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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공고 운동장 스탠드에 나란히 앉은 오성훈 교사와 이지나 학생.
 동호공고 운동장 스탠드에 나란히 앉은 오성훈 교사와 이지나 학생.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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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고등학교. 한 때 이 이름은 대한민국의 희망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공업 성장이 지상과제였던 70~80년대, 국가는 공고생들에게 '예비산업역군'이란 이름을 헌사했다. 공고생을 자녀로 둔 어른들은 동네에서 어깨를 펴고 다녔다.

시간은 흘렀다. 공고와 공고생에 관한 이야기는 듣기 어려워졌다. 대신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에 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의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서울 옥수동에 있는 동호정보공업고등학교가 곧 폐교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폐교를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평당 가격 2000만원이 넘는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은 공고가 있는 자리에 초등학교가 들어서길 바랐다. 교육청은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동호공고 이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서 공고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교육의 원칙 대신 주민들 민원을 택한 서울시교육청은 '동호공고 폐교'를 추진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동호공고생들은 가슴을 쳤다. 그 때 한 학생이 세상을 향해 절규하듯 물었다.

"우리가 핵폐기장이나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입니까?"

이 학생의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때렸고, 공명으로 돌아왔다. 많은 논란 끝에 동호공고 폐교는 없던 일이 됐다. 교육청이 앞장서 없애려 했던 학교를 학생·교사 그리고 시민들이 지켰다. 아파트 주민들이 원하는 초등학교는 동호공고 운동장 한 쪽에 짓기로 했다.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던 2007년 늦은 여름의 일이다.

한 해를 보내고, 다시 한 해를 맞이하는 순간. 문득 동호공고를 지키기 위해 뛰었던 교사와 학생이 떠올랐다. 그들의 회고로 2007년을 정리하고, 그들의 입을 통해 2008년의 희망을 듣고 싶었다. 상처 위에서 일으켜 세운 희망과 꿈은 다른 무엇보다 굳건한 법이니까.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던 연말, 그들을 동호공고에서 다시 만났다.

[학생 이지나] "나쁜 어른들도 있지만, 좋은 분들이 훨씬 많더라"

동호공고 1학년 이지나 학생.
 동호공고 1학년 이지나 학생.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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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문제에 신경을 쓰고 뛰어다니다보니 힘들었지만, 마음 속에서 변화가 일었다. 아직 어리지만 앞으로 살면서 어떤 압박이 있더라도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상처? 물론 적지 않게 받았다(웃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상처는 어느새 긍정적인 철학과 다짐으로 진화했다. 학생들조차 설득하지 못한 어른들의 폐교 추진이 준 상처는 깊었다. 그래도 이지나 학생(동호공고 방송영상과 1학년)은 '벌써' 웃으면서 그 때를 추억하고 있다.

지난 여름 이양은 폐교를 막기 위해 열심히 뛰었던 학생 중 한 명이다. 교육청 홈페이지에 폐교 반대의 글을 남기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 늦게까지 남아 회의를 하며 학교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양은 "많이 노력해도 세상은 바뀌는 거 없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많았다"며 "그러나 시도를 해보니 바뀌더라, 학교를 위해서 우리가 이 정도 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참 감격스러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양은 공고생으로서 자부심이 있다.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서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갑작스런 폐교 추진이 이양의 자부심에 잠시 제동을 걸었다.

"나 자신에게 당당하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폐교 사건이 터지면서, 실업계에 안 좋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실망했지만 우리가 주축이 돼서 노력하면 사람들의 시선도 좋아질 것이다."

이제 곧 이양은 2학년이 된다. 이양은 폐교 사태를 겪으면서 스스로 더 강해졌다고 믿고 있다. 지금 이양이 품고 있는 희망은 세상과 닿아 있다.

"공부에 대한 흥미·재미 등이 모두 폐교 사태를 이겨낸 후 이후 더욱 커졌다. 주변 친구들도 대체로 그렇다. 지난 여름 우리에게 힘을 줬던 사람들처럼, 지금 우리는 약자를 위해 살아야한다는 걸 어렴풋이 배워가고 있다."

[교사 오성훈] "죽으나 사나 동호공고와 함께 간다"

오성훈 교사
 오성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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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오마이뉴스>에 처음 연락을 했던 건 오성훈(42) 교사다. 그 때 오 교사는 "학교가 학생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갖고 교육당국과 맞섰다. 그의 노력은 동호공고를 지키는 데 큰 힘이 됐다. 그러나 그는 교육당국에 '찍혔고', 오랫동안 현장을 지키는 교사로 남게 됐다.
 
"사실 얼마 전부터 교직에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다른 일을 고민했었고, 장학사를 준비하기도 했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내가 변신을 해도 이해해 달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 이것도 물 건너갔다. 내 인생에서 다른 선택은 없을 것 같다. 내가 앞장서 지킨 학교가 아닌가. 이제 죽으나 사나 동호공고와 함께 해야 한다(웃음)."

오 선생은 87학번으로 전형적인 386세대다. 그는 386세대로서 자존심이 있다. 그가 대학에서 경험한 세계는 지금도 그의 삶을 방향을 정하는 좌표이기도 하다.

오 선생은 "세상에 물들고 싶지 않아서 교사를 택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인데 최소한 사기 치며 살 수 없지 않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또 오 교사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세상은 그 쪽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믿음을 갖고 살고 살지만 지난 여름의 싸움은 역시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싸움을 한다는 건 이기겠다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닌가. 누군가를 이겨야만 하고, 상대를 쓰러뜨리려는 과정 자체가 참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 것 같다. 다시는 그런 싸움 못할 것 같다. 많이 힘들었는데, 싸워야 하는 일 자체가 없으면 좋겠다."

오 선생은 폐교 반대의 뜻을 밝힌 학생들의 서명용지를 지금도 갖고 있다. 지난 여름 학생들은 스스로 서명용지를 만들고 그곳에 당당하게 자신들의 이름을 적었다. 그 때 오 선생은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스스로 서명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모든 걸 학생들이 준비한 것인데, 얼마나 기특하고 교육적인 일인가. 그리고 서명은 가장 이상적인 의사표시 방법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이걸 못하게 막았다. 선생들이 알아서 해주겠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난 결국 학생들에게 '교육청에 전달하겠다'는 말로 서명용지를 챙겼다."

오 교사는 "앞으로 최소한 3년 내에 동호공고에서 좋은 성과를 만들어 내겠다"고 말했다. 동호공고는 올해에 입학하는 신입생 모집을 마쳤다. 오 교사는 "우수한 학생이 어느 때보다 많이 들어왔다"고 했다.

오 교사는 지난 여름 교육청 관계자가 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한다. 오 교사는 "어차피 동호공고는 방송특성화 고등학교로 해도 성공 못한다"는 말을 언급하며 "어쨌든 소중한 아이들인데 내가 책임지겠다, 꼭 여기서 성과를 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 교사는 "폐교를 추진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듣지 못했는데, 앞으로도 못들을 것 같다"며 씁쓸해 했다.

생각해보면 다른 길을 모색했던 오 교사의 발목을 잡은 건 동호공고였다. 그리고 오 교사는 지금 동호공고와 함께 달리기 위해 호흡을 조절하고 있다.


태그:#동호공고, #오성훈, #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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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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