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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열망을 품고 있는 버마(미얀마) 국민들은 지난 2007년 9월 약 10여년 만에 또다시 대규모 민주화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시위는 소강상태입니다. 이에 '함께하는시민행동'은 버마 국내의 열악한 상황을 피해 국경지대로 나와 있는 많은 시민들이 민주화의 메시지가 담긴 라디오 채널들을 들을 수 있도록 '내 이름을 새긴 피스(PEACE) 라디오 보내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시민행동과 공동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글은 참여자치 21 김상집 대표가 보내온 글입니다. [편집자말]
영화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해석보다는 재현에 집중했다. 그 결과 5.18에 무지한 관객에게 불친절한 영화가 되어 버렸다 영화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해석보다는 재현에 집중했다. 그 결과 5.18에 무지한 관객에게 불친절한 영화가 되어 버렸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 기획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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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버마항쟁은 27년의 시차가 있긴 하지만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을 겪은 나에게 끔찍한 악몽처럼 옛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살육은 5월 18일부터 일어났다. 전남대 정문에서부터 공용터미널, 수창초등학교, 광주공원, 장동 로타리를 비롯하여 19일에는 윤공희 대주교가 거주하는 가톨릭센터까지 난입하여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민간인들을 두들겨 팼다.

나는 아직도 몸서리를 친다

피투성이로 쓰러지면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두 다리를 잡아 군용트럭으로 질질 끌고 가 트럭 안으로 던져버렸다. 반항하는 기색이 있거나 도망치려 하면 대검으로 서슴없이 찔러댔다. 정수리를 맞아 피가 솟구치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아직도 몸서리를 친다.

그러나 방송에서는 제주를 포함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뉴스만 나올 뿐, 학살에 대한 뉴스는 없었다. 우선 광주의 학살소식을 외부로 알려야 했다. 녹두서점에 앉아 광민, 돌베개, 일월서각, 대구양서조합, 부산양서조합 등 책에 적힌 전화번호와 전국 각지에 있는 사회과학 서점에 전화를 걸어 광주의 학살소식을 전달하였다.

오후 5시쯤 국회를 출입하던 송정민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상황일지를 쓰고 있던 터라 상세하게 광주의 학살소식을 전해줬다. 그리고 외신기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밤이 되자 7시 통행금지령으로 공포에 질린 우리는 그래도 뭔가 학생과 시민들이 죽었다는 비슷한 거라도 나오겠지 싶어 19일 밤 9시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9시 뉴스 첫머리에 광주 소식이 나오면서 마치 "슛 골인" 할 때 나오는 함성처럼 집집마다 야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주에 북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준동하고 있으며, 간첩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한마디 없고 온통 빨갱이들이 시위하고 있다는 뉴스뿐이었다.

곧장 집집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녹두서점 바로 앞에는 광주MBC 방송국이 있었다. 민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한 뉴스에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MBC 방송국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작은 형과 나는 화염병을 들고 불을 붙여 방송국 2층 유리창 안으로 던졌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방 꺼져버렸다. 안에서 소화기로 불을 끈 것이다.

분노! 광주 MBC에 화염병을 던지다

이를 본 형수님께서 녹두서점으로 달려가 화염병을 쇼핑백 가득 담아왔다. 작은 형과 나는 계속 화염병에 불을 붙여 광주MBC 방송국 안으로 던졌다. 여동생 현주와 형수님의 친동생 사돈까지 가세하여 화염병을 날라 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공수부대의 트럭은 화염병 하나 가지고도 잘 꼬실랐는데, 광주MBC 방송국 안의 불길은 불이 붙는 즉시 바로 꺼져버렸다.

사람들이 앞 다투어 돌과 화염병을 던져대는 통에 잠시 뒤로 빠져 쉬고 있는데 드디어 불길이 솟아올랐다. 어용방송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국내방송과 언론을 다시는 믿지 않았다.

5월 20일 아침 우리는 비장한 마음으로 시위에 나섰다. 언론도 우리 편이 아니고 외부에 우리 소식을 알릴 방법도 전혀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였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투쟁을 포기할 순 없었다. 시위는 한일은행 사거리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웬일인지 공수들이 위협만 할 뿐 시민들을 향해 돌격하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외신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취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후 우리는 주로 '미국의 소리(VOA)'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야 광주의 투쟁이 어떻게 밖으로 전달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5월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사람들은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도청 앞 분수대에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를 외치며 궐기대회를 하고 있었다. 광주 외곽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주로 '미국의 소리(VOA)'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광주가 여전히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속속 광주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5월 25일부터는 다시 시민군을 편성하여 총기를 지급하고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을 광주 소식이 알려지다

25일에는 학생들을 YWCA로 모집하여 100여명을 10개 분대로 편성하여 도청과 외곽 방어선에 배치시켰다. 26일에는 7개 분대 70여명의 학생들과 300여명의 향토예비군을 재무장하여 배치하였다. 27일에는 아침 일찍 광주 외곽 방어선에 위치한 동의 향토예비군 중대를 동원하여 각 동마다 지역방어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외신 기자들은 우리에게 20일 첫날에는 열 손가락을 활짝 펴보이며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격려했다. 광주학살로 인해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이 결국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수립되리라는 것이었다. 열 손가락이 하나씩 줄기 시작하여 26일에는 세 손가락만 펴 보이며 '사흘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길 것' 이라며 격려했다.

그러나 27일 새벽 많은 시민군이 장렬하게 싸우다 죽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1년 뒤 특별사면으로 출옥하고 나서야 많은 국민이 주로 '미국의 소리(VOA)'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광주 소식을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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