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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기업을 정치자금의 공포에서 해방시켰으나 기업은 노 대통령이 '노동친화적인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노조는 이명박 후보가 '기업친화적인 후보'라는 이유로 각각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는 패러독스에 빠졌다.
▲ 노무현 패러독스 노무현 대통령은 기업을 정치자금의 공포에서 해방시켰으나 기업은 노 대통령이 '노동친화적인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노조는 이명박 후보가 '기업친화적인 후보'라는 이유로 각각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는 패러독스에 빠졌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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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조간신문에서는 정치 기사보다 정치경제성 기사 두 개가 눈에 확 띄었다.

하나는 10일자 <중앙일보> 4면에 실린 '대기업 총수들 2002년 "출장중" 올해는 "집무중"' 제하의 기사였고, 다른 하나는 오늘자 다른 대부분의 신문에 실린 한국노총의 이명박 후보 지지선언 기사였다. '이명박 대세론'에 힘을 싣는 행렬이다.

이대로라면 대한민국 경제는 더없이 좋아질 전망이다. 대선이 코앞에 다가와도 대기업 총수들이 '정상집무'를 하고, 기업과 노조가 모두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노사정 대타협은 저절로 될 것이고, 그리 되면 우리나라 경제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총수들, 2002년에는 '출장 중' 올해는 '집무 중'

대기업 총수들이 2002년에는 '출장중'이었는데 올해는 '집무중'이라는 위트있는 기사의 핵심은 대선을 앞둔 재계의 풍속도가 확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대선을 앞두고 재계 풍속도가 확 바뀌었다. 약속이나 한듯 대기업 총수들이 앞다퉈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A회장은 '2002년에는 도와 달라는 정치인들의 청탁을 거절하기 어려워 해외로 도피성 외유를 떠났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며 '노무현 정부의 최대 치적을 정경유착의 단절로 꼽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또 "5·6공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화 신은 사람',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는 '상도동·동교동 사람' 이름 외우기 바빴다"며 "요즘엔 대선 캠프 주변 사람들을 알아둘 필요도, 이유도 없어졌다"고 말한 B회장의 말을 전했다.

사실 역대 대선 때마다 대기업 총수들은 '도피성 해외출장'을 가기에 바빴다. 여야 정치권의 정치자금 요구에 시달리다 못해 아예 해외로 도피했던 것이다.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에서 보듯, 심지어 국세청까지 동원해 정치자금을 요구했던 과거의 정부여당이 아니었던가.

짐작컨대, 이 신문이 이런 재계의 풍속도 변화를 보도하게 된 계기는 지난 7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송년 기자간담회였던 모양이다. 이 신문은 "그(손 회장)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자금 요구가 거의 없어졌다'며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 정치 얘기를 하다보면 하나같이 정말 깨끗해졌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재계의 풍속도가 바뀐 것은 2004년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때문

이날 <한겨레>를 비롯해 대부분 조간신문은 손 회장 간담회 기사를 일제히 실었다. 다만 신문에 따라 관점은 달랐다.

한겨레 신문은 "기업 정치자금 부담 없어졌다"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에서 "지금은 정치자금 문제가 깨끗해져 참 다행한 일이다"고 말한 손 회장의 발언에 초점을 맞추어 전했다. 그러나 다른 신문들은 대부분 손 회장의 7일 간담회 발언 중에서 삼성특검 관련 발언에 주목해 제목을 뽑았다.

손 회장은 간담회에서 '삼성 특검'에 대해 "아직까진 밝혀진 사실이 없고 모든 것이 추측에 불과해 말하는 게 조심스럽다"면서도 "다만 수사가 너무 길어져 경제에 부담을 줄까 걱정된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른 신문들은 대선을 앞두고 재계 회장님들이 다리 쭉 뻗고 자는 신 풍속도보다는 삼성특검 때문에 삼성 회장님만 다리를 쭉 뻗고 자지 못하는 것이 더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처럼 재계의 풍속도가 바뀐 것은 2004년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때문이다. <중앙일보>도 지적했듯이, 2004년 대선자금 수사가 마무리되면서 정치권이 재계에 선거 자금을 요구하던 시대도 함께 막을 내렸으며 "선거가 끝난 뒤 곤욕을 치를 것이 뻔한데, '검은 유착'에 집착하는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의 특정후보 지지는 김대중 정부 덕분?

한국노총의 이명박 후보 지지선언도 마찬가지다.

한국노총의 지지선언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 전에 실시된 ‘정책연대 지지후보 선정 조합원 총투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조합원 총투표에서 이명박 후보는 9만8296표(지지율 41.5%)를 얻어 1위를 차지했고, 정동영 후보와 이회창 후보는 각각 7만3311표(31%), 6만5072표(27.5%)를 얻는데 그쳤다.

한국노총 투표에 앞서 정동영-이회창 후보는 투표 시기를 검찰의 ‘BBK 수사’ 결과 발표 이후로 미뤄달라고 요청했으나 한국노총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투표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이어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한노총 사무실에서 열린 ‘2007 대선 정책협약 협정서’에서 이용득 한노총 위원장과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한노총 조합원 88만명의 이 후보 적극 지지 ▲한노총과 약속한 이 후보의 공약 적극 이행 ▲이 후보 당선시 한노총과 정책협의회 정례화 등을 내용으로 향후 5년간 '운명 공동체'가 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80여만 명의 조합원 중에서 9만여 명만이 투표한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과반 투표·찬성이라는 노조의 일반적인 민주주의 형식원리에도 어긋난다.

그보다 더 역설은 노동자 권익옹호를 위한 노동조합이 대선후보 중에서 가장 '친기업' 성향의 후보와 '한 몸'이 된 것이다. 알다시피 이 후보는 금산분리 완화, 성장을 통한 비정규직 해법 등 가장 '친기업·반노동자적 공약'을 내건 후보다. 그런 점에서 한국노총의 이런 결정은 노동계 안팎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용득 위원장은 이날 "진보와 보수도 함께 갈 수 있다"고 선언했으며, 이명박 후보는 "(한나라당은) 보수이지만 진보보다 더 개혁적으로 일하겠다"고 화답했다. 이 위원장은 이어 "한국노총은 남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 후보의 당선을 위한 전 조직적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현행 선거법상 노조는 특정 후보 지지를 목적으로 한 집회는 가질 수 없으나 토론회나 기자회견, 인터넷 게시물 등 기타 통상적인 노조활동 범위 내에선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할 수 있게 돼 있다.

끈 떨어진 '노동친화적 대통령'

알다시피 노동조합의 오랜 숙원인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한 것은 김대중 정부였다. 김대중 정부는 또한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해 노사정 대타협을 시도했으며 민주노총은 이를 거부했지만 한국노총은 노사정위에 참여해 정부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기본적으로 코포러티즘(협동조합주의)을 표방한 노무현 정부 또한 산별교섭 인정과 노사정위 강화를 통해 한노총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대기업 노조에 대한 비판으로 각을 세우긴 했지만 노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부터 노동자 권익보호에 앞장선 '친노동자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상당수는 한때 노 후보를 지지했던 '노빠'였다.

그런데도 한국노총은 2007년 대선에서 '노동친화적'인 후보보다는 '기업친화적'인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친노동자 대통령'을 표방했던 대통령이 노조로부터 외면받는 ‘끈 떨어진 대통령’이 된 셈이다.

대선을 앞두고 재계 회장님들이 국내에서 집무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였지만, 검찰의 성역없는 수사를 가능케 한 것은 자신의 정치자금 문제까지를 포함해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를 이번 기회에 끊어야 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이었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은 기업을 정치자금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대통령이다. 그런데 기업인들은 대부분 "노동친화적인 노 대통령 때문에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며 기업인 출신의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노무현 패러독스... 진대제 전 장관, 김혁규 전 최고위원도 노무현 정권 떠나

하긴 이명박 지지 행렬에 동참하는 세력이 이런 이익·압력단체들 뿐만은 아니다. 그리고 대선을 앞두고 특정후보 ‘대세론’에 힘을 싣는 이런 지지행렬은 흔히 볼 수 있는 '다반사'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르다.

이미 진대제 전 정통부장관은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진 전 장관이 어디 참여정부의 '보통 장관'이었나. 참여정부를 조각할 때 자녀의 이중 국적이 문제되자 국방·법무부 장관이라면 몰라도 정통부장관만큼은 그런 문제를 따지지 말자고 직접 국민을 설득했던 노 대통령 아닌가. 진 전 장관 또한 참여정부 최장수 장관으로 일하며 노 대통령을 칭송했었다.

오늘 공개적으로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한 김혁규 전 의원도 어디 '보통 의원'이었나. 한나라당 당적의 민선 3선 경남지사였던 그는 노 대통령과의 교감 하에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비례대표 의원이 되었고, 노 대통령은 그런 그에게 다른 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총리자리를 주려고까지 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최고위원까지 지낸 대표적 '노빠 정치인'이었던 그 역시 자신은 '친노'가 아니라며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런 친노 지지층의 이탈행렬은 이명박 후보 지지자 3명중 1명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었던 사실에 비추어 별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이러니 대통합민주신당 내에서는 대선 전부터 "죽 쒀서 뭐 줬다"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물론 그 '죽'은 노 대통령이 쑨 것이다.

정치인 도덕적 기준을 높이고도 낮춘, '노무현 패러독스'가 지배하는 대선

이명박 후보의 구속 사실을 전한 1972년 6월 19일자 <경향신문> 기사
 이명박 후보의 구속 사실을 전한 1972년 6월 19일자 <경향신문> 기사
ⓒ 최재천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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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재임중 성역없는 대선자금 수사와 공직자 인사청문회 등으로 국민의 정치인에 대한 도덕적 기준을 몇 단계나 높였다. 반면에 노 대통령은 자신의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 화법'으로 국민의 도덕적 기준을 몇 단계나 낮추었다. 이른바 '노무현 패러독스'다.

통합신당은 이명박 후보에게 '전과 14범'이니 '전과 16범'이니 하는 공세를 폈다. 한나라당은 이 가운데 대부분이 기업을 운영하면서 건축법 위반 등 대표이사로서 법률적 책임을 진 데 따른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후보가 국회의원 시절에 법원으로부터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은 선거법 위반 및 범인도피죄는 그의 도덕성에 심대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당내 경선에서부터 불거진 도곡동 땅, ㈜다스, BBK 등 그는 여전히 의혹투성이 후보다(물론 정치가 생물이듯, 정치인 또한 생물처럼 변하기 마련이다. 이 후보 또한 '착한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은 '부패하거나 거짓말쟁이어도 좋고 전과 14범이라도 좋다'는 심정으로 이 후보에 대한 '묻지마 지지'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은 정치인에 대한 도덕적 기준을 높이고도 낮춘 '노무현 패러독스'가 지배하는 선거임에는 틀림이 없다.


태그:#노무현 패러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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