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진다." (<제2의 성>)

 

여자의 운명을 이같이 짧은 한 문장에 함축적으로 드러낸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1949년 41세의 나이로 여성에 관한 총괄서 <제2의 성>을 발표한다.

 

당시 프랑스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직후라 경제 부흥에 무엇보다 힘쓸 때였다. 아직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사용되기 이전인 시대, 프랑스 여자의 위치가 결혼과 육아로 한정되어 있었던 어두운 시대, 부모와 사회와 종교가 합심해 여자의 자유를 억누르고 남자에게 종속된 여자상을 가르치고 있을 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제2의 성>.

 

여성을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적, 역사적인 유물론으로 살펴보고 우리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성됐는지, 그 기원을 역사에서 찾는 이 책은 특히 인류를 이끌어온 주체(Sujet)인 남자가 여자를 항상 타인(l'autre)이란 개념으로 규정지었던 점에 초점을 맞춘다.

 

보부아르가 책에 활용한 피타고르의 글은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여자란 혼란과 어둠과 함께 나쁜 원칙을 상징하고 남자는 질서와 빛과 함께 좋은 원칙을 상징한다." 이런 원칙에서 인류사가 시작되었다면 당연히 여성이 가야 할 남녀평등의 길은 멀고 험난할 수밖에 없다.

 

보부아르의 스캔들... "당신이 프랑스 남자들 위신을 꺾었어"

 

철학과 역사, 과학, 사회학에 폭넓은 지식과 안목을 지녔던 보부아르가 여성의 조건을 심도 있게 다룬 이 책은 발간되자마자 프랑스 사회에서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켰다. 성이, 특히 여자의 성이 금기시되던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과감하게 묘사된 여자의 성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 보부아르는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창녀, 레즈비언 등 각계각층의 적나라한 성생활을 치밀하게 묘사했다.

 

당시 프랑스 문단을 주도하던 거장들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까지 친구로 가깝게 지냈던 알베르 카뮈(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는 보부아르가 프랑스 남자들의 위신을 꺾었다고 비판했고, 프랑수아 모리악(1952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레 탕 모데른>(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1945년에 창간한 문학잡지)의 한 멤버에게 "난 당신 여주인의 질에 대해 다 알게 되었다"고 빈정거렸다.

 

그러나 여자가 쓴 최초의 종합 여성서인 이 책은 여성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종속적인 여자의 위치를 운명으로 알고 당연히 받아들였던 많은 여성은 그것이 남성 중심 사회의 권력 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자신들이 놓인 불공평한 환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발행 첫 주에 5만부가 팔리는 등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킨 <제2의 성>은 발간 4년 후인 1953년 미국에 번역돼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전 세계 30여 개 국가에서 번역돼 수많은 세계 여성을 감동시켰다.

 

 

사르트르와 운명적 만남, 그리고 계약결혼

 

지난 9일 탄생 100주년을 맞은 보부아르는 부유한 집안의 큰딸로 태어났으나, 청소년기에 들어 집안이 몰락하는 시련을 겪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립적이던 보부아르는 자신이 돈을 벌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이 번 돈으로 사는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보부아르는 1929년 21세의 최연소 나이로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해 2등으로 당당하게 합격했다. 1등 수석합격자는 다름 아닌 사르트르였다.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같이 준비했던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23살이던 1931년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했다. 상대방에게 충실하되 각자 생활의 자유, 연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게 계약결혼의 핵심이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한 호텔의 다른 방에 묵으면서 계약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독립적인 생활을 누리기 위해 독립적인 공간은 필수 조건이었고, 생활공간으로 호텔을 선택한 것은 가사 일을 피하기 위한 보부아르의 선택이었다.

 

둘 다 부르주아 출신인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상당수 부부들이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도 기만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각자 연애를 즐기며 위선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커플들에 혐오감을 느낀 이들은 정반대 스타일의 공동생활을 추구, 상호 신뢰와 비밀 없는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계약결혼을 성립시켰다.

 

이들은 글쓰기 작업을 공동으로 하면서 지적인 연대감을 높여갔지만 각자 연애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사르트르의 여성 편력도 유명하지만, 최근엔 그에 못지 않은 보부아르의 남성편력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미성년자인 동성 제자들과 한 연애(한 학부모의 고발로 보부아르는 1943년 교직에서 밀려난다), 미국인 소설가 넬슨 알그렌과 한 연애, 44세 때 만난 17살 아래의 무명 영화인 클로드 란즈만과 한 8년 동거 등이 바로 그것. 이로써 보부아르가 우리에게 남긴 엄격한 이미지가 서서히 깨지고 있다.

 

여성해방 전사가 아니라 "스캔들 일으키는 여자"?... 재조명 사진 논란

 

이미지 변화엔 언론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최근 보부아르 특집호를 내면서 보부아르가 거울 앞에 나체로 선 모습을 뒤에서 찍은 사진을 표지사진으로 하고, 거기에 "스캔들을 일으키는 여자"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붙여 독자의 관심을 한껏 잡아끌었다.

 

이렇게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성인의 나체 사진까지 끄집어내 상업성을 추구한 잡지사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이제껏 알려진 엄격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부아르도 한 사람의 여성이었음을 보여준 면에서 긍정적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이 사진은 보부아르가 미국 시카고의 알그렌 집에 있을 때 알그렌의 친구인 사진작가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보부아르가 알그렌에게 보낸 정열적인 서간(총 300여 편)도 이 사진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당신을 만나서 당신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내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아요. 이번에 당신을 만나면 얌전한 여자가 될게요. 당신을 위해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장도 보겠어요. 난 당신이 원하는 것만 할래요." 자신이 항상 비난했던, 사랑에 빠져 남자에게 종속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간 보부아르. 사랑은 여자를 노예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걸까?

 

그러나 알그렌에게서 느낀 사랑도 결국 '우발적인 사랑'으로 그쳤다. 남녀의 사랑에서 평범한 남자였던 알그렌이 사르트르와 자신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보부아르가 선택한 것은 '필연적인 사랑'인 사르트르였다.

 

사르트르도 수많은 '우발적인 사랑'을 거쳐 결국은 '필연적인 사랑'인 보부아르에게로 돌아 왔다. 우발적인 사랑 때문에 결혼까지 할 '위기'에 한두 번 놓이기도 했지만 사르트르가 마지막으로 택한 것은 보부아르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프랑스에서 전설적인 커플로 기억되는 이들은 지적 동반자로서, 서로 작품에 충고와 보완 역할을 해주는 조언자로서, <레 탕 모데른>을 기치 삼아 같은 정치투쟁을 벌인 동지로서 한평생을 살았다.

 

이들이 남녀평등 사상을 완벽하게 실현한 것은 그 시기가 여성의 위치가 지금과 같지 않던 1930년대라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여기서 보부아르의 역할이 당연히 중요했지만, 보부아르의 남녀평등 의지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르트르의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다.

 

우연의 일치일까? 보부아르는 1986년 4월 14일, 사르트르가 사망한 지 6년이 되는 날 세상을 떠났다.

 

책 발간, 다큐멘터리 방영 등 100주년 기념행사 활발

 

지난 9일 보부아르의 탄생일을 기념해 파리 6구 코르들리에 수녀원과 파리 7대학에서 열린 '파리 인터내셔널 심포지엄'이 11일까지 지속됐다. 심포지엄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보부아르 전문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참석했다.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10일 저녁에는 '프랑스5' TV 방송과 '아르테' TV 방송에서 보부아르의 일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는가 하면, 11일 저녁에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삶을 재조명한 TV 단편물 '플로르의 연인들'이 방영되는 등 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프랑스 문화' 라디오에서도 바통을 이어받아 25일까지 매일 밤 8시 30분부터 20분 동안 보부아르 자서전인 <정숙한 처녀의 회고록>과 <사물의 힘>, 서간집, 수첩 글 등에서 발췌해 낭독하고 있다. 5월에는 시몬 드 보부아르 다리 위에 비디오가 설치되어 "난 인생에서 모든 걸 원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에 의한 자유"라는 영화가 상영될 예정이다.

 

이 외에 보부아르에 대한 서적도 무수히 발간되고 있다. 다니엘 살나브의 <전쟁의 카스토르>(카스토르는 보부아르의 애칭이다)와 자크 드기와 보부아르의 양녀인 실비 르 봉 드 보부아르의 <시몬 드 보부아르, 자유를 쓰다>가 발간됐고, 1948년에 나온 보부아르의 평론집 <실존주의(existentialism)와 국가의 지혜>가 다시 발간됐다.

 

덧붙이는 글 | <제2의 성> 번역본은 초기 번역의 질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 미국의 경우 현재 재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여성에 대한 철학적, 역사학적 측면보다 생물학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번역되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여러 권 번역됐지만 완역이 아니라 발췌번역이었는데, 기자가 갖고 있는 책은 1981년에 번역된 것으로 원서 2권의 2부, 3~4부 그리고 결론만 담겨 있다.


태그:#보부아르, #제2의 성, #사르트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