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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으로써 고정되는 기억, 내 청춘의 한 때...를 회상하며

앨범 재킷
▲ [Positive Thingking] 앨범 재킷
ⓒ 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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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시인의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라는 낭만적인 제목의 시집이 있다. 박정대 시인의 시집에는 음악을 향한 사랑과 슬픔이 여섯 개의 기타줄처럼 팽팽하게 감겨 있다.

박정대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대목이 떠오른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은 박정대 시인의 이런 진술과 맞닿아 있다.

“나는 강원도의 힘을 느낀다, 강원도의 힘은 저 눈발로부터 온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뒤덮어버리는 저 무지하고 순수한 反動으로부터, 그리고 그 눈발을 먹고 자라나는 겨울 나무들로부터, 나는 내가 강원도 출신이어서 지금 이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 박정대 시인의 <그리고 그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가운데

박정대 시인의 <그리고 그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는 참으로 긴 시다. 유고 출신의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이 등장하고, 역시 영화감독인 폴란드 출신의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나온다.

더불어 우리나라 음악인 전인권, 한국계 러시아 3세인 카자흐스탄 출신의 로커 빅토르 최도 나온다. 그러나 박정대 시인이 연주하는 ‘기타’는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를 변주하며, 로르카의 시를 자기 기타로 ‘연주’한다.

시집 제목의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격렬비열도는 서해안에 위치한 무인도인데, 그곳의 무엇이 박정대 시인을 ‘격렬’하게 했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그 ‘격렬’함이 내게는 음악(기타)에 대한 강렬한 흡입으로 다가왔다. 또 한 가지, 강렬한 인상은 눈이다.

눈은 낭만의 상징이다.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눈은 여행지에서의 눈발이고, 박정대 시인의 눈은 출생지에서의 눈이다. 눈은 동경이다. 어린 시절 혹은 사랑이 머물던 지점에서의 눈은 추억의 결정체이다. 추억은 머물러 있을 때 아름답다. 과거의 추억이 현재의 이름으로 부상되는 순간 눈은 녹아버린다. 눈 내린 <설국>의 설경이 바로 오늘로 다가올 때 거리는 질척일 뿐이다.

눈의 낭만을 추억의 이름으로 자리하게 하는 재즈 밴드 '어쿠스틱 알케미'(Acoustic Alchemy)가 있다. 기타 두 대로 눈의 산발을 흩뿌려내는 이들의 연주는 밴드 이름처럼 ‘Alchemy’연금술을 직조(織造)하며 겨울의 서정을 함축한다.

스틸 기타를 연주하는 닉 웹(Nick Webb)과 나일론 기타의 그레고리 카마이클(Gregory Carmichael)로 결성된 어쿠스틱 알케미는 기타 음이 주조를 이루는 밴드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인 닉 웹이 1998년 2월 5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앨범은 닉 웹의 유작 앨범이다. 닉 웹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직전 발표하면서 앨범 제목을 <Positive Thinking…>이라니….

죽기 직전에 앨범을 발표하면서 <Positive Thinking…>이라고 한 건, 음악인 조용필이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라고 노래한 <그 겨울의 찻집>처럼 현실의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소설가 카뮈가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통해 표현했던 부조리일까. 세상을 떠난 닉 웹의 심정을 들을 수 없지만, 기타 연주를 듣자면 겨울의 정점에 어쿠스틱 알케미의 연주는 서 있다.

 'Jester With a Lute'
 'Jester With a Lute'
ⓒ 프란츠 할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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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이러니와 부조리가 판을 친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고도 울지 못하고, 카뮈의 소설을 읽고서도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다. 예술은 아이러니와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를 위로해주는 오브제이다. 사람이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지고 있는 희망들, 그 희망은 긍정적 사고 위에서 발생한다. 어쿠스틱 알케미의 앨범 제목처럼 <Positive Thinking…>

이 앨범은 내게 시에서의 말줄임표보다 여운이 더 오래 남는 앨범이다. 흡사 눈발이 날릴 때, 바로 그 순간의 추억이요, 비가 호수에 떨어지면서 후드득하는 소리가 그려진다. 특히 <Rainwatching W.>는 경포대 호수의 빗방울이 뚝방을 밀어내며 내 추억을 적신다. 눈 내리는 순간은 낭만의 정점이지만 비는 죽음의 이미지가 있다고 보인다. 

죽음은 빗소리와 함께 사람의 기억을 가장 강렬하게 잡아당기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인 김광석, 유재하… 이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기억의 저장고에 오래 보관되었다. 이들은 더 이상 부패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존(라이브)이 아니라서 씁쓸하고, 현존의 부재에서 듣는 음악은 오랜 시간 동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들을 때 정호승 시인의 아름다운 시어와 눈발이 흩날리고 ,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들을 땐 내 가슴에 비가 들이친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송강호의 대사처럼 "광석이형은 왜 그렇게 빨리 가고", 유재하 역시 왜 그리도 일찍 갔는지…. 흩날리는 눈발과 비는 내 가슴 속에 낭만과 추억이라는 과거시제를 불러들인다.

소설가 구효서의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이란 소설을 통해 추억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현(弦) 위에 걸려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아름다움이란 슬픔의 가슴을 통해 얼굴에 나타나는 것, 그래서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 들어 있고, 죽음으로써 기억은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문다. 

어쿠스틱 알케미의 음악을 들었을 때, 제목처럼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은 네덜란드의 화가 프란츠 할츠(Frans Hals)의 <Jester With a Lute>라는 그림이 어울리고, 세상을 떠난 김광석이나 유재하, 닉 웹의 이미지는 벤 샨(Bean Shahn)의 <울고 있는 가수>에 가깝다. 두 화가 모두 기타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프란츠 할츠의 그림은 유머러스하고, 벤 샨은 제목처럼 기타를 연주하는 가수가 울고 있다.

'울고 있는 가수'
 '울고 있는 가수'
ⓒ 벤 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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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벤 샨의 그림에 더 끌린다. 어쿠스틱 알케미의 기타연주는 눈과 겨울 서정을 담고 있는데, 긍정적 사고(Positive Thinkng)라고 앨범 제목을 정하면서 자신(닉 웹)은 세상을 떠나다니…. 이 앨범은 내 청춘의 한때, 겨울의 눈발 속에서 헤매던 젊음의 낭만과 환멸을 담고 있다. 시와 재즈를 들으며 이십대를 보냈던 그 겨울, 이제 나는 박정대 시인의 <겨울 浮石寺>를 읊조리며 이십대를 보낸다.

아무래도 나는 가야겠다
오늘은 문득 바람이 불어
앵두나무 푸른 잎들이 손사래치는
적막한 내 저녁의 창가에서
이 언덕과 저 구릉을 지나
한 소설 음악처럼 너에게로 가야겠다


밥짓는 마을의 저녁 연기 속으로
개 짖는 소리는 컹, 컹, 컹
돛배처럼 올라오는데
겨울바람이 밀고 가는
한 척의 저녁


끝끝내 밀려가지 않는
얼어붙은 폭포 속
절벽의 악기 하나
내 사랑의 의지가 돋을새김해 놓은

겨울 浮石寺
그 단단한 生의
악기 속으로
아무래도 나는
음악처럼 가야겠다


- 박정대 시인의 <겨울 浮石寺> 전문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 http://blog.naver.com/mangkwang에도 실려 있습니다.



태그:#재즈, #그림 , #박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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