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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상용’의 세상이 올까 염려스럽다

오성술 의병장 묘소 앞에 선 손자 오용진씨
 오성술 의병장 묘소 앞에 선 손자 오용진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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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이십니까?” 대신에 "Who are you?"라고 지껄이고, “네 이름이 뭐냐”고 묻는데, “I'm sam” 이라고 답한다는, 서울 강남 한 영어유치원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보도한 기사를 읽었다.

인수위원장이 새 정부에서는 영어교육을 국가적 과제로 삼겠다고 밝히면서,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영어 이외의 일반과목도 영어로 수업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서슴없이 밝히는 현실에,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라는 나의 이 연재기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며칠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아 글 한 줄도 못 썼다.

아니 울분을 토하며 “우리 학생들이 불쌍하다”라는 기사를 밤새워 쓰고서는, 며칠째 코피를 쏟으며 몸살을 앓았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자리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도 이 연재기사를 계속 써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저승에 계신 선열들께서 “정권은 짧고 나라와 겨레는 영원하다”고 성원해 주시는 듯하다.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르게 잡아주는 게 글 쓰는 선비의 마땅한 도리라고 내 등을 일으켰다.

항일유적지를 답사해 보면 사실 진짜 애국자는 거의 다 왜놈 총칼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간신히 살아남은 민족혼을 가진 사람도 사대주의자들의 총탄에 쓰러지고, 권력자의 눈밖에 나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유족들은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 가난에 배우지도 못하고 이발소에서 남의 머리를 씻겨 주고 남의 밥집 설거지 일을 하든지(안규홍 의병장),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면서 소작농으로 살았다(기산도 의사).

왜놈 밑에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 해방이 되자 금세 옷을 갈아입고는 새로운 강자에게 충성하는 사대주의자가 되어 여태 이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고 있다.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창춘에 갔을 때 만주국 황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곳 어귀 기둥에 ‘위황궁(僞皇宮) 진열관’이란 현판을 달아두었다. 동행한 김동삼 선생 손자 김중생씨에게 그 까닭을 묻자 만주국은 일제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창춘에 있는 옛 만주국 황실 어귀, 지금은 '위황실진열관(박물관)'이 되었다.
 창춘에 있는 옛 만주국 황실 어귀, 지금은 '위황실진열관(박물관)'이 되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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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일제가 세운 만주국을 꼭두각시 나라인 ‘괴뢰국’이라고, 그들의 황궁조차도 ‘위황궁(僞皇宮)’ 곧 “가짜 황궁” “거짓 황궁”이라 부른다. 그들은 만주국 황제 푸이를 비롯한 민족반역자들을 ‘한간(漢奸)’이라 하여, 모조리 잡아다가 처벌하거나 인간 개조를 시켰다.

심지어 황제 푸이도 하얼빈 전범관리소에서 10여 년간 복역케 한 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자 사면하고는 평범한 공민(베이징 식물원 정원사)으로 일생을 마치게 했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인조차도 위황궁이라고 부른, 만주국 황실에 충성한 관리나 군인 출신이 조금도 반성의 빛도 없이 나라 지도자나 고급 관리, 또는 군인이 되어 활개를 쳤던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대물림하여 아직도 우리 사회에 주류로 행세하고 있다. 해방은 오히려 친일파들을 살판나게 해방시켜준 꼴이었다.

이런 세상이고 보니, 민족의 주체성이나 자존심은 팽개친 채, 나라의 지도자란 이조차도 ‘일반과목도 영어로 수업하는 방안’도 고개 빳빳이 들고서 발표하는 세상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는데, 이러다가는 곧 ‘일어상용’ 대신에 ‘영어상용’이, 신판 ‘창씨개명’조차 들먹이지 않을까 매우 염려스럽다.

우이황궁 집회루, 이곳은 푸이황제 완용 황후의 거실로 사치의 극치를 이뤘다. 이들이 영화를 누리는 동안 만주 백성들은 일제의 총칼 아래 도탄에 빠졌다.
 우이황궁 집회루, 이곳은 푸이황제 완용 황후의 거실로 사치의 극치를 이뤘다. 이들이 영화를 누리는 동안 만주 백성들은 일제의 총칼 아래 도탄에 빠졌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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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이 황제의 일생을 그린 세 장면, 세 살 어린이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되다(왼쪽). 1934년 만주국 황제에 오르다(가운데). 일제 패망후 민족반역의 죄로 하얼빈 전범관리소에서 바느질을 하다(오른쪽).
 푸이 황제의 일생을 그린 세 장면, 세 살 어린이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되다(왼쪽). 1934년 만주국 황제에 오르다(가운데). 일제 패망후 민족반역의 죄로 하얼빈 전범관리소에서 바느질을 하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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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깃털이 같은 것끼리 모인다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장 취재를 마치고 창평 숙소로 돌아와 취재 뒷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멀리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다. 죽파(竹破) 오성술(吳成述) 의병장 손자 오용진씨였다. 고영준씨로부터 다음 전적지 순례가 오성술 의병장이라는 기별을 받고 먼 길을 달려오신 거다. 오용진씨와 고영준씨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로, “새는 깃털이 같은 것끼리 모인다”는 서양속담이나 “유류상종(類類相從)”이라는 동양속담처럼 의병 후손들끼리는 서로 연대가 돈독하다.

내가 의병 전적지 답사 길에 가능한 후손을 만나려 하는 것은 첫째로 그분들이 전적지나 조상의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왔거나 살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함이요, 셋째는 역사 기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이어져야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의병의 역사에 대해 깊은 연구가 없는 나로서, 그분들 도움 없이 ‘구름에 달 가듯이’ 답사하고는 답사기를 발표한 뒤, 사실과 다르다고 후손들로부터 항의를 받는다면, 나로서 매우 황당하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이나 거리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지만 후손들을 만나고 그분들의 안내를 받고 있다.

오용진씨는 초면이지만 첫 눈에도 의병장의 후손답게 무인(武人) 상이요, 말씨도 매우 씩씩하셨다. 춘추를 묻자, “뭘 그런 것도 묻느냐?”고 웃으면서 일흔이 넘었다고만 말씀하셨다. 이틀간 동행하면서 지켜보니까 이분에게는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동안 광복회 의전부장, 총무부장, 대전 충남지부장 등을 역임하셨고, 지금도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으로, 이런저런 봉사단체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바로 앞 방에다가 여장을 푸시고 다시 내 방으로 건너오셨다. 집이 가까운 고영준씨도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아무래도 화제는 항일 의병 이야기, 광복회와 순국선열유족회나 일반 유족들 얘기로, 이 방면에 앎이 적은 나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공부가 되고 귀한 자료들이었다.

미군정 3년이 친일파들에게는 구세주였다

이야기 가운데는 내가 아는 것도 많았지만 잘 모르거나 새겨들을 것도 있었는데, 해방 후 곧장 이은 미군정 3년이 친일파 무리에게는 구세주가 나타난 세월이었다고 하시면서, 바른 역사를 위해서는 언젠가는 미군정 3년의 역사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사실 나도 한국전쟁 사진 수집을 하고자 미국 버지니아 주 남쪽의 도시 노폭에 있는 맥아더기념관에 가, 그 무렵에 찍은 사진들을 보고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그때 함께 갔던 박유종(임정 대통령 박은식 선생 손자) 선생과 나는 그 앨범과 비디오를 보고서 어찌나 그 처형 장면이 잔인한지 눈시울을 붉혔다.

거기 사진들을 복사해 오고 싶었지만 관리인이 한 장당 일 백 달러나 달라고 하여, 주머니가 얕은 나는 그냥 눈으로만 보고 돌아오지 않았던가(몇 장면은 카메라에 담아왔다).

맥아더 기념관에 소장된 앨범으로 미군정 기간 동안에 붙잡히고 처형된 게릴라들.
 맥아더 기념관에 소장된 앨범으로 미군정 기간 동안에 붙잡히고 처형된 게릴라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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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인을 하루만 풀어 두어도 증거를 모두 없앨 건데, 꼬박 3년 미군정 기간 동안 친일파를 풀어 주었으니, 아니 친일파 무리들이 일제 강점기 연장인 양 다시 완장 차고, 아니 왜놈들이 물러가자 순사나 순사보 하던 놈이 왜놈 대신 경찰서장으로 승진되는 등 신나게 휘파람을 불었으니, 민족반역의 무리를 어찌 처단하였겠는가.

3년 뒤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반민특위법을 만들어 활동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묵인 아래 1949년 6월6일에 ‘친일’ 경찰에 의해 강제로 반민특위가 해산되는 수모 속에 막을 내렸다. 이러고 보니 임시정부 군무부장(현,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신 김원봉 독립투사가 친일 고문경찰 노덕술에게 뺨을 맞는, 일제 강점기에도 없었던 수모로 너무나 원통한 나머지 김구, 김규식 등의 지도자와 북한을 방문한 후 남한으로 귀환치 않았다고 한다.

해방이 되었으나 단 한 사람의 민족반역자를 처벌치 못하고 오늘날까지 내려오자 그 폐해는 독버섯으로 아직도 온 나라를 덮고 있다. 이 독버섯은 곧 정의 진리 양심에 대한 무감각이요, 민족을 배반해도 죄가 되지 않는, 그래야 더 잘 살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논리다. 이런 독버섯이 짙은 안개로 우리 사회 전 영역에 온통 깔렸다는 점이다.

그 정도가 매우 심해 보통사람들, 특히 자라나는 어린 세대는 이게 정상인 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들 가운데는 '철수'보다 '샘'을 좋아하고, 자기 자녀를 그렇게 가르치지 못한 일부 백성들은 안달복달이다.

어찌 맨 정신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으랴. 하지만 숙소가 워낙 외진 시골인지라 가까운 곳에 술집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숙소 앞 밥집으로 가서 부침개 술안주를 부탁한 뒤 소주병을 땄다. 송강의 유배지 전라도 창평 땅에서 민족정기가 썩어문드러진 현실을 한탄하며 쓴 소주로 울분을 달랬다.


태그:#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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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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