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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과 김원봉 단장을 다룬 신문기사.<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의열단과 김원봉 단장을 다룬 신문기사.<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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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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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단장, 혁명간부학교 교장, 민족혁명당 당수,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

약산(若山) 김원봉 선생(1898~1958?)이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며 얻은 직책들이다. 묵직한 그의 직위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열정과 투지가 묻어 나온다. 

올해는 그가 사망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때맞춰 그의 평전이 나왔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최근 <약산 김원봉 평전>(시대의 창)을 펴낸 것.

김 관장은 평전에서 김원봉 선생 앞에 접두사 같은 몇 가지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 '한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대표적 혁명가',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운'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등이다.

실제 많은 학자들이 일제강점기 중국 관내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우파의 백범 김구 선생과 좌파의 김원봉 선생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김원봉 선생이 낯선 이유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인데 왜 우리에게는 그
이름이 낯설기만 한 것일까? 평전은 이 같은 의문을 추적한다. 우선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항일투쟁의 업적'을 확인시킨다.

그가 선택한 독립운동 방법은 '폭렬투쟁(暴烈鬪爭)'이다. '자유는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판단에서다.

그가 조직한 의열단은 1920~30년대 민족운동단체 중 임시정부를 제외한 가장 긴 활동단체로 기록된다. 그는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에 감격하면서도 무력항쟁이 아닌 비폭력 정신으로 전개된 데 대해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훗날 신채호 선생도 김원봉 선생의 간청으로 쓴 <조선의열단 선언>을 통해 '독립운동 한다면서 칼 한번, 총 한 방 쏘지 않고 편지질이나 하고 외국, 심지어 적국의 처분이나 기다리는 세력'을 성토하기도 했다.

이는 김원봉 선생이 폭력투쟁과 무력항쟁, 유격전 등을 벌이는 의열단을 조직한 이유이기도 하다.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위임통치론이 아닌 노동자 농민이 주체가 된 폭렬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칼 한번, 총 한 방 쏘지 않아도 독립이 올까?

이후 의열단은 폭탄 국내 반입의거, 부산경찰서장 폭사의거, 밀양경찰서 폭사의거, 종로경
찰서 폭파의거, 일본 육군대장 저격의거, 일제 밀정 처단의거, 경북 의열단 사건,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조선식산 은행 습격 의거 등 항일운동에 큰 행적을 남겼다. 일제에게 의열단은 어떤 존재였을까?

"일제에게 의열단은 끔찍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요지의 훈령을 상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도 했다…(중략) …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됐다.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다" 

민족혁명당 창당과 조선의용대의 창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조선의용대는 나라가 망한 뒤 국제 정규전에서 독립군이 직접 참전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자극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혁명가들 조차 '조선의용대를 학습하자'는 글을 게재했다.

이들은 "조선의용대는 중국항전을 지원하고 일본혁명가들과 관계를 형성했다"며 "이는 일본 혁명 투쟁운동 역사상 유례 없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일"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조선의열단 단원들.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조선의열단 단원들.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 오마이뉴스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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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창설일, 고딕체로 기록해야" 

김 관장은 평전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1938년 10월 10일과 관련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고딕체로 기록되어야 할 날"이라며 "근현대사 교과서나 대부분 독립운동사 자료에 이 날이
기록돼 있지 않은 것 자체가 반쪽짜리 독립운동사"라고 지적했다.

1942년 김원봉 선생은 조선의용대의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때는 조선의용대 주력이 중국 공산당인 연안 쪽으로 넘어간 이후였지만 이는 김구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 간 대통합을 이루었음을 의미했다. 그는 한국광복군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아 싸우다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그를 소외시켰고 귀국 또한 김구 주석 등 다른 임시정부요인 15명 보다 열흘 가까이 늦게 2진으로 들어왔다. 이는 1진의 탑승자 선정을 놓고 논란이 일자 김원봉 선생이 스스로 2진으로 양보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중들로 하여금 1진으로 도착한 '김구=임정'이라는 등식을 구축하게 했다. '민혁당과 김원봉'은 자연스럽게 가려져 임정 내 2인자임에도 당시 4인자로 소개됐다.

김원봉 선생은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계열이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미군정에 협조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했다.

'해방조국'에서 3일간 통곡한 이유

 <약산 김원봉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
ⓒ 오마이뉴스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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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정작 해방조국에서 3일간 통곡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과 대면했다. 1947년, 김원봉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지시로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피체돼 갖은 수모와 고문을 당했다.

그는 "내가 일본 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냐"며 통곡했다 한다.

김 관장은 친일파들이 활개 치는 '해방조국'을 이백의 시 <만분사(萬憤詞)>를 내세워 힐난했다.

가시나무를 심고 계수나무를 뽑는다(樹楱拔柱)
봉황새를 가두고 닭 따위를 귀히 여긴다(水鳳寵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월북해 조선인민공화당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꾀했다.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본격화되자 북한에 남아 초대 국가검열상을 지냈다.

하지만 이 때문에 6·25 한국전쟁에서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 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죽임을 당했고 부친 또한 외딴 곳에 유폐됐다가 굶어죽게 되는 참혹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선생은 1957년 북한 노동상에서 해임된 후 이듬해 9월을 끝으로 이름이 사라졌다. 김 관장은 그의 숙청설과 은퇴설· 자살설 중 숙청설에 무게를 실었다. 저자는 외세의 간섭 없는 중세중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납북독립운동가들과 뜻을 모으다 처형당한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결국 그는 사인이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해방 후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남과 북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던 김원봉 선생.

평전의 끝자락에서 김 관장은 독자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그가 저승에서라도 '조국을 외면하지 않도록' 조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김 관장은 답변대신 마지막 글귀를 이렇게 적었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먹물들의 사대주의 근성"
   또 다른 독립운동사 <약산 김원봉 평전>

 약산 김원봉 선생. 해방직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약산 김원봉 선생. 해방직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 오마이뉴스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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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평전>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의 6번째 인물평전이다.

김 관장은 <박열 평전>을 시작으로 <백범 김구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등을 펴냈다. 하나같이 한국근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김원봉 평전>은 김 관장이 기자 신분으로 김원봉 의열단장을 만나 가상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속에서 김 관장은 체 게바라에 못지않은 그의 삶이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을 '먹물들의 사대주의 근성'이라고 꾸짖는다. 

평전은 김원봉 선생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선 길가는 나그네의 목을 적시는 옹달샘처럼 글 곳곳에 시가 들어 있다. 선생을 '그림자 같은 혁명가'로 칭하면서 김소원의 시 <그림자>를 배치한 경우가 그것이다.

특히 선생이 3일간의 통곡의 사연을 전하면서 허균의 <통곡헌기>를 소개한 대목은 평전읽기의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은 또 다른 독립운동사다. 주인공뿐만 아닌 함께 의열단 활동을 했던 동지들의 삶을 부족하지 않게 수록해 놓았다. 누구나 책장을 덮을 때쯤 신흥무관학교, 임시정부와 의열단, 민족혁명당, 황포군관학교, 조선의용대는 물론 항일무장투쟁사, 해방전후사 등 해외 독립운동사를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된다.

이 책에는 그동안의 연구결과외에 일본 정보기관의 자료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들어 있다.

김 관장은 지금도 밤잠을 줄여가며 자료를 찾고 또 다른 글을 쓰고 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안중근 평전>을 준비 중이란다.

내년에 나올 <안중근 평전>을 기다리기에 앞서 적어도 <약산 김원봉 평전>을 미리 읽어 두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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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