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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겨울방학이 다가올 때마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겨울방학 잘 보내는 방법 찾기였다. 무덥기도 하고 짧기도 한 여름방학보다는 춥지만 따뜻한 아랫목도 늘 준비되어 있고 길기도 한 겨울방학이 더 좋았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두 말할 나위 없었다.

 

겨울방학이 시작하는 날, 나는 미리 준비한 도화지 몇 장을 방 안에 좍 펼쳐놓고 종이마다 큰 원을 하나씩 그렸다. 도화지마다 큼지막하게 그려놓은 원이 가득했고 모든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내용을 채우는 일만 남았다. 바로 겨울방학 시간표를 짜는 일이었다.

 

그 큰 원에서 반이나 되는 공간을 뚝 떼어 '잠 자는 시간'이라고 자랑스레 일필휘지(?!)로 적어놓았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 다음에는 다소 엄숙한 호흡 한 자락을 흘리며 나머지 반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간표를 짜야했기 때문이다. 이 때 집중하지 않으면 나중에 꼭 후회하고 말, 뒤죽박죽에다 지키기도 힘든 시간표를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겨울방학은 내게로 다가왔다.

 

다들 겨울방학 시간표를 짜는 것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게다. 회심의 미소와 집중력있는 자세로 만들어낸 걸작품은 바로 벽에 상패처럼 붙이기도 했고 은근슬쩍 방구석으로 쓱 밀어 넣기도 했다. 두 해 사이를 넘나드는 때인 데다가 길기도 해서 아무래도 아무렇게나 보낼 시간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나면 그 해 겨울방학은 그럭저럭 시간표대로 보낼 수 있었다. 충분히 고민해서 짰고 또 분명히 내 스스로 한 일이어서 책임감과 만족감, 성취감 등 어깨 한 번 쭉 필 만큼 자못 큰 의욕을 불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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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종원

 

첫 달 마지막 날, 충분히 호흡하고 멀리 뛴다

 

같은 ‘마지막 날’인데, 1월 31일과 한 해 전인 12월 31일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따질 것도 없이 단지 한 달 차이가 날 뿐인데 한 날은 앞으로 보낼 시간을 계획하다 맞이하는 날이고 다른 한 날은 이미 지나간 한 해를 정리하다가 맞이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헌 달력과 새 달력을 바꾸는 한 달 동안 아니 두 달 동안 우리는 무언가를 ‘짠다’. 아무리 짜낼 게 없어도 무언가를 짜내야만 하는 것처럼 느끼는 때가 바로 12월 31일과 1월 31일이다. 우리는 이 길고도 짧은 시간동안 무엇을 하곤 했던가. 또 올해는 어떻게 보냈는가.

 

초등학교 때 겨울방학 시간표를 짜는 일은 그것 자체만 보면 여름방학 시간표를 짜는 일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결과적으로 제대로 지키는 어려운 ‘계획’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겨울방학 시간표는 상대적으로 공들여 짰다. 그리고 겨울방학 시간표 짜는 일에 상대적으로 더 공을 들인 이유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겨울방학이 왠지 중요한 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새 학년에는 작년보다 더 잘 하리라는 다짐도 한 몫 거들었다.

 

크면서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달력으로는 한 해가 12월에 끝나지만 회계장부는 11월에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단체, 어떤 회사든 한 해 사업계획을 짜려면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예산 짜는 일은 11월에 마무리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새해 첫 달’은 12월과 1월, 두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어지는 셈이었다. 따뜻한 봄이 오기 전 길고 긴 겨울방학을 맞이하듯 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12월과 1월 마지막 날은 그 어느 달 마지막 날보다 중요해 보이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일기를 쓴다. 그리고 한 해가 시작할 때마다 앞 뒤 공간을 비운 채 양면을 사용해서 ‘2008’과 같이 새 해를 적는다. 그리고 빈 공간에는 한 해 계획을 넣곤 한다. 그런데, 작년 2007년에는 별다른 계획도 꿈도 없었나보다. 2007이라는 숫자 외에는 아무 것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4년쯤 처음으로 일기에 이런 규칙을 만든 이후에 이렇듯 단 한 글자도 넣어놓지 않은 새해 시간표는 없었다! 못내 아쉽기도 했고 또 당황스러웠다.

 

충분히 생각하고 멀리 뛰고 싶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가진 이후로 나는 어릴 적 놀이 같은 시간표와는 다른 의미 있는 시간표를 그렇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1월도 모자라고 12월까지 ‘새 해 첫 달’에 포함시켜야만 했다. 더 많이 생각할 시간이, 더 길게 호흡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많이 움추린 개구리가 멀리 뛴다고 한다. 도움닫기가 충분해야 멀리 그리고 높이 뛴다고들 한다. 새해 첫 달 마지막 날, 나는 무엇을 했고 또, 그대는 진정 무엇을 했던가!

덧붙이는 글 | '붓 한 자루'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찾아낸 이야기를 작은 그릇에 담아 함께 살펴봅니다.


태그:#새해, #꿈, #시간표,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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