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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2월 22일 8주년을 맞이합니다. 8살배기가 된 <오마이뉴스>는 올해 여러가지 연중기획 가운데 하나인 '백인보-희망을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독자 여러분에게 찾아갑니다. '백인보-희만사'는 작지만 소중한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 의미있는 도전과 실험을 하는 사람들, 우리 사회 희망의 싹을 틔우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땀방울이 우리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습니다. '백인보-희만사'의 첫번째 주인공은 '변산공동체'와 교수에서 농부로 변신한 윤구병 선생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엄청난 추억이 될 거야 그지?"

전북 부안 변산 공동체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료 구자민 인턴기자가 물었다. '추억이 될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될까.' 그의 물음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난 지금, 벌써 난 그 때 사진들을 보면서 피식피식 웃고 있다.

나는 완벽한 도시소녀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명절에도 시골에 내려가 본 기억이 없다. 지금도 친가와 외가 모두 일산에 모여 살고 있다. 변산반도에 내려가면서도, 도착했을 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농촌에서 하루 종일 육체노동을 할 줄은.

전북 부안 변산공동체 마을에서의 2박 3일. 일명 '서울 것'인 나는 6가지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장면① - 돌] "아이고, 내 어깨"

변산공동체에서 처음 한 일은 '돌 나르기'였고, 두 번째 한 일은 '황토흙벽돌 만들기'였다. 2박 3일 동안 돌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첫째 날은 대안학교 기숙사를 지을 때 필요한 주춧돌을 마련하기 위해, 냇가와 과수원에 있는 돌들을 주워 트럭으로 옮겼다.

돌을 나르고 있는 내모습
 돌을 나르고 있는 내모습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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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그렇게 무거울 줄이야. 다리는 후들거렸고, 팔은 덜덜 떨렸다. 남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드는 돌을 따라 옮기려다 손과 발을 다치기도 했다.

토요일(16일) 하루 종일 총 1.5t 트럭 6대 분량의 돌을 집터로 옮겼다. 우리가 져 나른 돌 때문에 냇가의 폭이 더 넓어져, 마치 강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함께 일 했던 김희정(40) 이장님은 목표치인 여덟 대 분량에 못 미쳤다며 아쉬워했다.

"이장님, 우리가 돌을 너무 많이 날라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어요."

우리의 말에 이장님이 껄껄 웃으셨다.

벽돌 찍을 때 필요한 흙을 넣고 있는 나
 벽돌 찍을 때 필요한 흙을 넣고 있는 나
ⓒ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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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내게 주어진 역할은 황토벽돌 찍기였다. 여자인 나를 배려해 어제보다 쉬운 일을 배정해준 것이다. 벽돌을 찍기 위해선 세 사람이 필요하다. 황토 흙을 퍼 나르는 사람, 벽돌을 찍어내는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 찍은 벽돌을 나르는 사람.

"각 위치에 있을 사람을 정할 때는 규칙이 있어요.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은 여자가 있을 경우엔 여자가, 없으면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 하는 거에요."

함께 일하던 김영찬(25)씨가 말했다. '만세!'가 절로 나왔다. 여자는 나뿐이었고, 내가 할 일은 앉아서 기계만 조작하는 것이었다. 어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벽돌 생산 현장에는 비닐하우스가 설치돼 있어 그리 춥지 않았다.


황토벽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기계에 흙을 퍼 담는다. 그 후 기계를 조작해서 흙에 압력을 가한 다음, 벽돌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돌을 가득 실은 트럭은 내가 일하는 비닐하우스 근처에 올 때마다 '빵빵!' 경적을 울려댔다. 하는 일이 너무나 쉬워 보인다는 선배 박상규 기자와 구자민 인턴기자의 일종의 시위였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배, 동료 모두 파이팅! 미안해요!' 그러나 일을 바꿔서 하자는 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장면② - 잠] "인터뷰 하면서도 꾸벅꾸벅"

변산 공동체의 일정은 7시 30분, 아침 식사부터 시작된다.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오전 일을 하고, 그 후엔 점심을 먹는다. 2시 30분부터는 오후 작업이 시작되어 오후 6시에 일과가 끝난다. 8시간 동안의 힘든 노동과 이른 기상시간이 겹쳐진 덕분에 난 항상 졸렸다. 벽돌을 찍으면서도 연신 하품을 해댔고, 방바닥에 누우면 1분도 안 돼 잠이 들었다.

윤구병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졸고있는 내모습이 포착되었다
 윤구병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졸고있는 내모습이 포착되었다
ⓒ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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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윤구병 선생과 인터뷰 할 때도 졸았다. 나는 원래 낯선 곳에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작은 소리에도 금방 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날은 다른 사람이 코고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셋째 날인 일요일(17일) 점심시간 직후, 잠과의 싸움은 최절정에 달했다. 점심을 먹고 우린 30분 동안 방에서 잠을 청했다. 달콤한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다시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순간은 오고야 말았다.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너무 싫었다. 도살장 끌려가는 소 마냥, 박상규 기자의 재촉을 들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어딘가 아팠으면 하고 절실히 바랐지만, 내 몸은 멀쩡했다. 건강한 것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장면③ - 밥] "몸보신 하고 온 기분"

의외로 변산공동체의 밥은 내 입에 잘 맞았다. 싱겁게 먹는 것과 잡곡을 좋아했는데, 이 곳 밥이 그랬다. 한 끼에 두 공기는 기본이었다. 오히려 밥을 너무 많이 먹는 것이 문제였다.

변산공동체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 먹을거리를 준다. 아침 7시30분, 오전 새참 10시, 점심 1시, 오후 새참 4시, 그리고 저녁을 6시30분에 먹는다. 일을 하다 먹는 밥과 새참은 꿀맛이었다.

밥은 항상 잡곡밥이었고, 반찬은 고사리무침·양배추쌈·배춧국과 같은 그 곳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 농산물이었다. 새참으로는 고구마와 무설탕 식혜, 김치전과 어묵국을 먹었다. 유기농이기 때문인지, 배고픔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곳의 모든 음식들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셋째 날 오후 새참으로 먹은 김치전과 오뎅국 꿀맛이었다
 셋째 날 오후 새참으로 먹은 김치전과 오뎅국 꿀맛이었다
ⓒ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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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하는 아주머니들이 "일은 많이 했는데, 밥은 그보다 더 많이 먹네"라고 농담을 하실 정도로 우린 엄청나게 먹었다. 일요일 점심 때는 국수가 나왔다. 쌀이 떨어져서 국수를 했다는 말에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어쩌랴, 배는 계속 밥을 달라고 아우성인데. 집에 돌아와서 보니, 평소에 입던 바지가 안 맞을 정도로 살이 쪄있었다. '몸살 걸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몸보신을 하고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확되지 않은 배추가 그대로 있는 밭
 수확되지 않은 배추가 그대로 있는 밭
ⓒ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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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마을을 걸어가다가 밭에서 그대로 얼어버린 배추들을 보았다. 왜 수확하지 않았냐는 나의 물음에 김희정 이장님이 말씀하셨다. "팔리지가 않아서 거두지도 않은 것들이에요. 도시 사람들은 조금만 비싸도 안 사니까…." 어려운 농촌 현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면④ - 방] "추운 게 제일 싫은데..."

우리는 손님방으로 마련된 곳에서 이틀을 묵었는데, 방이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다. 새벽에는 무척 추웠다. 추위를 잘 타는 나는 두꺼운 잠바를 입고 양말까지 신고 잤다. 박상규 기자는 내가 대단하다고 했지만, 밤새 추위에 떠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따뜻한 물도 잘 안 나왔다. 매일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물로 씻는 것에 익숙한 내게, 추운 방과 차가운 물은 무척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오후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영찬씨와 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곳에서 메주 말리는 곳은 '메주 방', 감을 말리는 곳은 '감 방'으로 불린다고 한다.

영찬씨는 "제가 있는 곳은 감방인데, 이게 억양이 너무 이상하다, 감옥도 아니고…"라며 웃었다. 나도 그 말에 폭소를 터트렸다.

"그래서 같이 사는 동생과 '꽃방'이라고 바꿨어요. 꽃미남들이 사는 방이라구요."

하지만, 공동체 식구들의 반대가 거셌다고 한다. "'촛불시위를 한다' '1인시위를 한다' '청와대에 진정서를 낸다' 하면서 반대를 하더라구요." 그럼에도 '꽃방'에 대한 그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지금은 꽃방이란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꽃방'도 웃기게 느껴졌다. 중국집에서 파는 '꽃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메주방 안의 천연 염색된 커튼
 메주방 안의 천연 염색된 커튼
ⓒ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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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⑤ - 화장실] "끝내 가고야 말았다"

변산 공동체에서 나를 괴롭혔던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화장실이었다. 농촌에서 수세식 화장실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곳은 재래식도 아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친환경 화장실' 정도가 될 것 같다.

이 곳에선 배설물을 바로바로 퇴비로 이용한다. 때문에, 화장실 구조도 특이하다. 화장실 안엔 벽돌 사이의 쓰레받기와 겨가 담긴 통 하나, 그것보다 조금 더 큰 통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쓰레받기에 일을 본 후 그 위에 겨를 뿌리고, 큰 통에 그것을 넣어야 한다.

아무리 친환경이라지만 내 손으로 하기에는 너무 꺼려지는 일이었다. 화장실 근처에는 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 결국 난 그곳을 이용하고야 말았다.

전북 부안군 변산공동체의 친환경적인 화장실. 쌀겨가 깔려 있는 똥바가지에 똥을 눈 뒤 통에 모아두는 방식이다.
 전북 부안군 변산공동체의 친환경적인 화장실. 쌀겨가 깔려 있는 똥바가지에 똥을 눈 뒤 통에 모아두는 방식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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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⑥ - 일] "한 손엔 고구마, 한 손엔 사진기"

나에게 이 곳에서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였다. 공동체 생활 체험과 취재. 사실 체험만으로도 벅찼다. 머리만 대면 잠자기에 바빴으니, 기사를 미리 써놓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도 빼놓지 않고 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사진 찍는 일이었다. 사진이라도 찍어놓지 않으면, 기사를 쓸 때 무척 힘들어질 것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일을 할 때에도 항상 주머니엔 사진기가 들어있었다.

새참시간에 한 손에는 사진기, 한 손에는 고구마를 들고 있는 나
 새참시간에 한 손에는 사진기, 한 손에는 고구마를 들고 있는 나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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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점심 새참을 먹을 때였는데 한 손엔 고구마, 한 손엔 사진기를 들고 있다. 배가 고파서 고구마를 열심히 먹으면서도 사진기를 손에서 놓질 않은 것이다. 구자민 인턴기자 역시 먹는 와중에도 셔터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일도 힘들었지만, 기사를 써야한다는 초조함도 우리를 많이 괴롭혔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탈출했다!"고 외쳤다

변산공동체 식구들에게 바다가 지척이고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의 삶은 '화양연화(花樣年華)'일 수 있다. 하지만 문 밖으로 나서면 24시간 편의점이 널려 있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게, 많은 걸 자급자족해야 하는 그 곳에서의 2박 3일은 결코 '화양연화'가 되지 못했다. 변산과 서울의 거리 차이만큼,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도 아득하다. 

하지만 그 차이와 아득함도 어느 순간엔 공감과 이해, 그리고 화합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고작 2박 3일을 함께 일한 우리에게 윤연상(18) 군은 "하루 더 있다가면 안 되냐"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벌써 지난 2박 3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어쩌면 우리 사이엔 벌써 공감의 다리는 놓여졌는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김혜민 기자는 <오마이뉴스> 7기 인턴기자 입니다.



태그:#변산공동체, #백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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