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추격자> 포스터

<추격자> 포스터 ⓒ (주)영화사 비단길

나는 연쇄살인범 이야기가 싫다. 그가 잡혀서 죄값을 받든 그가 잡히지 않아서 사건이 미궁에 빠지든 결론적으로 죄없는 사람들은 한 미치광이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꼴이니, 그것을 보고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영화에 관해 칭찬에 칭찬이 줄을 이어도 망설였다. <추격자>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

내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결국 나는 <추격자>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 이유는 단지 김윤석이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김윤석의 팬이 된 것은 공교롭게도 아침드라마 <있을 때 잘해>에서 본부인 하희라를 두고 내연녀 지수원과 바람피는 남편 하동규를 연기할 때다. 사실 얼굴을 익힌 것은 내 인생 최고의 드라마 <부활>에서였지만, 그 때는 엄태웅의 포스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차마 김윤석에게까지 시선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눈에 띄면서도 띄지 않는 배우, 그 이중성에 순간 마음을 빼앗겼었지만 그 매력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아침 드라마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 때까지 나는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나 불륜을 바라보는 여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반응과 행동을 보이는 데에 적잖이 지쳐 있었다.

그런데 이 김윤석이라는 배우. 바람을 피면서도 능청맞고 천연덕스럽고, 나중에 벌을 받을 때는 오히려 당당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연스러움… 불륜드라마가 굉장히 재미있었던 적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부터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팬이 되었다.

이왕 <추격자>를 보자고 마음 먹었으니 당당하게 영화 속 인물들과 마주하기 위해 심야 영화를 택했다. 300여석이 넘는 의자에 고작 50여명이 모여 앉아 영화를 봤다.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두려움. 밤이라는 시간적 공간. 그리고 관객들의 시선 앞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끈질긴 줄다리기.

<추격자>라는 영화가 촘촘한 날실과 같다면, 그 영화를 보는 50여명의 사람들은 씨실과 같았다. 날실과 씨실의 만남. 극장 안이 빠져나갈 수 없는 긴장감으로 꽉 조여 들었다.

[이유 1] <추격자> 안에서 <공공의 적>과 <살인의 추억>을 만나다

 <추격자>의 한 장면.

<추격자>의 한 장면. ⓒ (주)영화사 비단길


<추격자>의 중호(김윤석)는 <공공의 적>의 강철중(설경구)과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의 중간선상쯤에 있다. 그는 경찰이지만 비리 경찰로 해직된 상태이고,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을 쫓지만 그가 살인범, 즉 악인이기 때문에 쫓는 것이 아니다.

흔히 임중호는 사람들이 말하는 도덕심이라고는 없지만 경찰로서의 감은 대한민국 최고다. 순간 순간 표정이 변해야 하고 마치 다중인격이 된 것처럼 중호는 변화무쌍한 인간이다. 이러한 그의 캐릭터가 영화에서 핵심이 되니 영화가 풍부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여기에 이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김윤석이다. 김윤석은 인간의 절박함을 자연스럽게 표출할 줄 아는 한국의 몇 안 되는 귀한 배우 중에 하나다. 그의 연기가 영화 속에서 정말 빛을 발한다.

영화 막판에 그렇게 쫓던 지영민을 영민의 집에서 맞닥뜨리고 그가 내뱉는 한 마디.

"어디 가니? 들어가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장면을 연기하면서 중호는 지영민을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오래 만났던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그 당시의 중호의 말만 듣고 있으면 그가 지영민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 순간 잊게 된다.

<살인의 추억>에서 두만은 좀 오버스럽게 범인을 잡기 위해 안달을 떤다면, <추격자>의 중호는 <공공의 적>의 강철중의 날카로움과 두만의 과장을 한꺼번에 지니고 범인을 쫓는다. 철중와 두만을 섞어 놓은 중호. 정말 매력적인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추격자>의 한 장면.

<추격자>의 한 장면. ⓒ (주)영화사 비단길


여기에 지영민을 연기한 하정우라는 배우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살인의 추억>의 범인으로 지목된 박현규(박해일)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깔고 있다. 전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는 "여자 팔았어요?"라는 경찰의 말에 들릴 듯 말 듯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아니요, 죽였어요"를 외친다.

<추격자> 속에 살고 있는 지영민을 보고 있으면 고요함이 생각난다. 경찰서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영민 하나 때문에 분주한데 지영민만 홀로 고요할 뿐이다. 마치 시스템을 다 꿰뚫고 있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지영민도 그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니 경찰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지영민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지영민의 고요함이 깨지는 순간은 바로 중호를 만났을 때뿐이다. 중호는 지영민의 시점에서 벗어나서 지영민을 추격한다. 지영민은 부처님 손바닥을 빠져나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호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내심 불안할 뿐이다. 왜냐하면 중호는 일반 사람들의 패턴에서 한참 비껴나간 캐릭터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쫓는 것은 도덕심이라는 평범한 감상이 아니다. 돈과 자신이 부리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지영민을 쫓는다. 현실적인 이유와 지극히 현실적인 살인. 결국 지영민을 잡는 것은 중호의 몫일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살인의 추억>과 <공공의 적>에서 업그레이드 된 2008년 한국 영화다. 두 영화도 재미있었는데, 업그레이드 됐다면 어찌 호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유 2] 한국적인 추격씬, 그리고 미드의 영향

<추격자>에 가장 많이 나오는 동네는 망원동이고 사건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진부한 연쇄살인범 이야기에 배경은 망원동일 뿐이고 시간은 고작 하룻밤이다. 이러한 아이템만 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쪽박차기 딱 좋은 영화다.

만약 이 영화가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를 모방했다면 이렇듯 재미있는 영화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한국이라는 나라적 상황, 그리고 그 속에 공간을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색다른 추격영화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또 요즘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뜨고 있는 미국 드라마의 장점을 적절히 차용함으로써 퓨전 형식의 새로운 한국 영화를 만들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살인의 추억>에서 여러 사람의 울분을 자아냈던 여전히 잘 시행되지 않고 있는 초동수사, 큰 잘못을 더 큰 잘못으로 메우려고 하는 경찰의 얄팍함, 성과 올리기에 급급한 지쳐 있는 사실적인 형사들, 경찰 체포의 허점을 이용할 줄 아는 살인범. 이러한 한국적인 상황은 중호가 영민을 쫓는 영화적인 큰 줄기에 힘을 보탠다.

여기에 망원동의 골목과 빽빽이 채워진 주택들을 망연자실 바라보거나 미진(서영희)을 찾기 위해 헐떡이며 뛰어다니는 중호의 모습을 카메라가 사실적으로 쫓으면서 중호의 긴장감과 촉박함을 관객이 공유할 수 있게 도와준다(실제로 이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20시간을 뛰어다녔다고 하니, 배우들이 지쳐 보이는 것은 어쩌면 연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밤이라는 알 수 없는 시공간, 어두운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열린 존재. 그 존재 자체가  망원동의 골목, 연쇄 살인범의 살인행각, 중호의 추격과 잘 어울린다. 이러한 조화가 또 다른 긴장감을 유발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유명한 미드 <24>를 보면 잭 바우어(키퍼 서덜랜드)에게는 반드시 목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다든지, 자기 자신의 가족을 구한다든지, 동료들을 구하거나 하는 등이 그것.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24시간에 불과하다.

미드 <24>와 견줄만한 영화 <추격자>

 <추격자>의 한 장면.

<추격자>의 한 장면. ⓒ (주)영화사 비단길


<추격자>는 <24>와 같은 틀을 유지하고 있다. 중호는 미진이 숨을 거두기 전에 그녀를 찾아야 하고, 지영민이 풀려나기 전에 그녀를 찾아야만 한다. 물론 미진의 어린 딸 때문에 중호의 목표는 더 분명해진다. '그녀를 찾아야 한다. 되도록이면 살아 있는 채로….'

그에게 있는 최고의 단서는 어느 집에 맞는지 모르는 열쇠꾸러미뿐이고 중호를 도와야 하는 경찰들은 도리어 중호의 방해만 될 뿐이다. 결국 중간에 중호의 목표는 바뀌게 된다. 미진을 찾는 것에서 영민을 죽여버리겠다는 결심으로.

이렇듯 주인공의 뚜렷한 목표, 시간과 공간의 한정, 그리고 살인범과 해직된 비리 경찰…. 여러 상황이 맞물리면서 추격자는 미드 <24>와 견줄만한 영화가 되었다.

사실 그렇고 그런 틈바구니에서 그렇고 그런 생각들 속에서 참신함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돈이 될만한 상업적인 기획영화가 주를 이루는 한국영화의 현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미 20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추격자>에 호응한 이유는 새로움과 재미를 동시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추격자>만의 강렬한 매력, 강렬한 연기자들의 연기… 김윤석의 인터뷰 내용처럼 추격자는 매우 '핫(hot)'한 영화다.

이러한 뜨거움이 19세 관람가의 등급을 뛰어넘고, 잔인한 영화라는 꼬리표를 뛰어넘고, 연쇄살인범이야기라는 진부한 시선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추격자>를 봐야만 한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미디어 다음 블로거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추격자 김윤석 하정우 살인의추억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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