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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냉동창고 대형화재로 유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편집자주>
[기사수정 : 9일 밤 11시 10분]
 
 김용진씨는 "조상이 목숨 바쳐 지킨 조국에서, 내 아들은 중국 국적으로 불에 타 사망했다"며 "아들 목숨을 차별하면 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거 자랑해봤냐고? 뭐 하러 그런 말을···. 한국에선 그런 거 필요 없더라고."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후손인 중국교포 김용진(57)씨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종이컵에 반잔이나 채워진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미 시커멓게 타버렸을 속에서 쓴 소주가 뜨겁게 반응하는지 잠깐 인상을 찡그렸다. 잠시 침묵. 입을 연 김씨가 물었다.

 

"7년 만에 만난 아들을 단 이틀 함께 지내고 저 세상으로 보낸 부모 심정을 아나?"

 

김씨의 아들은 김군(27)씨. 김군씨는 지난 7일 경기도 이천시 냉동창고 '코리아2000' 화재 현장에서 사망했다. 아버지 김용진씨를 7년 만에 만난 지 딱 일주일 후에 변을 당한 것이다. 김씨를 8일 밤 10시 이천시 화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만났다.

 

김용진씨는 부인과 함께 지난 2000년 한국에 들어왔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아들 김군씨는 혼자 중국 장춘에 남았다. 아버지 김씨는 2005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아들 김군씨를 초청했다. 김군씨는 지난 12월 31일 입국했다. 그는 아버지와 단 이틀을 보낸 뒤 지난 2일부터 숙식이 해결되는 '코리아2000' 현장에서 일했다.

 

"아들 잃은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김용진씨는 "아들을 7년 만에 만났으니 내가 얼마나 반가웠겠나"라며 일주일 전의 부자 상봉을 회상했다. 김씨는 "근데 이미 다 끝나버렸다, 하나 있던 아들의 시신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김씨는 의외로 차분했다.

 

"아들 잃은 심정,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쓸쓸하기 짝이 없다."

 

앞서 밝혔듯, 김씨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다. 그의 외증조부는 김규식이다. 김규식은 한말 의병장 출신으로 일제시대 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정의부(正義府) 등에서 활동을 했다. 우리나라는 이런 김규식의 활동을 인정해 지난 96년 애국훈장을 헌정했다.

 

그리고 김씨의 큰 외할아버지 김성로 역시 독립운동가다. 김성로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있으면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다가 1936년 일본군에 의해 사망했다. 1990년 조국은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헌정했다.

 

김용진씨는 이런 가족사를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김씨의 삶 역시 영광스러웠을까? 김씨는 독립운동가 후손 자격으로 1990년에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그의 귀국 소식은 방송 뉴스를 통해 전국에 전달됐다.
 

이때 조국은 김씨 가족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줬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영광은 그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김씨는 2000년 다시 입국했다. 이번엔 독립운동가 후손이 아닌 몸 하나가 전부인 노동자 자격이었다. 그에게 꽃다발을 안기는 사람은 없었다.

 

"조상이 목숨 바쳐 찾은 조국에서 아들은 중국 국적으로 불에 타"

 

김씨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할은 목수였다.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산업재해는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김씨는 2007년 10월 지하철 9호선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4층 높이에서 추락했다. 왼쪽 손목과 갈비뼈 9개가 부러졌다. 왼쪽 얼굴 광대뼈도 손상을 입었다.

 

김씨는 산재보상금 1800만원을 받고 일터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는 지금 사고 후유증으로 왼쪽 손을 쥘 수가 없다. 왼손을 쥘 수 없는 60세 가까운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김씨는 아직 찾지 못했다.

 

이렇게 산업재해로 고통받고 있는 그가, 이번엔 산업재해로 아들을 잃은 것이다. 김씨는 "이게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김용진씨가 아들 고 김군(27)씨의 위패 앞에 국화꽃을 놓은 뒤 울고 있다.

 

"내 조상들이 목숨 바쳐 찾은 조국에서, 내 아들은 중국 국적으로 한국에서 불에 타 죽었다. 그리고 조국은 은근슬쩍 중국 노동자들에게 보상이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다 똑같은 사람 아닌가. 어떻게 보상을 달리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나. 참 쓸쓸하다. 내 아들 목숨을 차별하면 이번엔 참지 않을 것이다."

 

"똑같은 사람 아닌가, 목숨 차별 못 참아"

 

김씨의 집은 서울 구로동이다. 부인 장고분(56)씨와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보증금은 50만원이고 월세가 22만원이다. 김씨는 "부인이 가끔 식당 같은 데 나가 돈을 벌어와 그것으로 먹고 산다"고 말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어준 기자가 고마웠던 것일까, 아니면 말이라도 하니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김씨는 커피 한 잔 하자며 밖으로 기자를 이끌었다. 함께 걸으며 김씨에게 "한국이 원망스럽지 않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짧았다.

 

"원망 같은 거 없다. 조상덕으로 지금껏 조국에서 돈 벌어 먹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바로잡습니다

<오마이뉴스>는 9일 경기도 이천시 냉동창고 화재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독립운동가 후손 중국교포 김용진씨 사연을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해당 기사에 일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어 아래와 같이 바로잡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날 오전 <"난 22만원 단칸방, 일용직 아들은 화마에" 조국에서 반복된 독립운동가 후손의 비극>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독립운동가 후손 김용진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보냈습니다. 김용진씨는 이번 화재 참사로 7년만에 만난 아들 김군(27)씨를 잃었습니다.

 

해당 기사에서 김용진씨는 1920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했고,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규식 장군의 외증손자로 소개됐습니다. 그리고 김용진씨의 외조부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한 김성로씨라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9일 저녁 국가보훈처의 최종 확인결과 이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김용진씨의 외증조부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김규식이 아닌 한말 의병장이자 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정의부(正義府)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圭植)씨로 밝혀졌습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은 지난 96년 건국훈장 애국장 받았습니다.

 

또 역시 지난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김성로는 김용진씨의 외조부가 아닌, 큰 외조부로 밝혀졌습니다.

 

김용진씨는 독립운동가 후손은 맞습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가 그의 외증조부라고 보도한 김규식은 다른 인물입니다. 이에 김용진씨를 비롯해 동명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장군 후손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합니다.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나

 

<오마이뉴스>가 김용진씨를 만나 취재한 건 지난 8일 밤이었습니다. 이때 김용진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규식 장군이 내 외조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발언을 근거로 인터넷에서 관련 사실을 확인하던 중 지난 90년 2월 22일 김용진씨의 귀국 소식을 전하는 MBC 뉴스를 접했습니다.

 

당시 MBC 뉴스는 "김좌진, 이범석 장군과 함께 독립군인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청산리전투 등 항일 무장 투쟁에 큰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 고 김규식 장군의 유일한 친손자인 51살 김시준씨가 오늘 외조카 38살 김용진씨와 함께 중국에서 입국해 고국에 첫 발을 내디뎠다“고 보도했습니다.

 

9일 <오마이뉴스>는 MBC의 보도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당시 (MBC) 보도가 어떻게 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습니다.

 

어쨌든 처음부터 관련 사실을 철저히 확인하지 못하고 일부 혼선을 드린 점에 대해 독자 여러분에게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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