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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세비야적인 남자, 돈 다비드의 안내로 멋들어진 플라멩코를 감상한 다음날(2월 16일) 아침, 미겔씨 가족이 정원에서 아침식사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씻고 있을 무렵 숙소 주인인 미겔씨가 문을 노크하며 일어났냐고 묻는군요.

미겔씨는 책가방을 맨 채 장난을 치는 두 어린 자녀를 가리키며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러 갔다가 12시 체크아웃 할 때 돌아오겠다”고 짧은 영어로 말합니다. 아, 스페인 아저씨들 참 가정적입니다. 외국인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열정적이고 호색할 거라고 단정하곤 합니다. 스페인 내를 여행하면서 제가 놀란 건, 스페니시들은 오히려 대단히 명예를 중시하며,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엄격한 일부일처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지요.

스페인 아저씨로 고찰해 보는 스페니시의 정체성

‘사랑은 열정적으로, 하지만 일단 결혼하면 가정적으로’라는 고지식함은, 이 나라 국민 90% 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뿌리 깊은 기독교 국가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저 간극에서 오는 양가적인 태도 자체가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문화적, 예술적, 역사적 용광로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지요.

거리로 나서니 어젯밤 그토록 북적였던 백 성모 마리아 성당 앞의 삼거리는 조용합니다. 레스토랑 몇 곳이 문을 열었지만 관광객 상대인 만큼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군요.

무어인의 건축을 헐고 기독교의 승리를 과시코자 화려하게 지어진 건축물로, 이슬람 양식과 기독교 양식의 혼합이 특징적인 건물입니다.
▲ 세계 3대 성당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세비야 대성당 무어인의 건축을 헐고 기독교의 승리를 과시코자 화려하게 지어진 건축물로, 이슬람 양식과 기독교 양식의 혼합이 특징적인 건물입니다.
ⓒ 이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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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거슬러 어슬렁어슬렁 걸어 올라가니 카테드랄이 보입니다. 장쾌합니다. 과연 세계에서 가장 큰 3대 성당 중 하나로 손꼽힐 만하군요. 아직은 성당도 문을 열지 않고 집시들조차 ‘출근’하기 전의 이른 시간.

저는 잠시 대성당 앞에 앉아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건축물을 감상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성당 건너편에 있는 알카사르 왕궁부터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알카사르는 다른 유적지에 비해 1시간 일찍 문을 열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 돌아봐야 하는 여행객들은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게 마련이지요.

세비야 시내구경의 출발점, 알카사르

회랑 벽을 장식하고 있는 태피스트리는 스페인 황금기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알카사르 회랑 회랑 벽을 장식하고 있는 태피스트리는 스페인 황금기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이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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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에는 아름답게 수놓은 태피스트리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금사, 은사로 갖은 기교를 부려 화려하게 장식한 태피스트리들은 분명 추운 겨울날 궁전 벽을 보온하고, 밋밋한 대리석 회랑을 화사하게 꾸미는 역할을 했겠지요.

그러나 그 태피스트리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참으로 경악스럽습니다. 식민지배로 신세계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황금을 통해 스페인이 강대국으로 부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니까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와 제국주의적 시각에 매우 민감한 한국 여행자가 보기에는 이런 역사가 오점으로 느껴질 것도 같은데, 스페인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자국 역사의 한 페이지이므로 감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더구나 지금도 스페인은 남미와 긴밀한 경제적 연관을 갖고 있고 쌍방 간에 교류가 원활하기 때문에, 어쨌거나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서로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제국주의 시절을 황금기로 찬양한 태피스트리가 옛 왕궁에 버젓이 걸려 있는, 이 도저한 제국주의적 행태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전시행정을 보고 있자니 이게 과연 지배국과 피지배국 간의 시선 차이인가 싶어 씁쓸했습니다.

한 번 이러한 의구심이 들고 나니, 도처의 모든 것에서 자문화 중심주의의 오만함이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알카사르라는 건축물은 스페인의 이러한 오만한 제국주의적 속성을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습니다.

도저한 제국주의의 시선, 알카사르가 품고 있는 오만함

알함브라가 수평적 여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면, 알카사르는 수직적 확장성이 강조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식으로 보자면 어딘가 이슬람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알함브라와는 다른 건축물이라는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이처럼 건축학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만, 이 이질감의 정체는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테셀레이션(tessellation: 반복무늬) 타일장식은 무어인 특유의 것이지만 여기서는 카스티야-일-레온 왕국의 문장을 담고 있어 기독교식 장식으로 변질돼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알카사르 왕궁 내부의 장식 테셀레이션(tessellation: 반복무늬) 타일장식은 무어인 특유의 것이지만 여기서는 카스티야-일-레온 왕국의 문장을 담고 있어 기독교식 장식으로 변질돼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이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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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궁은 원래 무어인들이 자신들의 왕궁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안달루시아가 기독교도들에게 정복된 이후, 잔혹왕이라 불리는 페드로 왕의 지시로 완공되었습니다.

페드로 왕은 정복된 땅에 남아 있던 이슬람인들을 기독교 건축물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슬람인들의 탁월한 기술이 섞여 들어가 탄생한 기독교 건축물은 후대에 무데하르(Mudejar: ‘잔류자’라는 뜻의 아랍어) 양식이라 불리게 됩니다.

무데하르는 스페인 건축사에 길이 남을 특징적인 양식이긴 하지만 또한 우스꽝스럽고 처연한 양식이기도 합니다. 충돌한 두 문화가 하나로 융화되지 못하고 어쩐지 양식과다로 흘러가버린 인상을 주거든요. 양식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억지로 개종시킨 무어인들을 끌고 와 기독교식 왕궁을 세우게 한 스페인 제국은 결국 그 오만함 때문에 나락에 빠지게 됩니다.

17세기 최강의 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렸던 세비야는 혹독한 이교도 말살정책으로 인해 남은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이 모두 아프리카로 빠져나가는 사태가 발생, 불과 수 년 사이에 세비야의 집값이 폭락하는 경제적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수리학적 지식이나 측량, 금융 등에 빼어났던 이들 두 민족 브레인들이 앞다투어 스페인을 떠났기 때문에 스페인은 기나긴 지적 빈곤에 시달려야 했고, 그토록 찬란했던 안달루시아는 오늘날까지도 스페인에서 가장 빈곤한 지방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데하르는 특징적인 양식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정련된 양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 알카사르 무데하르 양식을 보여주는 정원 장식 일부 무데하르는 특징적인 양식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정련된 양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 이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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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이 빠져나간 세비야는 결국 공황 상태에 빠져...

문화와 문화가 만나고 교류할 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를 통해서 충분히 입증이 가능합니다. 완벽한 자연스러움과 통일성이 느껴지는 알함브라에 비해 알카사르는 정원과 궁전이 따로 노는 인상을 줍니다. 이처럼 그라나다가 떠오르는 태양 같은 스페인의 영광을 보여준다면,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저물어가는 스페인의 몰락 이유를 보여줍니다.

정원을 빠져나가는 동안, 영국인 가이드가 영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독교는 이슬람에 빚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 알함브라와 이곳 알카사르를 보며 마땅히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목청껏 떠들어대는 것이 들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왕궁 복도에 걸린 태피스트리가 보여주는 기묘한 부조화를 생득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서양인은 근본적으로 어떤 점을 부끄러워해야 할지 모르리란 생각이 들어 기분이 까마득해졌습니다.

알카사르를 나온 뒤 세비야 성당을 둘러보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미겔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던지고 나오니 드디어 마드리드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절박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세비야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마드리드 행 버스표를 구입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곳의 복잡한 교통사정 때문입니다. 세비야는 그라나다, 론다, 말라가, 코르도바 행 버스가 출발하는 남부버스터미널과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북중부행 버스터미널이 각각 다른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해당 터미널이 아니면 상대쪽 버스시간표조차 구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각 버스터미널 사이의 거리는 대단히 멉니다.

하지만 제가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안달루시아의 주도(主都)답게 사통팔달한 세비야의 교통루트였습니다. 세비야에는 국내선 공항도 있을 뿐더러 스페인의 자랑거리인 국영철도 아베(Ave)도 뚫려 있습니다. 날개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아베철도의 상징대로, 열차를 타면 세비야에서 마드리드까지 2시간 30분만에 주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신만만했습니다. 훗, 세 시에 여유롭게 출발하면 마드리드에서 저녁 먹겠지.

주도답게 사통팔달한 교통, 그러나 통합교통체계 부재
여행자라면 반드시 교통예약이 필수

허나, 세비야 시내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두 곳이 모두 열차 시각표를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교통시스템에 대한 통합검색 체제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오가 지나자 돌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엄청난 돌풍이 도시 전체를 덮쳤습니다.

안달루시아를 떠나기 전에 이 유명한 편서풍의 위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으니,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라고 할 만한지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능히 강에 범선을 띄워 아메리카 대륙까지 보내버리고도 남을 편서풍과 싸워가며 철도역으로 갔습니다.

벌써 3시가 훌쩍 넘은 시간, 철도역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바글거립니다. 이른 시각의 열차는 모두 매진이었고, 3등 열차는 내일 것까지 만석이었습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금요일이었지.

할 수 없이 역을 나와 북부 버스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달렸습니다. 택시를 타자마자 계란만한 빗방울이 물폭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정말 편서풍 지대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기 그지없습니다.

낙천적인 안달루시안 택시기사 아저씨는 그 와중에도 “이건 쥬비아야.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선물이지”라고 찬탄합니다. 그 어감이 마음에 들어 몇 번 입으로 되뇌어 봤습니다. 과연, 그렇게 예쁜 이름이라면 좀 갑작스럽고 과격한 비여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비(雨)는 스페인어로 ‘유비아’. 하지만 안달루시아에서는 U를 J로 발음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유비아보다 ‘쥬비아’라는 발음이 더 예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역시 제가 안달루시아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 겁니다.

알카사르 왕궁의 정원 만큼은 무어인들이 처음 의도했던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왕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기도 합니다.
▲ 오렌지가 무성한 알카사르 정원 알카사르 왕궁의 정원 만큼은 무어인들이 처음 의도했던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왕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기도 합니다.
ⓒ 이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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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미널에서 마드리드 행 버스표를 구입하니 5시발 마드리드 행 버스가 딱 한 좌석 남아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버스 출발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습니다. 저는 1시간을 그냥 보내기 아까워, 미처 못 봤던 다른 관광지들을 둘러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버스터미널 락커에 캐리어를 넣어놓고, 비가 내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거리로 달려 나갔습니다. 어느새 이 미친 소나기도 빗줄기가 가늘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곧 그치겠군요.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태그:#배낭여행, #스페인, #세비야, #알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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