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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대왕세종>.
 KBS 1-TV <대왕세종>.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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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방영된 <대왕세종> 제11·12회에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충녕대군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묘사됐다. 현실을 중시하는 충녕은 다혈질적인 세자 양녕을 경계하며 대(對)중국 관계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실제의 세종 역시 대중국 관계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나랏말씀이 중국어와 다르다 하여 중국어 교육을 등한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우리글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중국어 교육도 함께 중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왕 세종은 결코 무리한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어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지만,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현실과 여론을 고려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세종 15년 하반기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대왕 세종의 그 같은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기록에서 그러한 흔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세종은 '엘리트 관료들이 중국어를 잘 구사해야만 대중국 관계에서 국익을 챙길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방안은, 엘리트 양반 자제들을 중국에 보내 중국어 훈련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세종 15년(1433) 9월 3일, 그는 천추사(중국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파견되는 공조참판(차관급) 박안신에게 1통의 문서를 부탁했다. 명나라 제5대 황제 선덕제(재위 1425~1435년)에게 전달할 문서였다. 그 안에는 양반 자제들이 북경이나 요동(만주)에 가서 중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명나라 정부가 협조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세종, 명나라에 양반자제들의 유학을 요청

그럼, 이에 대해 명나라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세종 15년 12월 13일에 박안신이 가져온 답장에 따르면, 선덕제는 "그 마음은 가상하다"면서도 조선 청년들의 중국 유학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산천이 멀리 막히고 기후가 같지 않아서 자제들이 오랫동안 편안히 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그리워하느라 이곳 생활을 견디기 힘들 것"라는 게 거부 사유의 요지였다. 그러면서 선덕제는 "그냥 조선에서 공부하는 것만 못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마무리했다.

이러한 중국측의 태도는 조선정부가 애초에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당초에 세종은 그 요구가 무난히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한민족 왕조들이 중국에 유학생들을 파견해온 전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역사는 중국 한나라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그로부터 얼마 전에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고려 청년들의 유학을 수용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비록 명나라 수도가 저 멀리 남경(상해 부근)에 있어서 결국에는 고려 유학생들을 파견하지 못했지만, 명나라 정부에서는 한민족 유학생들에 대해 분명히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런 전례가 있기에 조선정부에서는 명나라 측에서 유학생들을 당연히 받아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명나라 측에서 거부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외의 반응에 직면한 세종은 일단 유학생 파견은 포기하기로 하고 그 대책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박안신이 돌아온 세종 15년 12월 13일의 일이다.

이날의 어전회의에서 세종은 "우리 학생들이 의주에 머물면서 이따금씩 요동에 왕래하도록 하면 어떻겠느냐?"는 대안을 내놓았다. 조-명 접경지대인 의주에 중국어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학생들이 중국을 자주 왕래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방안이었다.

이에 대한 대신들의 일치된 의견은 "아니 되옵니다!"였다. 요동에서는 정통 중국어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요동에서 배우느니 차라리 그냥 조선에서 배우는 게 낫다는 것이 대신들의 의견이었다.

이 날 회의에서 나온 잠정적 결론은 '종래에 하던 대로 그냥 사역원(외국어 교육기관)에서 중국어 교육을 시행하고 사신이 중국에 갈 때에 학생들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정기적인 단기 해외연수를 통해 '콩글리시'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방안이었다. 세종도 대신들의 의견에 일단 동의했다.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단기 해외연수를 통해서 중국어를 배우게 하자"

서울시 덕수궁 소재 세종대왕 동상.
 서울시 덕수궁 소재 세종대왕 동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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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방식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세종은 4일 후인 12월 17일의 어전회의에서 또다시 그 문제를 거론했다.

"며칠 전에 대신들이 그렇게 하자고 해서 나도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자제들이 요동을 왕래하면서 중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사신이 중국에 갈 때에 학생들을 데리고 가도록 하는 것보다는 학생들이 수시로 요동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신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호조판서 안순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요동에 보내는 것은 정통의 방법이 아닙니다. 또 설령 요동에 간다고 해도, 우리나라 사람은 요동 성내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말을 익힐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냥 며칠 전에 논의한 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신들이 이처럼 완강하게 나오자 세종은 결국 자신의 뜻을 굽히고 말았다. "종래에 하던 대로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도록 하되, 사신이 중국에 갈 때에 학생들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세종의 최종적 결정이었다.

그런데 논의가 다 끝난 뒤에 이조판서 허조가 뒤늦게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중국인 교사를 조선에 초빙하여 중국어를 가르치도록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원어민 중국어 교육 또는 중국어 몰입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인 교사의 지도하에 교실에서 중국어로만 말을 하면 학생들의 중국어 실력이 배가되지 않겠느냐는 게 허조의 생각이었다.

이미 논의가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새로운 제안을 내놓은 것은, 임금이 그만큼 중국어 교육에 열의를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국어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자는 제안에, 세종은?

하지만, 세종은 이에 대해 신속하게 거부의사를 피력했다. "그 생각은 좋지만, 중국에 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다"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중국과의 외교관계상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허조가 내놓은 중국어 몰입교육은 단칼에 거부되고 말았다. 

서기 1433년에 있었던 조선정부의 중국어교육정책 논의를 통해 우리는 대왕 세종의 신중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외국어교육에 누구보다도 열의를 갖고 있었지만, 결코 무리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언어교육은 다른 분야와 달리 문화적으로 민감한 사안임을 잘 아는 그는 현실과 여론을 면밀히 고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명나라 정부의 반응도 고려하고 조선 관료들의 의견도 고려했다. 최종적으로 그는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을 선택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국어 몰입교육 자체가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세종이 일을 순리적으로 처리했다는 점이다. 사안이 민감할 때에는 자신의 의견을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았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대왕 세종의 지도자다운 면모였다. 

대왕 세종, 그는 중국어 교육에도 열정을 갖고 있었지만 그 열정은 '절제된 열정'이었다.


태그:#대왕세종, #외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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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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