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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띠아이쓰리의 성소탑  시바신에게 바쳐진 반띠아이쓰리의 성소탑
▲ 반띠아이쓰리의 성소탑 시바신에게 바쳐진 반띠아이쓰리의 성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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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씨엠립 곳곳에는 유년시절의 내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빈집에 홀로 놀던 아이는 밥 때에 맞춰 들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고, 개울가에는 깡마른 몰골에 배만 ‘톡’ 튀어나온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추수를 끝낸 논에는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예닐곱의 누이들은 한결같이 대여섯 살 동생을 등에 업고 있었다.

참 묘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지독히도 탈출하고 싶었던 배고픈 산골마을 사람들과 가난한 시절의 기억들이 이제는 꿈속에라도 나타나길 바라니 말이다. 내가 앙코르와 티베트 사람들에 집착했던 이유가 유려한 건축물이나 문명의 흔적이 아니라 내 기억 속의 편린이 되어버린 성장의 파편들을 모아내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그곳에 가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시바신의 남근을 상징하는 링가 생명의 번식과 창조를 기원하는 링가는 반띠아이쓰리 입구 곳곳에 세워져 있다.
▲ 시바신의 남근을 상징하는 링가 생명의 번식과 창조를 기원하는 링가는 반띠아이쓰리 입구 곳곳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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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이번 여행이 기존의 내 여행과는 전혀 다른 일종의 패키지였기 때문에 앙코르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지는 못했다. 패키지라고 하는 것이 정보습득과 속도감 있게 대상지를 체현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깊고 자세히 보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배낭을 짊어지고 꼭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앙코르와트 유적이 있는 2월의 씨엠립은 평균기온이 30도 이내로 우리의 초여름처럼 따듯하고 상쾌했다. 첫날 방문한 반띠아이쓰리(Banteay Srei)는 크메르제국의 라젠드라바르만2세(944~968) 때 그의 스승인 브라만 승려 야즈나바라하가 시바신에게 헌정한 사원이다. 시기적으로는 발해~신라 남북국시대에서 고려건국 초기가 될 것 같다.

화려한 반띠아이쓰리 입구 붉은색 라테라이트석으로 치장한 반띠아이쓰리의 입구
▲ 화려한 반띠아이쓰리 입구 붉은색 라테라이트석으로 치장한 반띠아이쓰리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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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띠아이는 ‘여인의 성채’라는 의미다. 아마도 분홍색 사암과 붉은 라테라이트석을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사원 전체가 홍련처럼 화려하고 부조로 된 조각이 정교한데다 규모가 타 사원에 비해서 아담해서 마치 아리따운 여성의 자태를 지닌 듯하다.

이곳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크메르 건축 예술의 보석’으로 불리는데 섬세하고 깊게 새겼음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고 화려한 라인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크메르인들이 반띠아이를 앙코르와트의 축소판으로 삼아 미리 연습하고 착공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반띠아이쓰리의 전경 브라만 승려 야즈나바라하가 시바신에게 헌정한 반띠아이쓰리의 전경
▲ 반띠아이쓰리의 전경 브라만 승려 야즈나바라하가 시바신에게 헌정한 반띠아이쓰리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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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눈여겨 볼 곳이 앙코르와트에서도 발견되는 신전 양쪽의 화려한 장서각인데 실제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으로 힌두신화를 설명한다. 장서각은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새긴 두 권의 경전인 셈이다. 티베트불교의 마니챠(이것을 한 번 돌리면 경전 한 권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함)나 우리 사찰의 외벽을 장식하는 ‘탱화’나 ‘불화’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중앙 성소에는 시바신의 남근을 상징하는 링가(Linga)가 서 있고 시바신의 부인인 파라마티의 자궁을 상징하는 구조물도 있다. 이는 아마도 생명의 번식과 창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또한 앙코르의 여타의 탑들에 비해 아담한 크기의 성소탑이 여러 무리가 있는데, 기단 위에 붉은 라테라이트석으로 4단의 탑을 쌓아 올렸다. 탑의 동쪽으로 문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가짜 문이다. 3곳의 성소 중 두 개는 시바신을, 하나는 비쉬누 신을 위한 곳이라고 한다.

신의 조각으로 일컫는 화려한 장서각 힌두교의 성전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르타를 새긴 장서의 각의 화려한 조각
▲ 신의 조각으로 일컫는 화려한 장서각 힌두교의 성전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르타를 새긴 장서의 각의 화려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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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는 다신을 섬기는데 대표적인 3신이 있다. 파괴의 신인 시바신과  질서의 신인 비쉬누신, 그리고 창조의 신인 브라마신이다. 힌두교에서 선과 악이 공존한다. 시바신은 파괴를 위한 파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탄생과 창조를 위한 파괴를 행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불교의 윤회(삼사라)와 업(카르마) 사상과 유사하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카르마의 결과이며 탄생과 죽음의 삼사라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삼사라와 카르마의 굴레에서 해탈하는 것이 힌두신앙의 최종점이다.

장서의 각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경전을 직접 새겼다는 장서의 각
▲ 장서의 각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경전을 직접 새겼다는 장서의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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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슬람교,  힌두교와 불교가 한 뿌리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신화와 힌두의 신화가 흡사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반띠아이쓰리의 주인인 시바신이 명상에서 깨어나 부인인 파라마티와 사랑에 빠지게 된 연유가 사랑의 신인 카마신이 쏜 사랑의 화살을 통해서였다는 이야기는 큐피트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간으로서 천년에 한번씩 자신의 머리를 브라마신에게 바쳐 영생불멸을 얻었다는 라바나가 시바신의 권위에 도전해 산 밑에 봉인되었다는 대목은 제우스신의 권위에 도전해 바위산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자기 몸은 물론 해와 달까지 집어삼킨 식욕의 소유자인 칼키(시바신의 셋째부인)는 자기 몸까지 먹어치운 허기와 식욕의 상징 에리식톤과 흡사하다.

신의 세계로 향하는 문 신전의 내부를 향하는 아름다운 문, 마치 나무레 세긴 듯 그 조각이 화려하고 깊다.
▲ 신의 세계로 향하는 문 신전의 내부를 향하는 아름다운 문, 마치 나무레 세긴 듯 그 조각이 화려하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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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전능하다는 여호와도 스스로를 ‘질투하는 신’이라며 다른 신을 섬길 경우 3~4대에 걸쳐 죄를 갚게 만들고 따르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는 섬뜩한 경고를 한다. 신이 완벽한 절대자의 모습으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같이 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친근함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다.

힌두교의 성전인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 지존의 노래)에서는 해탈에 이르는 길을 3가지로 이야기한다. 첫번째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두번째는 직관적 통찰의 길이며 마지막은 헌신과 사랑을 담은 박애의 길이다. 그러나 요즘의 힌두신앙은 수행을 통한 해탈이나 깊은 통찰의 세계보다는 신을 섬기고 의지해 현세의 고통을 잊고 다음 생에서 보다 나은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을 최고로 삼는다.

파라마티의 자궁 시바신의 부인인 파라마티의 자궁의 상징물로 생명의 잉태와 탄생을 기원하고 있다.
▲ 파라마티의 자궁 시바신의 부인인 파라마티의 자궁의 상징물로 생명의 잉태와 탄생을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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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해탈이나 철학적 완성에 이르는 고상한 길보다는 어렵고 힘든 속박과 가난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오늘날의 종교는 인간구원이라는 본원적 화두를 일탈해 물신과 누리는 자들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어쩌면 성전은 불평등과 갈등의 출발점이다. 결국 종교가 ‘바라옵고 원하옵는 것’이라면 신의 가르침과 인간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에 다녀왔습니다. 앙코르기행은 앙코르와트와 바콩사원 등 사원이야기와, 앙코르의 여러 왕과 왕궁 그리고 사라진 크메르제국, 세계최대의 인공호수 톨레사호수와 수상촌 사람들, 킬링필드이야기 등을 묶어 5~7회에 거쳐 연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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