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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의 충녕대군
 <대왕세종>의 충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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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이산의 취임은 임박했는데, 충녕대군의 취임은 현재로서는 아득하기만 하다.

<대왕세종>에서 충녕은 현재까지 세자 양녕대군의 승승장구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백성을 입에 달고 사는 그는 "제게도 기회를 달라"며 형에게 읍소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서기 2008년. 이 시점에 사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이산보다도 충녕의 등극이 더 다급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대왕세종> 속의 충녕이 훗날 반포하게 될 '나랏말씀'을 미리 막고자 '최만리 일당'이 충녕의 등극에 앞서 타임머신을 타고 대한민국에 출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충녕이 하루빨리 등극해야 하는 이유

인공지능 전략방어 네트워크(기계연합)의 대반란으로 인류의 운명이 일대 위기에 처했다. 이때 비상한 지도력과 작전력을 갖춘 존 코너가 등장하여 인간연합을 이끌어나가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이에 기계연합은 존 코너의 탄생을 막기 위해, 2029년의 어느 날 타임머신에 터미네이터를 태워 1984년의 미국 LA로 급파한다. 존 코너의 어머니가 될 사라 코너를 미리 없애기 위한 것이다. 

마치 <터미네이터>의 한 장면처럼, <대왕세종> 속의 충녕이 등극하기도 전에 '최만리 일당' 먼저 나타나서 나랏말씀 무용론, '중국말씀' 유용론을 유포하고 있다. <대왕세종>의 최만리는 충녕이 등극한 1418년의 이듬해인 1419년에 문과 합격으로 정계에 등장했는데, '최만리 일당'이 벌써부터 경복궁 광화문 주변을 휩쓸고 있으니 참으로 한글의 운명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 등극 이후에 최만리가 제기한 나라말씀 반대상소의 논리를 들어보면, <대왕세종> 속의 충녕이 하루빨리 등극해서 나라말씀의 기반을 다져두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를 짐작하게 될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 2월 20일자 기사에서 최만리의 언문반대 상소문을 읽어볼 수 있다. 최만리의 나라말씀 반대논리를 보여주는 주요 대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조선은 오래 전부터 정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중화의 제도를 한결같이 준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이제 중국과 글을 같이하고 제도를 같이하려는 마당에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최만리는 말했다. '세계화(중국화)가 곧 다가오려는 마당에 무슨 나라말씀이냐'는 논리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이야기가)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위에서는 언문 창제가 ‘놀라운 일’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럼, 최만리는 왜 언문 창제를 부끄러운 일이라고 한 걸까? 상소문의 뒷부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옛날부터 구주(九州, 중국)가 풍토는 비록 다르지만, 지방에 따라 문자를 따로 만드는 법은 없었습니다. 다만, 몽골·서하·여진·일본·서번 족속만이 각기 그 글자가 있습니다. 이는 모두 이적의 일이므로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옛 글에서 '화하(華夏, 중국문명)로써 이적(오랑캐)을 변화시킨다'고는 했지만,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랑캐들만 제 나라 언어를 썼다?

반포 당시 '훈민정음 언해본'(왼쪽)과 '월인석보' 권두에 실린 판본(오른쪽)
 반포 당시 '훈민정음 언해본'(왼쪽)과 '월인석보' 권두에 실린 판본(오른쪽)
ⓒ 경상대 조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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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최만리는, 중국 안에서는 한자만 사용하는 데에 비해 몽골·서하·여진·일본·서번 등의 오랑캐들만 제 나라 언어를 썼다는 점을 들어, 언문을 창제하는 것은 조선이 오랑캐가 되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중화가 이적을 계몽할 수는 있어도 중화가 이적으로 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언문창제의 부당성을 역설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영어권 미국인'으로 인식하는 최만리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뒷부분에서 그는 "언문을 따로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면서 또 한 번 힘주어 세종의 정책을 반대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세종의 분노를 자초하고 만다.

"어찌 옛날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야비하고 상스러우며 무익한 글자를 따로 창제하시는 겁니까?"

한글을 '야비하고 상스러우며 무익한 글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의 의식이 얼마나 중화주의에 함몰되어 있었는지를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상소문을 던진 날, 최만리는 세종의 친국을 받고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다음날 석방되었다. 이후 복직되긴 했지만, 본인이 스스로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고 말았다. 본인이 사직하지 않더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위에 소개된 최만리의 언문반대 상소를 들어보면, 그 속에 별다른 논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논리 자체가 지극히 사대주의적이고 중화주의적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을 따로 갖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며 한자 이외의 글은 야비하고 상스러우며 무익하다'는 그의 지극히 천박한 발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최만리의 언문반대는 '천박한 발상'

'대국 황제의 칙사'라고는 하지만, 일개 환관이 횡포를 부리는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 이 때 최만리는 중국화를 부르짖었다.
 '대국 황제의 칙사'라고는 하지만, 일개 환관이 횡포를 부리는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 이 때 최만리는 중국화를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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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종이 집권 초기에 한글 창제를 추진했다면, 수구보수세력의 등쌀에 밀려 제대로 뜻을 펼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권력이 안정된 집권 후반기에 나라말씀 창제를 추진했기에, 최만리 같은 반대파들을 손쉽게 투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최만리 세력이 강해지기 전에 세종의 권력이 먼저 강해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기계연합 '최만리 일당'이 파견한 '터미네이터'가 타임머신을 타고 2008년의 대한민국에 찾아왔다. 그리고는 나라말씀 무용론, '중국말씀' 유용론을 벌써부터 유포시키고 있다. 최만리 일당은 '인간연합'의 언어 대신 '기계연합'의 언어를 사실상 공용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대왕세종>의 충녕은 현재까지 등극은커녕 세자 자리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최만리 일당'이 벌써부터 광화문 일대를 점거하고 있으니 나라말씀 한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터미네이터가 존 코너의 어머니 사라 코너를 살해하지 못하도록 급파된 인물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찾아온 인간연합의 사자(使者) 카일 리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왕 세종을 사랑하는 7000만 한글 사용자들이 '카일 리스'가 되어 '인간연합'의 언어인 나라말씀 한글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태그:#대왕세종, #세종, #충녕대군, #훈민정음, #최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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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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