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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의 태종. 그의 집권기에도 몇 번의 운하 논쟁이 있었다.
 <대왕세종>의 태종. 그의 집권기에도 몇 번의 운하 논쟁이 있었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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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 주도의 대규모 건설공사. 그것은 오래 전부터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정치·경제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농업생산성 증대를 위한 일종의 SOC(사회간접자본)를 구축하는 것인 동시에 조세 확보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했다. 

후자에 관해 약간 부언하면, 오늘날 “제대로 훈련을 시키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툭 하면 바쁜 사람들을 동원하느냐?”며 불평을 토로하는 예비군들이 있지만, 정치권력의 입장에서는 그 같은 강제적이고 정기적인 동원을 통해 국민들에게 ‘순종하는 법’ 또는 ‘동원되는 법’을 주입시킬 수 있다. 그렇게 훈련장에 나오게 하는 것만으로도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위정자들은, 요역 동원을 통한 대규모 건설공사에 위와 같은 정치적 함의들이 숨어 있다는 점에 늘 주목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정치권력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가 주도의 대규모 건설공사를 기획하곤 했다. 이런 경우에 관건은, 백성들의 반발을 얼마나 무력화시키면서 그들로부터 인력과 물자를 추출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드라마 <대왕세종>의 배경이 되고 있는 태종시대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다. 중국 칙사 황엄이 군마 1만 필과 처녀 조공을 요구한 때로부터 4년이 지난 태종 13년(1413) 7월의 일이었다. 최영과 정도전의 요동수복을 반대한 것으로 유명한 좌정승 하륜(1347~1416년)이 숭례문-용산강(용산 앞에 있는 한강의 일부 구간) 구간에 운하를 팔 것을 주장한 것이다.

하륜, "숭례문-용산강 구간에 운하를 파자" 주장

<태종실록> 기록을 보면, 그 당시의 운하 건설은 조세 수입의 효율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 경우에는 용산강에서부터 숭례문까지 선박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방에서 들어오는 조세를 한강을 거쳐 도성까지 신속히 운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륜은 숭례문 구간에 운하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하륜은 숭례문 구간에 운하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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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실록에 기록할 수 없는 ‘숨은 목적’을 지적하면,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대규모 공사를 통해 백성들에게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고자 한 점을 들 수 있다. 백성들의 반발이 예상되긴 하지만 그들을 대규모 공사에 동원해서라도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던, 개국 21년밖에 안 된 조선왕조의 고민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수양제를 포함해서 개국 초기의 정치권력들이 툭 하면 대규모 건설공사에 매력을 느낀 이유 중 한 가지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왕조를 쉽게 못 받아들이는 뻣뻣한 백성들을 대규모 공사에 동원하거나 혹은 세금을 내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하도록 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에서 건국 20주년 이전에 등장한 정권이 전국적인 건설공사에 주력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대왕세종>에서 묘사되고 있는 바와 같이, 태종시대만 해도 조선왕조의 통치권은 여전히 불안정한 편이었다. 사회여론을 주도하는 유림들이 신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16세기에 가서의 일이었다. 그 정도로, 초기의 조선왕조는 그야말로 ‘인기 없는 정권’이었다.

이처럼 백성들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는 시점에서 하륜의 운하 건설론이 나온 것이다. 하륜은 숭례문-용산강 구간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운하를 팔 것을 주장한 인물이다. 기타 지역의 운하 문제는 이후에 다른 글에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그런데 하륜의 운하 건설론에 대해 태종 이방원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은 하륜의 제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우리나라의 땅은 모두 모래와 돌이어서 물이 머물러 있지 못하므로 중국을 본 따 운하를 팔 수는 없다.”(我國之土, 皆沙石, 水不停留, 不可放中國開渠也.)

태종 이방원 "조선의 지리적 조건이 운하에 부적합하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지리적 조건이 운하에 부적합하다면서 하륜의 주장에 대해 소극적 입장을 피력했다. 운하건설을 통해 조세수입이나 정치권력 안정 등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리적 조건 자체가 운하를 파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운하 문제가 논의된 장소인 경복궁 경회루.
 운하 문제가 논의된 장소인 경복궁 경회루.
ⓒ 문화재청 문화재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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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으로 결론이 난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경복궁 경회루 아래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운하문제가 재차 거론되었다. 

“숭례문에서 용산강까지 운하를 파서 선박을 통과하게 한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모래땅이라서 물이 항상 차지 못할까 의심스럽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自崇禮門至龍山江開渠, 以通舟楫, 則誠幸矣. 但疑沙地, 水不常滿耳. 卿等以爲如何.)

전날에 이어 이번에도 태종은 지리적 이유를 들어 소극적 입장을 펼쳤다. 국왕이 이처럼 소극적임에도 불구하고,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태종의 하문에 대해 대부분의 대신들이 “가(可)합니다”라고 답변했다. 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좌정승 하륜이 대신들을 상대로 사전작업을 단단히 해놓은 모양이다.

이때 유일하게 태종 편을 든 인물은 의정부 찬성사인 유양이었다.
“용산강은 도성에서 가까운 곳인데 어찌 백성들을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지리적 조건을 들어 운하를 반대하는 태종의 주장이 대신들에게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백성들의 반발을 시사하면서 반대론을 편 것이다. 

그러자 지의정부사 박자청이 유양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선다.
“1만 명을 동원하면 1개월 안에 일을 끝낼 수 있으니,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1개월 안에 일을 끝낼 수 있으므로 백성들을 크게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때 태종은 결국 유양의 논리를 채택했다. 운하를 건설하면 지방의 조세를 좀 더 효과적으로 수송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반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를 수용한 것이다.

<태종실록>에서는 “상께서 인력 동원의 어려움을 깊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안이 멈추었으며 실시되지 못했다”(深知用力之難, 故事寢不擧)고 전하고 있다. 아직 민심을 확보하지 못한 국초의 조선으로서는 그 같은 대규모 공사를 실시하는 게 무리였던 것이다.

위의 사례는, 국가 주도의 대규모 건설공사의 성패가 피치자인 백성들의 호응 여부에 달려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엄청난 인력과 자금이 소요되는 대규모 공역(工役)은 몇몇 위정자들이 하고 싶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철권 통치자 이방원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태그:#대왕세종, #대왕 세종, #운하,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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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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