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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1월 1일 밴쿠버 잉글리쉬베이에서 열린다.
▲ 북극곰 수영대회 매해 1월 1일 밴쿠버 잉글리쉬베이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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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밴쿠버에서 3개월째 머무는 중이었다. 길거리 영어도 좀 다듬어볼 겸, 장기여행으로 얇아진 여행경비도 보충할 겸, 학원과 식당을 부지런히 오가던 때였다.

그날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떤 특별한 날이라고 감상에 젖는 걸 마뜩찮아 하면서도 이국에서 맞는 연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일하러 가기 싫어 내내 미적거리다 겨우 집을 나선 참이었다.

거리에는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멍하니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니 저마다 들뜬 표정으로 부지런히 집으로 클럽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 주방에서 양고기와 닭고기, 설거지 거리와 씨름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새어나왔다. 왠지 이 도시에서 나 홀로 이방인인 것처럼 평소 다니던 거리마저도 낯설게 다가왔다.   

‘눈이라면 그나마 좋을까?’

버스에 타서도 무겁게 가라앉은 창밖 풍경만 바라보았다. 비가 지겹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리는 것도 아니고 안 내리는 것도 아닌, 우산을 쓰기도 그렇고 안 쓰기도 그런 밴쿠버의 비!

크리스마스 시가행진
▲ 산타 차 크리스마스 시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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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언덕에서 썰매를 타는 가족
▲ 눈 내린 밴쿠버 해변 언덕에서 썰매를 타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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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비가 그리워질 날이 올까?’

문득 버스가 아직도 제 자리에 멈춰서 있음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앞쪽으로 고개를 뽑아보니 버스운전사가 한 장애인이 휠체어를 탄 채 버스에 오르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장애인이 자리를 잡고 휠체어를 고정시킬 때까지 그는 느리고 꼼꼼하게 장애인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다.

‘하필이면 오늘처럼 늦게 나온 날에….’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다 스스로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 그리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내 행동을 보지 않았을까. 내 마음을 읽지나 않았을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 역시 장애인이 아무리 많아도 거리나 버스에서는 볼 수 없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점점 더 쓸쓸해지는 날이었다.

식당은 평소보다 몇 배나 바빴다.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한 숨을 돌릴 정도였다. 설거지와 청소를 끝내고 식당 문을 나설 때가 십분 전 자정이었다. 어둡고 텅 빈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자정이 지나갔다. 새해가 시작된 것이다.

도심 쪽에서 새해를 알리는 축포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매해 친구들과 태백산이나 지리산에서 새해를 맞았던 기억들이 아득하게 밀려왔다.

숙소와 가까운 다운타운의 교회
▲ 즐거운 크리스마스 숙소와 가까운 다운타운의 교회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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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어둠 속에서 버스 하나가 달려와 내 앞에 섰다. 급한 김에 일단 탑승한 후에 정기패스를 꺼내려고 가방을 뒤적이는데 버스운전사가 소리쳤다.

“헤이, 친구! 난 너를 알아! 매일 이 시간에 타지? 그냥 들어가도 돼!”

그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들어가라고 고갯짓했다. 고맙다고 인사한 후 버스 뒷좌석에 앉아있는데 바보같이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가 나를 안다니! 아마 그가 아는 건 양고기 비린 냄새를 팍팍 풍기며 녹초가 된 얼굴로 자정 즈음에 버스를 타는 동양인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안다고 했다.

그의 버스는 나와 또 다른 승객 한 명을 태우고 다리를 건너 도시의 불빛 속으로 달려갔다. 그때서야 하루 종일 낯설게만 굴었던 도시의 불빛이 이방인에게도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하긴! 사람이 사람을 아는 일에 뭐가 더 필요할까! 버스에서 내리면서 나도 그에게 소리쳤다.

“나도 당신을 알아요!!”

다운타운으로 진입하는 다리
▲ 쓸쓸함, 그리고 이방인 다운타운으로 진입하는 다리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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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빙긋 웃는 그에게 손을 흔들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Happy New Year!!”

그도 손을 흔들었다. 곧 버스는 불빛 속으로 달려갔다. 그가 나를 알아주었듯이, 그날 이후 버스운전사인 그는 내게 밴쿠버의 얼굴이 되었다. 아마 오늘도 그는 어느 정거장에서 느릿느릿 장애인을 태우고 또 어느 정거장에서 이방인에게 인사를 건네며 비 내리는 밴쿠버를 달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의 일부분은 월간 <좋은세상>에도 실려 있습니다.

양학용 & 김향미 부부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러시아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장애인, #밴쿠버, #버스운전사, #이방인,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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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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