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 <파고>(1996). 영화에서 경찰서장 마지(프란시스 맥도먼드 분)는 동료 살인청부업자 칼 쇼월터를 건초 분쇄기에 갈아 죽인 무표정한 살인마 게어(피터 스토메어 분)를 경찰차 안 후시경으로 힐끔거리며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파리 죽이듯 인명을 살상한 데 대해 어이없어 한다.

 

이번 2007년 퓰리처상 수상 작가 코맥 맥카시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에단 코엔·조엘 코엔 감독). 이 영화에서는 <파고>가 희미하게 보여준 개선 가능한 미래에 대한 희망은 형편없이 위축된다. 반면 관객을 공포로 몰아 넣으며 죄여 들어오는 난해한 살인마의 위력이 탁월한 카메라워크와 음향편집에 힘입어 관객을 긴장으로 몰아 넣는다.

 

<파고>에서 납치와 살해를 감행하는 칼과 게어의 범행 목적은 명백했다. 마지 서장이 빈정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밝힌 것처럼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자본주의적 막가파들은 납치한 여자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별 상관도 없는 주차장 검표원까지 무참하게 죽인 것이다.

 

칼이 수전노 아버지가 쏜 총알에 얼굴을 빗맞은 뒤 피투성이 얼굴로 "이 모든 게 이 빌어먹을 돈 때문이야"며 절규하듯이 외치는 명대사는 영화 속 순백의 눈밭 위에 난 검은 발자국처럼 오랜 여운을 남긴다.

 

안톤 쉬거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 심리적 콤플렉스도, 트라우마도, 환상적 욕구 충족도 없이 그저 자신의 목적을 무자비하게 결행해나가는 강인한 캐릭터. 이 살인마는 타인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고통을 참아내는 강인한 의지력에서 신화적인 냄새가 난다.

▲ 안톤 쉬거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 심리적 콤플렉스도, 트라우마도, 환상적 욕구 충족도 없이 그저 자신의 목적을 무자비하게 결행해나가는 강인한 캐릭터. 이 살인마는 타인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고통을 참아내는 강인한 의지력에서 신화적인 냄새가 난다. ⓒ CJ 엔터테인먼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뚜껑 머리와 촌스런 헤어 스타일에 몰취미스런 옷차림의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분)는 허공에 던진 동전의 앞뒷면에 따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살인을 결정하는 인물이다.

 

안톤 쉬거는 일부 사이코패스 킬러들처럼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어떤 환상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병적 퇴폐성을 보이지 않는다. 더더구나 <파고>의 칼과 게어처럼 돈 때문에 미치광이처럼 총질을 해대는 히스테리컬한 행태도 보이지 않는다.

 

사냥감을 압박해 들어가는 치밀한 추격전에서도 보여주는 묘한 안정감, 그리고 육체적 고통을 참아내는 강인함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인간이다. 특히 마약 딜러들의 총격전에서 우연히 거금이 든 가방을 훔쳐 달아난 르윌린 모스(조쉬 브롤린 분)와 모텔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총격전을 벌이다 총상 당한 부위를 모텔 방에서 혼자 치료하는 장면에선 경외감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안톤 쉬거는 마틴 스콜세스의 <케이프 피어>(1991)에 등장하는 맥스 케이디(로버트 드 니로 분)와 닮아 보인다. 맥스는 법정에서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을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변호사를 향한 복수 행각을 자멸을 초래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쉬거는 맥스의 그 소름끼치는 집념을 공유하고 있다.
 
보통 우리가 노인을 존경하는 이유는 울창한 고목의 나이테처럼 촘촘한 경륜에서 우러나는 밝은 지혜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는 원로원이 있었고, 우리에게는 백발이 성성하고 형형한 눈빛의 촌노들이 있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분)은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경찰 실무의 베테랑이자 때론 가택을 수색하는 과정에 유머를 구사할 정도로 여유롭고 노련해 보인다.

 

지난 세기 말 날선 공포를 안겨주었던 조나단 드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1991)의 식인마 한니발 렉터(앤소니 홉킨스 분)의 냉혈성은 FBI 수사관 스탈링(조디 포스터 분)의 출세욕에서 비롯한 뜨거운 사명감과 그런 대로 선악구조상의 균형을 이루며 관객의 정서와 타협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섬찟한 공포감이 <양들의 침묵>을 넘어선다. 베테랑 보안관 에드는 오랜 가업의 전통에 의지해서 선과 질서 유지에 목숨을 건다는 자부심을 되살려 악몽과도 같은 시련과 맞서 전대미문의 흉악마와 싸워 끝내 이긴다는 할리우드식 환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가공스러운 점은 안톤 쉬거란 가히 괴물급 캐릭터의 산소통 유혈극 이상의 비극적 상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용사이기도 한 모스는 쉬거와의 총격전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유혈이 낭자한 몸으로 미국과 멕시코 접경 지역에서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이때, 우연히 만난 평범한 미국 청소년들이 각각 500달러의 돈을 받고 나서야 모스에게 셔츠와 맥주를 건넨다. 이들에게 모스의 괴로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명 없는 것이다. 

 

미국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각종 남우 연기상을 휩쓸고 있는 하비에르 바르뎀이 열연한 문제적 캐릭터 안톤 쉬거의 심리적 특징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의 완벽한 '부재'라 할 수 있다. 완벽하다는 의미에서 신적인 경지에 올랐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코엔 형제는 쉬거의 개인사를 비밀로 남겨둠으로써 그 정체성에 신화적인 모호함을 부여하려는 듯하다.

 

에드 톰 벨 역을 맡은 토미 리 존스 무섭게 변하는 세상에 대한 무기력증은 회고적인 지혜만 갖고서는 치유되지 못한다

▲ 에드 톰 벨 역을 맡은 토미 리 존스 무섭게 변하는 세상에 대한 무기력증은 회고적인 지혜만 갖고서는 치유되지 못한다 ⓒ CJ 엔터테인먼트

 

이런 점에서 선과 질서를 지키려고 애는 쓰지만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에드와 결정적인 대비를 이룬다. 에드는 미국 사회에 암운처럼 드리운 그러나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확산, 심화해 가는 악의 문제에 무기력한 '꾀 밝은' 늙은이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괴물스런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별의별 초엽기적인 범죄들에 넌덜머니가 난 무력한 노인이다.

 

그래서 그런지 에드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은 마치 '인간을 위한 나라도 없다'라는 비명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듯 슬프기 한량 없다.

2008.02.06 10:33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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