 ‘한 방’으로 홍인한을 떨어뜨리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관철시키는 데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서명선의 상소가 올라온 날인 12월 3일(음력)을 기해 정조가 매년 그에게 특별파티를 열어주었다는 점은 이전에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서명선, 성송연이 후궁이 되는데 기여

이처럼 판단력이 기민한 서명선이 성씨를 적극 지원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 당파를 만들다가 주군에게 버림을 받은 홍국영의 씁쓸한 최후를 목격한 그가 당파성이 강한 여인을 정조의 후궁으로 지원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서명선에게는 1776년의 상소 ‘한 방’이 전광판을 때리는 홈런이었듯이, 1782년의 성씨 지원 역시 그 같은 결정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와 성씨의 사이가 매우 각별해서 그 관계에서 정조의 자녀 4명 중 2명(1남 1녀)이 나왔다는 점을 봐도, 서명선이 성씨를 지원한 것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서명선은 언제나 그 ‘한 방’이 강한 ‘사나이’였다. 서명선의 지원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이어지는 셋째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혜경궁의 미움을 받는 성송연. 드라마 <이산>.
 혜경궁의 미움을 받는 성송연. 드라마 <이산>.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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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성씨는 궐내의 인간관계가 원만한 편이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궁중 어른들의 사랑을 두루 받았다고 한다. 궁궐 어른들의 사랑을 두루 받았다는 것은 궐내의 주요 원로인 정순왕후나 혜경궁 홍씨(1815년 사망)와의 사이에서 특별한 문제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인간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성씨가 궐내 사랑을 두루 받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물론 문효세자를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처럼 그가 후궁이 되는 과정에서 혜경궁의 미움을 받았다면 ‘결혼’ 이후에도 고부갈등이 계속되었을 것이고, 만약 그랬다면 궐내 어른들의 사랑을 두루두루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송연의 실제 모델인 의빈 성씨는 홍국영 측과의 갈등 속에서가 아니라 홍국영의 사후에 후궁으로 등장했고, 효의황후의 적극 지원이 아닌 서명선의 적극 권유에 의해 후궁 자리에 올랐으며, 궐내 어른들의 사랑을 두루 받을 정도로 궐내의 분파싸움에 휘말리지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무(無)당파의 여인이라서, 다시 말해 ‘탕평’의 여인이라서 정조가 그렇게 특별히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성씨마저 어느 한 당파에 속해 있었다면, 정조가 처음부터 좋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후궁으로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그와의 사이에서 자녀의 절반이 태어날 정도로 정조와 ‘친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파를 싫어하는 정조의 성격을 고려해볼 때에 그런 추론도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와 같이 의빈 성씨는 어느 누구의 라인에도 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무(無)당파의 여인 혹은 탕평의 여인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오로지 ‘정조 라인’에만 선 여인이 아니었을까? ‘탕평의 사나이’ 정조는 ‘탕평의 여인네’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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