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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멕시코 접경지대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모스는 우연히 총격이 벌어진 현장을 발견하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그 중 생존자가 있었고 그가 물을 찾았지만 모스는 그의 청을 거절한다. 돌아서던 모스는 그곳에서 뜻밖의 물건을 발견한다. 거액의 돈이 든 가방이다. 모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거금이었고 그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모스는 기분이 묘했다. 거액이 생겨서 그런 것일까? 그는 생존자를 떠올리고 총격전이 벌어진 곳으로 간다. 사방은 어두웠다. 모스는 생존자를 찾지만 이미 그는 죽어있다. 갈증을 참지 못하고 죽은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해치운 것일까?

 

그때 불길한 소리가 들린다. 트럭 소리다. 그것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모스는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 어렵게 그곳에서 도망쳐온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렇게 시작한다.

 

시거, 그는 냉혹한 킬러다. 그는 유일무이한 살인자로 명성을 쌓고 있다. 그가 죽이려고 한다면, 그 대상은 죽는다. 이 남자는 의외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동전을 던져서 나온 면을 맞추면 살려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시거는 죽이기 전에 말한다.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라며 총을 쏜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 남자가 모스를 쫓는다. 쫓기는 쫓는데, 지극히 여유로운 태도다. 도망치려는 모스의 노력이 부질없게 보일 정도다. 그럼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묵시록을 보는 듯이 숨이 막히고 오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한 남자가 더 등장한다. 시거를 쫓으면서 모스를 찾는 늙은 보안관 벨이다.

 

벨은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착할 때는 착하고 나쁠 때는 나쁜 그런 남자다. 그러나 선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거 때문일까? 벨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지극히 선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러니 그가 모스를 찾기를 응원할 수밖에 없고 시거를 해치워주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평범한 서부극이었다면, 결말은 그렇게 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모든 기대감을 저버리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어째서인가?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인가? 마음과 달리 허약한 몸으로 움직이는 벨처럼, 그런 희망적이고 선한 순간들은 과거의 영광으로 지나갔기에 그런 것인가? 그런 로망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 가슴을 사무치게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

 

서부의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말과 늠름하게 앉아있는 카우보이를 떠올릴 법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냉정하게 보여지고 있다. 무기력할 정도로 냉정하다. 문체는 또 어떤가? 냉정하다.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다. 글에 감정이라는 것이 실릴 법도 하건만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오싹하다. 돈을 훔친 남자와 그를 쫓는 살인마, 그것을 쫓는 보안관이 펼치는 줄거리는 진부할 것처럼 보이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그런 느낌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사막을 본 듯, 삭막한 매력만이 존재할 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사피엔스21(2008)


태그:#코맥 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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