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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대산 (847m)에서 바라본 삼정산(1,210m)과 빨치산 영원사 루트. |
| ⓒ 안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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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얼룩진 지리산 일찍이 서산대사가 평가한 대로 지리산은 빼어나진 않지만 장엄한 산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골짜기마다 민중의 한과 슬픔이 아로새겨진 비극의 산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역사는 1948년 10월부터 1955년 5월에 이르기까지 7년여 동안 군경 토벌대와 빨치산들이 벌였던 치열한 싸움일 것이다. 싸움의 와중에서 수 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지난 1992년에 작고한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을 읽었었다. 스무 살 초반의 내겐 가슴 뛰는 추체험이었다. 소설 <지리산>은 월간 <세대>에 1972년 9월부터 1977년까지 70회에 걸쳐 연재되다가 일시 중단한 뒤 1985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지이산(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라든가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바래지면 신화가 된다"라는 구절은 아직도 잊히지 않은 채 생생할 지경이다.
'지리산'에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금기사항이었던 시절에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은 역사의 행간에 묻힌 비극의 주인공들을 통해 민족의 좌절과 이데올로기의 부질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후 1980년대, 이태의 <남부군>,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오봉옥의 장시 <지리산 갈대꽃> 등이 연달아 세상에 선보이면서 '지리산'은 비로소 관념이 아닌 생생한 역사의 현실이 되었다.
어제(17일), 지리산 빨치산 루트 중 영원사 루트를 답사했다. 영원사 루트는 경남 산청·하동·함양 등 3개 군이 관광상품화를 위해 1998년부터 개발한 루트다. 그런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다. 영원사 루트는 지리산 삼정산을 중심으로 한 삼정 능선상에 있다.
삼정산은 지리산의 줄기이면서 자신의 이름을 가진 이색적인 산이다. 더구나 이 삼정산에는 상무주암 같은 유명한 수행처가 있으니, 암자 기행을 즐기는 내게 이 산을 오르는 건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국군이 양민을 학살했던 군자마을
함양군 마천에 도착하니, 오전 9시였다. 잠시 망설임이 인다. 곧장 삼정산(1210m)을 오를 것이냐, 아니면 삼정산 맞바라기에 있는 금대산(847m)을 올랐다가 내려와서 오를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던 것이다.
금대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니, 시간이 벌써 11시 반이다. 이번엔 산의 뒤쪽인 양정마을 쪽에서 오를 것인가, 아니면 군자마을·도마마을 쪽에서 오를 것인가를 놓고 망설였다. 보통은 양정마을에서 오르는 게 일반적인 듯이 보였다. 도마마을 쪽에서 올랐다는 산행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코스인데 왜 꼭 양정마을에서만 오르는 것일까. 혹 도마마을 쪽에서 오르는 것이 더 난코스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겐 도마마을 쪽에서 올라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새벽에 급히 나오느라 깜박 아이젠을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눈길은 내려가는 것보다 오르는 것이 덜 미끄럽다. 난코스는 올라가고 평이한 코스에서 내려가는 게 훨씬 안전하리라는 판단이었다.
산행길 초입에서 군자마을을 만난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은 1949년 국군 토벌대가 주민들을 집단 학살해 마을 옆 동산에다 파묻은 곳이다. 인근 마천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3연대가 빨치산에게 공격당해 수십 명이 죽은 데 대한 보복학살이었다.
그때의 일을 벌써 다 잊은 것일까. 마을 풍경은 평화스럽기만 하다. "산불 예방하여 산림자원 우리 마을에서 지키자"라고 쓴 현수막이 외로이 고샅을 지킬 뿐이다.
영원사 루트 7km를 향하여 도마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길가 안내판은 영원사루트가 여기서부터 7km라고 일러준다. 산길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겨울에 소백산 같이 1500m가 넘는 산을 올라보면 북쪽 능선을 타다가 남쪽으로 내려섰을 때 얼마나 공기가 다른지 실감할 수 있다.
아마도 양정마을 쪽엔 눈이 많이 녹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이쪽에서 먼저 오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걷는 산길은 상념과 동무해 걷는 길이다.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보일 듯 말듯 천왕봉이 있다.
길이 지겨워지기 시작할 무렵, 일흔쯤 돼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내려오신다. 어제 와서 삼불사에서 하룻밤 자고 내려오는 길이란다. "조심해 내려가시라" 인사를 건넸더니, "이제부터 더 미끄러울 터이니 조심하라"고 되레 걱정을 남기신다. 아닌 게 아니라 길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급경사인데다 미끄럽기까지 하다.
마침내, 눈앞에 삼불사가 나타난다. 도마마을을 벗어난 지 1시간만이다. 암자 마당에 서서 멀리 지리산 줄기를 조망한다. 먼저 천왕봉과 눈인사를 교환하고 나서 상봉, 중봉과도 인사를 나눈다. 이렇게 천왕봉을 바라보는 게 1년만인가? 2년만인가.
눈쌓인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눈 쌓인 지리산을 바라보노라니, 자동연상작용으로 80년대 광주의 민중가요 가수였던 박종화가 부른 '지리산'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눈 쌓인 저 산만 보면
지금도 흐를 그 붉은 피 내 가슴 살아 솟는다
불덩이로 일어난 전사의 조국사랑이
골 깊은 허리에도 울부짖는 가슴에도
덧없이 흐르는 산하
저 산맥도 벌판도 굽이굽이 흘러
가슴깊이 스미는 사랑
나는 저 산만 보면 소리 들린다 헐벗은 저 산만 보면
지금도 울리는 빨치산 소리
내 가슴에 살아 들린다 - 박종화 노래 '지리산' 1절 흰눈에 쌓인 봉우리를 바라보면서 가만히 노래를 읊조리니, 더욱 비장하고 비감한 느낌이다. 그 옛날 빨치산들은 어떻게 지리산의 혹독한 겨울을 견뎌냈을까. 먹을 것은 떨어지고… 동상으로 발가락·손가락은 시시각각 썩어들어가고….
그런 생지옥을 꿋꿋이 이겨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좋은 세상이 오리라"라는 역사에 대한 신념이었을까. 뜬금없이 신념이란 것도 어쩌면 사랑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수단이라는 말이 더 맞을는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지금 신념의 아노미 현상을 겪는 것은 사랑이 부재한 시대의 증거가 아닐까.
6·25때 완전히 소실되어 버린 절 영원사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다시 길을 재촉한다. 문수암을 지나고 상무주암을 지난다. 삼정산 정상 부근을 통과하고 나자 등산 코스는 급속히 완만해진다. 한동안 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산죽 길이 이어진다.
겨울에 더욱 잎이 푸른 산죽. 그냥 푸르름을 넘어 서슬 푸르기까지 하다. 인간이 품은 신념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저렇게 시퍼런 산죽잎 색깔일 것이다. 사스락사스락 산죽 잎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청아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령에 도착한다. 오른쪽 길로 가면 삼각고지와 형제봉을 거쳐 벽소령으로 가는 길이다. 영원사로 가려면 고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고개 아래는 완전히 눈이 녹아 있어 걷기에 편하다. 도마마을에서 상무주암까지 오르던 때와 비교하면 가는 길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다.
1km 가량 걸었을까. 영원사 뒤쪽 사립문이 기다리고 있다. 해발 920m 지점에 가부좌를 튼 영원사는 한창 묵조선 중인가 보다. 벽소령 쪽을 향한 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선정인 자세로 앉아 있다. 영원사 전각들은 고졸한 맛이 없다. 6·25때 완전히 소실되어버린 절을 다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갓 모형에 지나지 않는 비트일망정
시멘트 포장된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영원사 옛길로 들어선다. 영원사 루트가 시작되는 곳이다.
오른쪽 계곡을 따라 산죽이 우거진 길이 이어진다. 안내판은 이곳에 산죽 비트가 있었다고 전한다. 산죽으로 어떻게 비트를 만들었을까. 그때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산죽이 울창했던가 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자 이번엔 굴비트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안내문을 보고 나서 바로 위 언덕을 올려다보자 따발총을 둔 빨치산 모형이 아래를 굽어보며 서 있다.
한낱 모형에 지나지 않을망정 안쓰럽기 짝이 없다. 실제 상황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변변한 의약품도 없었을 터이니 시시각각 심장을 조여오는 듯한 고통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고통이 없이 죽는 것을 최상의 복으로 친다. 눈에 난 다래끼 하나에도 못견뎌 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 아닌가. 사실 인간의 행복에 복무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란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공허하고 부질없는 것이다.
언젠가 역사가 우리에게 복수할지 모른다 양정마을 풍경이 눈앞에 천천히 펼쳐진다. 이곳을 통칭 삼정리라고도 부른다. 양정마을과 음정, 하정 이렇게 세 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이 아담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양정마을 앞 계곡의 소나무 숲이 무척 운치가 있다. 어떻게 이런 절경 속에서 인간에 대한 살의를 품을 수 있었을까.
삼정리 가운데 제일 첫 번째 마을인 하정리에 도착한다. 하정리 역시 그림 같은 마을이기는 마찬가지다. 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 한가운데 서 있는 수령 30~40년가량 된 소나무 한 그루가 마을 풍경에 마지막 화룡점정의 붓질을 가한다. 이런 아름다운 마을에 인민재판소가 있었다고 하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마을의 초입, 계곡가 소나무 숲에는 아담한 정자인 선유정이 홀로 음풍농월을 즐기고 있다. 선유정으로 내려가는 길엔 '석문암(石門岩)'이란 글자가 음각된 바위가 있다. 그 옆에 설치된 안내판은 이곳에 선유정을 세우게 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마을에 인걸이라는 사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소(沼)에서 목욕하던 선녀의 옷을 숨겨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나서 제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살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옥황상제는 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함께 쌀이 나오는 바위까지 내려보내 주었다.두 사람은 1남 2녀를 낳아 기르며 행복하게 살았다. 이쯤되면 부인이 딴짓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부인에게 자신이 옷을 감춘 사실을 고백한 인걸은 거기서 한 술 더 떠 옷을 입혀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매정한 선녀는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말았다. 인걸과 세 자녀는 문바위에 올라가 선녀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자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선유정은 지난 1976년 마을 사람들이 승천한 선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지은 것이라고 한다. 비극이 할퀴고 간 자리엔 그 상처를 치유할 다른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정리 마을 사람들이 의식을 했는지 못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유하는데 예로부터 마을에 전해 내려오던 이 전설이 유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역사란 기억을 먹고 사는 생물"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지금 급격하게 기억상실증에 빠져들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비록 더디게나마 조금씩 진보해 온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혹 누가 아는가. 역사가 기억상실증에 빠진 우리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는지!
지리산 자락이 슬슬 제 그림자를 풀더니 순식간에 마을을 감싸기 시작한다. 문득 생각난 듯 등을 돌려서 벽소령을 올려다 본다. 벽소령의 달밤은 지금도 하늘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움을 가만히 등 뒤에 남겨둔 채 천천히 지리산 자락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