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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가에 근심이 가득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눈가에 근심이 가득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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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부터 <대왕세종>이 방영됨에 따라 방송 3사의 간판 사극이 모두 다 조선시대로 전환했다. 방송 3사가 조선 초기(KBS, 대왕세종)-조선 중기(SBS, 왕과 나)-조선 후기(MBC, 이산)를 각각 분점한 셈이 됐다.

<대왕세종>의 처음 두 방영분에서는 태종 역 김영철의 파워풀한 연기가 단연 주목을 끌었다. 한편, 고뇌하는 세자 양녕과 야심찬 왕자 충녕의 대비는 향후 엇갈리게 될 이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대목이었다.

자기 손으로 두 아들의 운명을 뒤바꾸어놓을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년, 생존 1367~1422년)의, 군주로서의 고뇌와 아버지로서의 고뇌가 이 드라마에서 앞으로 어떻게 표현될지 주목된다. 이와 관련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하나 있다. 그것은 태종이 왜 나이 40세 때부터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했는가 하는 점이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준 1418년 당시 태종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런데 그는 나이 마흔이던 1406년부터 총 4차례에 걸쳐 이른 바 양위 파동을 일으켰다. 1409년과 1416년에도 태종은 양위 파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

물론 조선시대 군주들의 양위 파동이 어떤 때에는 정치적 쇼인 경우도 있었지만, 재위 7년째부터 거듭거듭 양위의사를 밝힌 태종의 경우에는 단순히 정치적 쇼라고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양위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방원에 대한 기존의 일반적 인식에 변화를 초래할 만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태종 이방원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중 하나는 왕권에 강한 집착을 보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왕권을 가로챈 비정한 권력지향형 인물의 이미지가 그를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재위 초반부터 양위를 시도하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난 것을 보면, 그가 과연 왕권에 무조건 집착한 인물이었나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군주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손에서 대권을 놓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태종은 왜 한창 나이인 마흔 살 때부터 스스로 상왕이 되려 했을까?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자기 손에 형제들의 피를 묻히면서까지 권력을 장악한 그가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태종이 상왕이 되려고 한 이유는?

그 이유를 찾아내려면, 태종의 정치적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태종의 정치적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내려면, 그가 가장 적대시한 최대의 라이벌이 누구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종 하면 흔히 떠오르는 장면은 이런 것들이다. 아버지를 몰아낸 아들. 형을 왕위에 앉혔다가 도로 끌어내린 동생. 이복동생들을 죽인 비정한 형. 이런 그림들만으로 태종을 이해하게 되면 ‘태종은 극도의 권력지향형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태종이 왜 40세 때부터 상왕으로 물러나려 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극도의 권력지향형 인물이라고만 이해하게 되면, 그가 일찍부터 거듭거듭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한 이유가 쉽게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상왕이 되어 아들을 통제할 의도가 있었다 해도, 권력이란 남의 손에 넘기는 순간부터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것인데 그런 권력의 속성을 이방원 같은 사람이 몰랐을 리가 없다.

반면, 태종의 최대 라이벌이 누구였는지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그의 내면을 추구하게 되면, 그가 나이 마흔 때부터 상왕이 되려 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태종 이방원을 다룬 <용의 눈물>이란 드라마에서 잘 표현된 바 있듯이, 이방원의 최대 라이벌은 조선 건국의 주역인 삼봉 정도전이었다. 이방원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왕위에 오른 최대 이유는 정도전과 그의 그림자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제1차 왕자의 난 때에 정도전을 참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럼, 왜 이방원은 정도전을 극도로 견제했을까? 단지 정도전이 출중한 인물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정도전이 위험해서였을까? 정도전과 이방원이 왜 대립했는가 하는 점은 신권(臣權)과 왕권의 대립이라는, 조선 정치사의 핵심 쟁점 중 하나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조선 정치사의 핵심 쟁점 중의 하나

후궁과 궁녀들을 많이 거느린 걸 보고서 조선시대의 군주들이 강력한 힘을 가졌을 것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조선시대 군주들은 실제로는 그다지 강력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내내 군주들은 강력한 신권에 대항하여 왕권을 유지하느라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 급급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군주 중에서 그나마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사람으로는 연산군과 광해군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이나 광해군의 중립외교 등은 왕권이 신권을 억누르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신권이 강했던 조선왕조에서 왜 그들만이 조(祖)나 종(宗)이 아닌 군(君)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나치게 강력한 군주는 유교적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비토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유학 혹은 유교가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이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 이 사상은 왕권보다는 사대부를 강화하는 데에 활용된 논리였다.

유교 이념은 본래 봉건시대의 사회지배층인 사대부 지주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 이념이 지배한 조선사회에서는 사대부 세력을 배경으로 한 신권이 왕권을 능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대부 관료들은 표면적으로는 왕 앞에서 허리를 숙였지만, 그런 외형적 형식이 그들 사이의 실제적 권력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정도전은 강력한 신권정치를 추구한 인물이고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정치를 추구한 인물이었다. 정도전이 신하이고 이방원은 왕족이었지만, 정도전은 대세(신권정치)를 따르는 사람이고 이방원은 대세에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이방원이 그토록 대담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방원, 정도전을 견제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도 하지만, 극과 극은 충돌하기도 쉽다. 그 둘은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선제공격을 가한 쪽은 정도전이었지만, 결국 승리한 쪽은 이방원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왕권 대 신권 대립에서 왕권의 첫 승리로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봉건시대 정치사에서는 예외에 속할 만한 일이었다.

이처럼 신권 강화파인 정도전 세력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었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왕권의 안정에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자신의 왕권을 확립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왕권 자체 혹은 왕실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방원은 ‘내가 죽은 뒤에 내 아들이 왕권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라는 우려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도전 세력 같은 강력한 신권 그룹의 존재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 또 그는 권력을 위해 살상을 서슴지 않는 추악한 정치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살벌한 상황을 몸소 체험한 그로서는 자신의 아들이 과연 제대로 왕위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의 권력을 빼앗아 본 그이기에, 혹시라도 자기가 죽은 뒤에 남이 자기 아들의 권력을 빼앗지나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해 한 것이다.

이는 주먹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의외로 맞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맞는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가 결국에는 싸움을 더 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방원의 경우도 그러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내린 해법은, 일찌감치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상왕이 되어 후방에서 왕권 확립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세자가 혼자 힘으로 역경을 헤쳐 나가기보다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에 세자가 왕권을 확립하도록 도와주는 쪽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3차례에 걸쳐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시도했고 결국에는 3남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여전히 상왕으로서 아들의 왕권 확립을 지원했다. 

이방원, 왕의 권력보다 왕실의 권력을 우위에 두다

 태종의 첫 번째 양위 시도에 관한 <태종실록> 6년(1406) 8월 18일자 기사. 사진에서 밝은 색으로 처리된 부분이 양위 시도에 관한 것이다. 태종은 음력 6월에 한 번(1416년), 음력 8월에 세 번(1406·1409·1418년) 양위를 시도했다.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이따금씩 심경의 변화가 많았던 모양이다.
 태종의 첫 번째 양위 시도에 관한 <태종실록> 6년(1406) 8월 18일자 기사. 사진에서 밝은 색으로 처리된 부분이 양위 시도에 관한 것이다. 태종은 음력 6월에 한 번(1416년), 음력 8월에 세 번(1406·1409·1418년) 양위를 시도했다.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이따금씩 심경의 변화가 많았던 모양이다.
ⓒ <태종실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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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차례(양녕대군에게 3회, 충녕대군에게 1회)에 걸쳐 양위 파동을 일으킨 점, 상왕이 된 후에는 세종의 권력 강화를 도와준 점 등을 볼 때에, 태종의 최대 관심사는 자신의 권력보다는 조선 왕실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권력보다는 왕실의 권력을 우선시했다는 점에서는 태종의 진심을 이해해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볼 때에, 4차례에 걸친 양위 파동은 단순한 쇼라기보다는 일정 정도는 그의 진심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왕권 강화를 위한 태종의 노력은 적어도 세종 대에는 결실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은 태종 이방원의 작품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종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문치주의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대신 피를 묻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요인들을 배제하고서는, 재야에 여전히 강력한 신왕조 반대세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세종이 한글창제 등의 문화사업에 진력할 수 있었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세종 대에 왕권이 강화된 탓에 결과적으로 혜택을 입은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한국 ‘백성들’ 역시 세종 덕에 여전히 혜택을 입고 있다. 그때의 집중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혹시라도 한자나 영어를 쓰고 있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역사적으로 볼 때, 왕권이 강화되면 백성들이 덕을 입고 신권이 강화되면 귀족들이 덕을 입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과거의 제왕들이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반 백성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천명사상은 서양의 국민주권이론과 겉으로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지만, 백성을 권력의 원천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과거 대부분의 제왕들은 자기 대에 백성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주겠다는 목표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그들이 꼭 백성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귀족 지배층에 대항해서 권력을 지키자면 백성들을 우군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처음에는 그런 목표를 갖고 출발했지만, 그들은 대개 귀족층이나 신권에 억눌려 나중에는 권력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종 대에 조선왕조 최대의 위민정치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지배층(양반 혹은 귀족)을 대표하는 신권이 왕권에 비해 그만큼 약해졌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왕권 강화로 인해 왕권의 이념적 지지기반인 백성들의 처지가 그만큼 나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왕권 확립을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은 태종의 ‘공헌’에 상당 부분 힘입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들을 죽인 비정한 권력자, 정도전을 몰아냄으로써 요동 수복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사대주의자라는 점에서는 이방원은 한없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인물이지만, 특권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권을 억누르고 일반 백성의 이익을 대변하는 왕권을 강화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상으로는 나이 마흔(만 39세)이면 아직 대통령에 입후보도 할 수 없는데, 태종 이방원은 그 나이에 아예 ‘대통령’을 거쳐 스스로 ‘상(上)대통령’이 되려 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기에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조선왕조 최대의 갈등 구조 중 하나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글에서는, 양녕대군과 충녕대군 중 어느 쪽이 태종의 이상을 계승하는 데에 적합한 인물이었는가를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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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