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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설원에 혼자 서 있는 듀크 조단의 모습이 외롭게 보인다.
▲ 'Flight to Denmark' 앨범 재킷 덴마크 설원에 혼자 서 있는 듀크 조단의 모습이 외롭게 보인다.
ⓒ Steeple Ch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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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겨울 하늘은 활시위처럼 팽팽하다. 구름이나 안개가 드리워지지 않은 겨울 하늘은 명징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얀 A4용지에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을 때 나는 두려움과 차가움을 느낀다. 무언가를 채워 넣으라는 무언의 암시다.

지금은 맑지만 눈이나 비가 내릴 수 있다는 어떤 신호와도 같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에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무언의 공포다. 흐려서 눈이 내림으로써 그 공포로부터 해방된다. A4용지가 젖는다. 젖어서, 비로소 찢겨나갈 것 같은 하늘이 안도의 숨을 쉰다.

눈은 팽팽한 일상에서 긴장감을 해소하고 낭만적인 느낌을 준다. 이 낭만과 명징함 사이에 듀크 조단의 재즈 피아니즘이 있다. 듀크 조단의 피아노곡은 명징하지만 차갑지 않고, 사박사박 눈 내리는 겨울밤의 서정을 담고 있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 소리가 깊은 사유를 가진 철학자의 눈빛처럼 냉철하다면, 듀크 조단의 피아노 소리는 흐려서 적막한 날, 소주 한 잔 마시는 술꾼의 낭만이 들어 있다. 그게 눈 내리는 날이라면 더 어울릴 것이다.

듀크 조단의 피아노 연주는 러시아 출신의 화가 아이삭 레비탄의 ‘흐린 날’처럼 흐리면서도 청명한 그림을 연상시킨다.

강물과 하늘이 흐림으로써 겹쳐져 있다. 흡사 눈과 비슷한 화폭이 듀크 조단의 겨울 서정과 잘 어울린다.
▲ 아이삭 레비탄 '흐린 날' 강물과 하늘이 흐림으로써 겹쳐져 있다. 흡사 눈과 비슷한 화폭이 듀크 조단의 겨울 서정과 잘 어울린다.
ⓒ 아이삭 레비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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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삭 레비탄은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났는데, 가난했지만 시와 음악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러시아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우리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삶의 애환을 잘 풀어지는 화장지로 단번에 만들 수 없다. 시간과 노력의 비례만큼 실타래가 화장지가 될 것이다. 아이삭 레비탄은 가난이라는 실타래를 자기의 노력과 주위의 도움으로 잘 풀어나갔다.

재즈피아니스트 듀크 조단 역시, 재즈의 중심지랄 수 있는 뉴욕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한때 택시 기사로 연명하던 때가 있었다. 그는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스탄 게츠 등 당대의 명인들과 연주하면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미국 출신이지만 본 작 <Flight To Denmark>를 통해 그의 서정적 피아니즘은 유럽에서 인정받았다.

듀크 조단의 피아노와 매즈 빈딩의 베이스, 에드 씨그펜의 드럼으로 이루어진 듀크 조단 트리오의 <Flight To Denmark>는 겨울서정과 낭만, 청명함을 드러내는 앨범이다. 특히 ‘No Problem'이나 ’Everything Happens To Me'는 간명하면서 순수함을 담고 있다. 재즈의 문외한이라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듀크 조단의 연주는 아이삭 레비탄의 ‘흐리면서도 청명한’ 그림에서 청명함에 방점을 찍고 싶다. 그러면서도 설원(雪原)에 서 있는 듀크 조단의 앨범 재킷이 조금은 외롭게 느껴진다. 눈이 내리면 사방은 고요해지고 적막감이 들 때가 있다. 이때 눈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표징하면서 홀로임을 절감케 한다. 낭만이라는 눈의 상징적 요소가 줄어들고 대신 혼자라는 공허가 밀려든다. 그곳이 깊은 산사나 겨울바다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때 사모하던 이가 백석 시인을 좋아했다. 그래서 필명도 ‘나타샤’였던 여인이 있었다. 눈 내리는 겨울밤 듀크 조단을 들으면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가 떠오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그 여인은 백석 시인뿐만 아니라 톨스토이와 프랑스 시인 프랑시스 잠도 좋아했을 것이다. 나타샤는 ‘전쟁과 평화’의 여주인공이고, 흰 당나귀는 프랑시스 잠이 좋아했던 동물이었으니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란 열정의 교합을 넘어 체념의 고통을 건너지 않는 한 그나마 불완전한 사랑의 강에서 반쪽에 불과하다. 사랑은 연민이나 동정을 넘어서 사랑 하나만으로 바다가 될 때, 진정 타인을 아우르고 자신을 직시하는 사랑이 된다. 그렇게 자신과 타인을 진정 홀로 섬에서 '사이'를 이어갈 때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사랑도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재즈 월간지 MM Jazz 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재즈, #듀크 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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