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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왕과 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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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사극 <왕과 나>가 방영 초기의 폭발적 인기를 상실하고 지금은 어딘가로 한없이 표류 중이다. 시청률 면에서도 <이산>이나 <대왕세종>에 추월당한 지 이미 오래다. 무엇보다도 시청자들이 <왕과 나>를 외면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에 이미 실망한 것이다.

그 원인을 놓고, 캐스팅을 잘못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여인천하>로 흘러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럼, 또 다른 원인은 없는 걸까? 여기서는 <왕과 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극본 상의 구조적 문제점 중 한 가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극본상의 구조적 문제점이란 것은, '없어야 할 것'이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 '없어야 할 것'이 드라마의 구도를 지배하고, 그 '있어야 할 것'이 방영 초기에 실종된 점이 <왕과 나>의 실패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그 '없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그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먼저, 그동안 이 드라마를 지배해온 그 '없어야 할 것'은 바로 남녀 간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남자'인 왕과 '남자'인 내시의 관계가 드라마를 지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자'인 왕비와 '남자'인 내시의 관계가 이 드라마를 지배해온 것이다.

미천한 천동이와 양반인 소화 아씨의 풋풋한 사랑이 내시 김처선과 중전 윤씨의 사랑으로 발전하면서 이 드라마는 남녀 간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가 되고 말았다.

SBS 홈페이지 <왕과 나> 코너에 있는 "이 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거세한 내시의 감동적 일대기"란 문구는 이 드라마가 처음부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거세한 내시의 감동적 일대기”. <왕과 나>는 처음부터 남남관계가 아닌 남녀관계를 기본구도로 설정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거세한 내시의 감동적 일대기”. <왕과 나>는 처음부터 남남관계가 아닌 남녀관계를 기본구도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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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이 처음에 기대한 것은 '남자'인 왕과 '남자'인 내시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온갖 희로애락의 전개였다. 다시 말해, 남녀관계가 아닌 남남관계를 기대한 것이다. 항상 궁금하면서도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그 관계가 <왕과 나>에서 묘사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성인 연기자로 바뀌면서 이 드라마의 기본 구도는 남남관계가 아닌 남녀관계로 변질되고 말았다. 신분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결코 이룰 수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을 묘사하는 드라마로 바뀌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이 드라마의 제목은 <왕비와 나>가 되었어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 양반댁 마님과 젊은 머슴의 관계를 다루는 드라마였다면 분명히 발생했을 어떤 극적 긴장감이 중전 윤씨와 김처선의 관계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중전 윤씨와 김처선을 지켜보면서 '저 둘이 잘 돼야 할 텐데!', '저 둘이 깨지면 어떡하지?'라며 노심초사해한 시청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왕과 나>가 표방한 중전 윤씨와 김처선의 사랑은 시청자들에게 별다른 긴장감을 주지 못했다. 드라마에서 재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럼, 마님과 머슴의 관계에서는 발생하는 긴장감이 왕비와 내시의 관계에서는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양반댁 마님과 젊은 머슴의 사랑은 한편으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룰 수 있는 사랑'이다. 신분적으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지만 신체적으로는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야반도주에만 성공한다면, 그 둘의 사랑은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사랑'으로 전환될 수 있다. 둘의 사랑이 '이룰 수 없는 사랑'에서 '이룰 수 있는 사랑'으로 전환될 수 있는 탈출구(야반도주)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에서는 긴장감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야반도주에 성공할 수 있을까?', '혹시 들키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시청자들의 긴장을 유발시킬 수 있다.

<왕과 나>의 주인공 김처선.
 <왕과 나>의 주인공 김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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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비와 내시의 관계에서는 이 같은 탈출구가 있을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탈출구가 원칙상 불필요하다.

이 둘의 사랑은 신분적으로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인 동시에 신체적으로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야반도주 같은 탈출구가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단둘이 있다 해도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대화를 즐길 수 있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눈빛과 눈빛으로 오가는 '플라토닉 러브'는 궁 안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이라는 공간적 제약 하에서 오히려 더 빛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왕비와 내시의 사랑에 대해 별다른 긴장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양반댁 마님과 젊은 머슴의 경우에는 두 사람이 야반도주에만 성공한다면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기대감을 가질 수 있지만, 왕비와 내시의 경우에는 그런 기대감을 걸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이처럼 긴장감이 생길 여지가 별로 없는 소재를 드라마의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왕과 나>는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였던 것이다.

드라마 제작진이 도중에 <여인천하>로 바꿔보기도 하고 한겨울에 뜨거운 어우동을 전격 투입해 보기도 하는 등의 엉뚱한 해법을 시도한 것은 위와 같은 본질적 원인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없어야 할 것'이 <왕과 나>를 지배해왔기 때문에 드라마 자체가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처선의 사랑을 받지 말았어야 할 ‘여자’ 중전 윤씨.
 김처선의 사랑을 받지 말았어야 할 ‘여자’ 중전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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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 드라마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그 '있어야 할 것'이란 바로 '남남간의 특수한 사랑'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시청자들이 기대한 것은 윤씨와 김처선의 관계가 아닌 성종 임금과 김처선의 관계였다. 바로 이 남남관계를 다루는 것이 내시 드라마의 묘미인 것이다.

같은 남자관계인데도 때로는 군주의 잘못을 뒤집어쓰기도 하면서 일평생 오로지 군주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내시들의 삶과 사랑과 애환이 이 드라마의 기본구도가 되었어야 한다. 어떻게 남자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도가 <왕과 나>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과 내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묘한 법칙'은 같은 남자들끼리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서 남녀관계보다도 더 강력한 어떤 '자석' 같은 것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사랑을 굳게 언약한 남녀도 사귀다 보면 싫증도 날 수 있고 혹은 배신도 할 수 있는데, 남남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왕과 내시들은 대체로 남녀관계 이상의 굳은 의리를 지키곤 했다.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동기간도 아닌데 내시들이 왕에게 어떻게 그렇게 강한 의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부모자식 간에도 극도의 기근 상황에서는 서로 잡아먹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내시들은 어떻게 그렇게 목숨을 다하면서까지 왕에게 충성할 수 있었을까?

김처선의 사랑을 받았어야 할 ‘남자’ 성종 임금.
 김처선의 사랑을 받았어야 할 ‘남자’ 성종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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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에 가신들이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은 어떤 보상을 바라기 때문인데, 왕에게 아무리 충성해봤자 조정에 출사할 수도 없는 내시들이 왕에게 그토록 충성을 바친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가족에게 주어질 보상을 바라고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가신들은 많이 보았지만, 그런 가족도 없는 내시들이 왕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시들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궁 밖이 훨씬 더 뱃속 편했을 것이다. 왕조시대의 궁궐 안에서 작용한 어떤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 <왕과 나>에 '있어야 할 것'이었다.

<왕과 나>는 위와 같은 의문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왕과 나>는 '없어야 할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있어야 할 것'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성종 임금과 김처선의 의리를 전면에 내세웠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전 윤씨와 김처선의 플라토닉 러브를 앞세우다 보니 그 같은 의문에 대답할 만한 여지를 스스로 봉쇄하고 만 것이다.

이후에 왕과 내시의 관계를 소재로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고자 한다면, 내시들이 왕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도록 만든 왕조시대의 메커니즘을 드라마의 기본구도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남녀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혈연관계도 아니고 또 어떤 대단한 보상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시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왕에게 지극정성을 다한 이유는 무엇일까? 왕과 내시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제시되어야 한다.


태그:#왕과 나, #김처선, #폐비윤씨,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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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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