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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고등학생운동을 회상하는 당시의 고등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오래전의 기억을 회상했다. 또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도 참석해 당시의 기억을 공유했다.
▲ 좌담회 20년 전 고등학생운동을 회상하는 당시의 고등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오래전의 기억을 회상했다. 또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도 참석해 당시의 기억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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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이 정치적 의식을 갖고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던 고등학생 운동은 그 바탕을 87년 6월 항쟁에 두고 있다.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며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에 큰 전환기를 제공한 87년 6월 항쟁은 그 끄트머리에서 고등학생운동을 낳게 된다. 사회전체에 영향을 끼친 민주화 바람이 고등학생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대통령 직선제로 대표되는 정치현실의 변화는 사회적인 분위기속에 ‘학생회장을 직선제로 선출하자는 요구’가 반영될 수 있게 했고,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학습하게 된 학생들의 의식 또한 성장하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고등학생운동이 형성된다.

이런 고등학생 운동의 불꽃을 당긴 것이 바로 87년 12월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이하 서고련)의 명동성당 농성이었다. 그것은 또한 6월 항쟁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것을 의미 있게 기억해 내지 못했다.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았던 올해 다양하게 펼쳐진 어느 행사에서도 고등학생운동을 기억해 내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것은 20여년 세월 속에 묻혀버린 역사가 됐고, 비합법적 형태의 조직구성과 당시 고등학생들이 처했던 현실적 위치 때문에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그저 89년 전교조 출범과 함께 선생님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고등학생운동, 20년 세월에 묻혀버린 역사

87~89년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참석자들
▲ 고등학생운동 좌담회 87~89년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참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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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저녁 오마이뉴스 회의실. 어스름이 깔린 저녁시간 하나둘 모여드는 사람들은  그 묻혀진 역사를 평가해 보고 20년 전의 기억을 정리해 보기 위해 오는 이들이었다. 고등학생 시기 치열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 아련하지만 당시의 경험은 지금 그들의 위치를 결정하게 만든 바탕이었고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렇기에 87~89년으로 이어진 고등학생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그들의 표정에는 어떤 회한과 오래된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감회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20년의 세월, 18세 고등학생은 38세의 중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옛 이야기 속에 어렴풋이 그 때의 모습을 서로 되살려 낼 만큼.

<오마이뉴스>는 87년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으로 시작된 현 시기 청소년운동 20년을 정리하며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을 통해 고운의 의미를 평가해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좌담회란 형식을 빌렸지만 20년 전 못 다한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놓음과 함께 그때의 시간을 추억해 보는 자리기도 했다.

참석한 사람은 이철구(안양 성문고 교사. 당시 서고련 공동의장), 홍기표(레디앙 기획위원),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정경화(민주노동당 고양시당 부위원장), 황순주(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전누리(청소년 인권 활동가) 등 모두 6명으로 87~89년 고운을 주도했던 사람들과 현 청소년 인권운동가 등이다. 좌담회에는 이들과 함께 고운에 참여했던 다른 분들도 함께 자리해 이야기를 들으며 당시를 함께 회상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뜻을 말하고 있었던 것'

안양 성문고 교사. 87년 당시 동성고 2학년이었으며, 서고련 공동의장이었다.
▲ 이철구 안양 성문고 교사. 87년 당시 동성고 2학년이었으며, 서고련 공동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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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감회가 느껴지는지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서고련 지도부로 3인 대표 중 한사람이었던 이철구씨였다.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시작했다.

"서고련 활동하면서 논쟁적인 대화를 많이 했다. 밤새 논쟁을 하고 토론도 하고 말싸움도 했는데, 알게 된 결론은 상대와 내가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뜻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면서 논쟁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왔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다 그런 생각으로 왔다”며 한마디씩 던진다. 잠시 웃음이 돌더니, 굳어있던 표정들이 풀리는 모습들이다.

"어제 뉴스에서 쌍둥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었요.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한편으로 옛 이야기를 나눈 다는 것에 설레임도 있어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습니다."

정경화씨는 입시문제로 고민하다 자살한 학생들 이야기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옛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의견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20년 전 고등학생 시절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레임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들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달려왔고, 그 속에서 그들은 2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홍기표(38)
  "87년 1월 박종철 열사 추모제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알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방관이다'라는 말을 듣게 됐어요. 그것이 맘에 와 닿았으면서 삶의 지침이 됐습니다. 그리고 6월 항쟁에 참여하면서 ‘여럿이 함께 뭉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됐지요.’ 그때는 자본주의가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다음달이면 망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지요.(웃음)"

<레디앙> 기획위원. 당시 용산고 2학년이었고, 위트와 유모가 풍부해 흥사단에서 꽤 인기있는 학생이었다.
▲ 홍기표 <레디앙> 기획위원. 당시 용산고 2학년이었고, 위트와 유모가 풍부해 흥사단에서 꽤 인기있는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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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화 (37)
"중3때였어요. 아빠가 이상한 편지가 왔다면서 보여주더라고요. 뭔가 봤더니 당시 대학생들이 중·고등학생들에게 보내던 의식화 편지였어요. 아빠가 그것을 불태워버리자고 했는데, 불태우는 척 하면서 빼돌렸지요.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내용이 가슴 아팠어요. 학생운동을 하다 막 부임한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편지가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사회가 네가 생각하는 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이야기’도 듣게 됐지요."

하지만 정경화씨가 무엇보다 세상을 바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시 군사독재정권이 저지른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실을 알고 나서였다. 86년 부천서에서 발생한 성고문 사건에 대해 당시 검찰은 ‘운동권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한다’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일축했지만 진실이  끝까지 가려질 수는 없었다.


“친구집에 갔다가 우연히 '말'지에 나온 권인숙 성고문 사건 이야기를 본 거예요. 그때가 중3이었는데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사람 몸을 갖고 이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흥사단을 찾아간 거예요. 처음에는 흥사단이 비밀지하조직인 줄 알았는데 밝은 분위기에서 토론하고 놀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런 데가 있구나’ 생각했지요."

<말>지에 나온  권인숙 성고문 사건 보고 충격

전성원(38)  "저는 청계천에서 밀려온 사람들이 경기도 광주와 성남 등을 전전하며 터전을 잡았던 곳으로 이사와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광주항쟁이 무척 궁금했어요. 그런데 당시 모든 통로가 다 막혀 있어서 알 수 없었잖아요. 그러던 차에 학생운동 출신 선생님을 통해 광주의 진실을 알면서 피가 끓었던 거지요. 그리고, 학교 옆에 있던 민정당 연수원에서 벌어진 대학생들의 농성사건을 보면서 최루탄 냄새를 처음 알게 됐고, 고교에 진학해서 문예반 친구들 만나면서 의식이 성장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 고등학생들에게 하던 이념교육도 받았지만 도리어 그것을 역으로 생각하며 흥미를 갖는 친구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들이 사회인식을 갖게 만든 것은 역시나 세상이었다. 세상의 부조리와 거기에 항거하는 소리가 그들에게도 들려왔고 그 과정에서 저항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타난 것이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이었다.

이철구(38)  "서고련 이전부터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이나 부당함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맥이 닿았다고 봐요. 학내 모임을 만들었고, 외부모임을 통해 다른 친구들을 만났고 이런 친구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모이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어떤 평가에서처럼 일부만의 운동이나 갑자기 생겨난 조직은 아니라고 봅니다. 각 학교에서 성숙이 있었고 사회적인 요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하자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지요."

87~89년의 고등학생 운동을 설명하고 있는 당시 고등학생들.
 87~89년의 고등학생 운동을 설명하고 있는 당시 고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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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구씨는 비교적 당시 상황에 대한 분석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켕기는 부분이 있다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부정선거 때문에’ 농성을 벌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부정선거를 예상하고’ 준비한 것입니다. 즉 부정선거가 일어난 것에 공분한 것이 아닌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넘어가는 군사독재의 연장에 분노한 것이지요. 그 분노가 서고련을 만들었고 명동성당 농성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또한, 당시 서고련은 외부의 관여가 없었던 고등학생들만의 행동이었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전교조를 만들었던 선생님들과는 이전부터 친하게 지내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농성에 대해 대학생 조직이나 교사들과 대화나 이야기 한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모든 라인도 다 끊었습니다. 외부세력과 단절하려했던 것은 운동의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었어요."

정치적 변혁이 되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

황해문화 편집장. 당시 동북고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당시 동북고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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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원
"부정선거 징후 때문이 아니라, 군부독재권력이 연장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한 농성이었다는 이철구 이야기는 맞는 말입니다. 87년 서고련은 고등학생들의 정치운동이었습니다. 기성세대에 자극을 주자라는 의미도 갖고 있었고, 학내 민주화나 교육민주화, 학생 인권운동도 중요했지만 결국은 정치운동이 중요하다고 봤던 것입니다. 정치적 변혁이 될 수 있다면 나머지 부분들은 다 해결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정의내린 ‘87년 12월 서고련 결성과 명동농성은 6월 항쟁을 겪으며 의식적으로 성장한 고등학생들이 군사독재 세력이 연장되려는데 대한 우려감 속에 결단을 내린 것으로 요약된다. 그 부분을 전성원씨는 이렇게 부연했다.

“독재정권이 연장되려는데 대해서 어찌 보면 정세판단을 잘못 했던 것 같아요. 6월 항쟁을 일으켰던 민중들이 결코 노태우의 당선을 좌시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거든요.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민중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봤고,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면 최소한 위수령이라도 떨어질 것이라 예상했었습니다. 그래서 명동성당 농성을 시작하며 모두들 결연한 분위기였지요.”

하지만 이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지만 대선 결과는 묻혀버렸고, 이들의 농성은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철구 "농성하면서 전체 고등학생들을 연합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그래서 낼 아침에 지도부가 빠져나가서 광주에 가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었는데, 이 정보가 경찰에게 들어갔고, 그러면서 긴급하게 해산 당하게 된 거죠. 그래서 집행부가 잡혀간 상태에서 남은 사람들이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홍기표 "몰려다니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농성을 해산하던 마지막 날. 우리는 아침이슬을 부르는데 주변에는 캐롤이 울려 퍼지고 들뜬 분위기를 보면서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농성은 그렇게 해산됐고 모두들 집과 학교로 돌아가지만 그 여파는 많은 어려움을 안겨준다.  

전성원 "저야 2선 지도부여서 노출이 안됐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등교하면 수업 안받고 매일 학생부로 내려가고, 집회 있는 날이면 선생님들과 내내 같이 있다가 저녁때나 올라왔어요."

세상을 바꿀 수는 있지만 쉽지는 않다

87년 명동농성 해산 후 다들 학교로 돌아갔지만 이들은 향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다시 토론을 벌였고 서고련의 해체로 의견을 정리한다. 이철구씨는 당시 상황을 보충설명하며 이후 일부 문건에 나왔던 ‘내부비판이 부재했다’는 지적에 이렇게 설명했다.

“서고련 내부에 두개의 파가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서고련을 강화하자’고 또 하나는 ‘학생 속으로 들어 가자’였지요. 기존 학생들과의 관계설정에서 동떨어졌고 엘리트적으로 간다는 내부비판이 있게 되면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그 과정 거치면서 행사 등은 같이 준비했지만, 서고련 이름은 못 걸게 된 거지요. 사분오열되면서 각자 흐름으로 간 셈입니다. 자체 정화기능이 있었고 내부에서의 비판도 있었기에 해체된 것입니다.”

민주노동당 고양시당 부위원장. 당시 동명여고 1학년으로 흥사단, 푸른나무, 바른고련 등에서 활동했다.
▲ 정경화 민주노동당 고양시당 부위원장. 당시 동명여고 1학년으로 흥사단, 푸른나무, 바른고련 등에서 활동했다.
ⓒ 오마이뉴스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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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화
"저희 때는 선배님들과 조금 달랐어요. 저는 합법 비합법 넘나들며 일했거든요. 도서관 반장, 교지 편집반, 바른고련, 푸른나무 활동도 했고. 고2 때 공장 활동, 농활도 다니고 일반 대학생들이 하던 일을 했었어요. 비합법적 활동하다가 퇴학직전까지 갔지만 일단 서고련 선배들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같이 하는 흐름이 강했어요.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이 동아리를 다 장악하고, 학생회 직선제 따내고, 학내 행사 기획하고 종이비행기 시위나 정치적인 사안을 학교로 끌어들이기도 했었어요. 예를 들어 이한열 사진을 밤중에 숨어있다가 학교에 몰래 붙이고 했었지요."

- 서울 쪽 분위기가 그랬다면 부산 쪽 이야기도 궁금해지는데, 한번 들어보지요. 당시 부산 쪽의 고운은 어땠나요?

황순주(37)  "잘못 흐르면 무용담이 될 수 있고 치기어린 고등학생들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시 고운을 한다고 하면 다들 웃긴다고 했지만, 자기 삶에 고민이 녹아있지 않으면 어려운 부분이라는 전제를 갖고 봐야할 부분 같아요. 부산은 자발적으로 스스로 조직화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사학비리에 대한 부분을 통해 모이면서 같이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지요. 기본적으로 학교로 돌아가자, 만남은 밖에서 하지만 활동은 학교에서 하자, 합법이 가능하면 합법으로 가고 어려우면 비합법으로 가자 이런 식이였어요. 서고련 이야기 학습하면서 교훈을 얻었고, 준비 없이 드러내지 말자 뭐 그랬던 것 같아요."

말을 잇던 황순주씨가 갑자기 말을 얼버무리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언어를 써 본지가 너무 오래돼서… 저도 전에는 모난 사람이었거든요” (일동 웃음)

잠시 웃음이 돌며 참석자들은 “이해해 이해해”하며 격려했고, 황순주씨는 말을 이어갔다.

“하여튼 고운은 전교조 이전부터 고민이 있어 왔어요. 전교조는 교육민주화운동일 뿐이지 학생들을 주체로 한 운동이 아니었거든요. 고운을 했던 사람들은 전교조에 대한 반감같은 것이 있어요. 고운이 전교조에 묻혀가는 운동이 됐거든요. 전교조가 없었다면 고운이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군사정권에 타격이 될 수 있었다고 보거든요. 고등학생들의 조직화가 정권에는 위험성으로 인식됐던 것 같고, 부고협이 3기까지 출범했는데, 92년에 많은 탄압을 받게 됐습니다. 그때 문화지형을 잘 다졌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 돼요."

-그럼 지금 청소년 운동이 보는 고등학생운동에 대해서도 한번 들어보지요.

전누리(21) "이 자리 오면서 고민했지만 당사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제가 어떻게 평가하겠어요(일동 웃음) 그때 당시 선배들이 이랬었다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87~89년 고등학생운동이 얼마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가 생각해 봤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저도 고등학생운동에 대해 알기 위해 정리 작업을 했는데, 어떤 평가를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라고 봐요. 다만, 지금도 그때처럼 입시적 문제가 있는데 왜 당시의 운동이 이어지지 못하고 지금 학생들은 저항하지 않나 하는 고민이 있어요."

전성원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 것 같다. 당시 어른이 됐을 때 이런 흐름을 가져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후 이어진 고운의 침체는 우리나라 운동의 변화과정에도 연관이 있다. 대중운동이 고등학생 운동을 개량화시켰다. 역량이 빠져나갔고 고운이 조직화될 수 있는 형태가 못됐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득이 안되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어떻게 하면 현재의 문제로 소화해 낼 수 있는가? 고민해 봐야 한다. 고등학생운동이 좌절되고 청소년 운동이 안 되느냐하면 선배들의 운동이 현재의 순간에서 대입 가능한 숙제가 못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학생들은 그때의 활동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89년 부산 용인고 2학년 때 '부산지역 고등학생 협의회'(부고협) 의장을 지내며, 부산지역 고등학생운동을 주도했다.
▲ 황순주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89년 부산 용인고 2학년 때 '부산지역 고등학생 협의회'(부고협) 의장을 지내며, 부산지역 고등학생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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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주
"한 인간이 언제 자각하느냐에 대한 문제도 있다고 본다. 고등학교 때 될 수도 있고 대학교 때 될 수도 있어서다."

자기 삶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던 고운

시간이 흐르면서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깊어지고 있었다. 조합주의에 빠진 전교조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 나왔고, 진보를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지난 10년간 제대로 해 낸 게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가보안법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주춤 주춤 밀리다가 과거사 진상규명 등을 현재화 시키지 못한 모습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쏟아졌다. 고운을 회상하며 그들이 맘에 담아 놓은 이야기는 무척이나 많았다. 시간이 부족할 만큼….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고운에 대한 평가나 느낌을 들어봤다.

홍기표 "뜨거웠던 기억이기는 하지만 가슴 아픈 기억이었어요. 우리는 기존 운동권에 섞이지 못했잖아요. 고등학생운동 논문을 쓴 친구도  술 마시면서, 과거가 마음 아프다며 우는 모습이었습니다. '고등학생운동'이란 이름이 국회 도서관에 들어가게 하고 싶었서 논문을 썼다고 하더군요."

이철구 "군사정권을 끝내자는 합의성이 있었고, 순수성이 있었다고 봐요. 당시 학생들의 마음자세가 무척이나 순수했거든요. 일반적으로 학교 밖에서 돌던 친구들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전성원 "당시 고등학생들이 전위운동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그 자체가 대단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어요. 일반적으로 쉽게 나올 수 없는 애들이 사회에 나타난 것이었지요."

마무리 하면서 그들은 고운 후배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정경화 "제가 고운을 할 때도 우리가 처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청소년 운동이 줄기를 찾고 싶어서 고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따라서 당시 운동이 의미 있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 같아요. 요즘 청소년들이 예전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상황이나 지형은 달라졌다고 봐요. 그래도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슈를 잘 못 만들어내는 것 같이 보여요. 학생회 직선제처럼 친구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슈들이 많이 개발됐으면 좋을 것 같아요."

20년 전과 변함이 없는 21세기의 교육 현실

현 청소년인권활동가
▲ 전누리 현 청소년인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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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누리
  "두발이나 체벌 이런 게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되고 있어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동성고에서 1인 시위가 있었는데 두발자유화나 학생인권문제 여기에 담임교사가 다른 책이나 사회과학서적 같고 오지 말라 이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87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20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가 고민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철구씨가 한마디만 더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만 정리하겠다’는 사회자의 선언에 그럼 ‘식당가서 이야기 하겠다’면서 좌담회는 마쳐졌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전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다들 그 20년 전의 기억에서 매여살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는 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요”

나름대로 스스로는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시도 간단하게 정리된 것 같지는 않았다. 20년 전 이야기 때문에 가장 일찍 좌담회 장소에 왔고 가장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 80년대 고등학생들은 서고련 20주년을 기념하는 모임을 오는 19일 오후 5시 명동성당에서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등학생운동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시발점이 됐던 장소에서 20년 만에 해후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서고련 20주년 모임 문의 010-2966-6947(홍기표)



태그:#고등학생운동, #청소년운동, #서고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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