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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연중행사로 해를 넘기지 말고 뵈어야 할 분이 있다. 바로 내 작품을 뽑아 과찬해 주셨던 노(老)스승님. 선생님께서는 지난 5일 마침 대학로에서 점심 약속이 있다고, 그리로 나오라고 하신다. 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선생님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자 내게 축하주를 한 잔 사시겠단다. 내년에 있을 경사(?)를 미리 말씀드렸더니 당신이 사시겠다는 거다. 그러나 술을 마시기는 아직 이른 시간.

 

"선생님 술을 마시기는 너무 이르잖아요. 여긴 적당히 산책할 곳 없나요?" 했더니, 성곽길을 말씀하신다. "여기 성대 뒤쪽으로 가면 되는데, 내가 길을 확실히 몰라서." 하시면서.


"그러면 한 번 가 볼까요? 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거나 추우면 택시 타고 돌아오면 되잖아요."

 

선생님의 망설임에 나는 추임새를 넣었고, 용기백배한 우리 결국 길을 나섰다. 대학로를 빠져나와 길을 두 번 건너 오르막길을 걷는데 선생님이 자꾸 뒤를 돌아보신다. 잘못 왔나 싶어 점검하시는 것. 내가 앞에서 오는 학생을 기다렸다가 혜화문 위치를 물으니, 맞는다며 그냥 쭉 올라가면 된단다.

 

어떻게 혜화문 위치는 찾았는데, 성곽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엔 나이 드신 어르신께 물었다. 그런 길이야 원래 어르신들이 잘 다니시니까. 그런데 이분 길을 가르쳐 주시면서 영 못 미더워하는 눈치다. 한 시간쯤 걸린다면서. 선생님 걸음걸이가 불안해 보였는지 자꾸 선생님을 쳐다본다. 조금 뒤뚱거리시기는 하지만 연세에 비해 아주 잘 다니시는데.

 

앞으로 쭉 가다가 경신고등학교 뒤로 돌아가면 길이 나온다고, 성벽은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삼청동까지 쭉 이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완전 골목길이었고 주차에 대한 안내문은 있지만 성곽 길에 대한 안내문은 없었다. 긴가민가하면서 걷기를 10여 분. 드디어 경신고등학교를 찾아 뒷길을 접어들었다.

 

경신고등학교 뒷길을 빠져나오자 이번엔 번잡한 도로. 또 묻는다. 이번엔 배달 차례를 기다리는 배달원이다. 친절하게 손짓으로 가리키는 길에 안내문이 서 있다. 반갑게도 서울 성곽 길 안내문이다.

 

이제 반은 성공. 아직 울긋불긋한 단풍이 남아 있는 성곽 길로 접어든다. 찬 날씨인데 성곽길로 들어서자 의외로 포근하다.

 

"이 길로 쭉 가면 와룡공원이 나오지."
"와룡공원이요?"
"으응. 예전에 있었어."

 

50년(중학생 때부터) 넘게 서울에서 사셨으니 옛날 서울 길을 아시는 거다. 가파른 계단 길을 가다 보니 성곽 밑으로 벤치가 놓여 있다. 선생님은 그리고 가 앉으시며 쉬었다 가자고 하신다. 먼지 많은 서울 하늘 아래인데 벤치가 아주 깨끗하다. 선생님이 쉴 동안 나는 성벽에 붙어 사진을 찍는다.

 

"제가 사진만 찍어서 재미없지요?" 라고 말씀드리자. "아냐. 괜찮어" 하며 손을 내저으신다.

 

다시 일어나 걸어 올라가니 작은 쉼터가 기다리고 있다. 선생님은 또 깨끗하게 손질된 정자 아래로 가 앉으신다. 선생님은 숨을 고르고 나자 지난번 여행 갔다온 이야기를 하신다. 지인들과 화순을 가셨는데 아주 재미있었다고. 네 분이 차 한 대로 이동하셨는데 음식도 맛있고 좋았다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두 길이 나 있다. 가파른 계단 길과 옆으로 난 우회로다. 계단 길은 계속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이고, 우회로 길은 마을로 내려가는 길 같다. 마침 남자분이 있어서 물으니 자세히 설명해준다. 마을 길과 올라가는 길을. 그러다가 조금 힘에 부친 듯 선생님이 망설이는 것 같자, 그분 한마디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조기 위는 올라가 보시고 가셔야지요" 하면서 조금만 올라가면 되는데 거기에도 내려가는 길이 옆으로 나 있고, 내려가면 마을버스도 탈 수 있다고 설명해 준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 힘을 내서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성곽 너머는 오밀조밀한 동네가 있고, 반대쪽은 굵직굵직한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거대 도시 서울. 서울에 이렇게 한적한 산책로가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가파르긴 하지만 금방 쉼터가 나왔다.

 

그리고 거기가 바로 와룡공원이었다. 선생님은 다시 벤치를 찾아가 앉아 쉬고, 나는 성곽 안내문으로 가 자세히 읽는다. 이제부터는 성곽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군부대였다. 그 대신 산책로는 성곽 밑으로 나 있었다. 비포장도로 좁은 오솔길이었다. 나는 그 길로 눈길을 보내면서 다음엔 꼭 저 길을 걸어보리라 다짐하고 반대쪽 잘 닦여진 포장도로로 방향을 잡았다.

 

길옆으로 작은 약수터가 나오고, 구불구불 휘어져 돌아가는 커브길로 이어져 있다. 나는 옆으로 붙어서 잘 살피며 걷지만 선생님 때문에 불안하다. 다행히 10분쯤 걸으니 감사원 건물이 보이고 길옆에 작은 팻말이 붙어 있다. 취운정이라고. 자세히 읽으시던 선생님 덧붙여 말씀하신다. 이상화 시인도 그곳에서 2년간 살았다고.

 

그곳에서 택시를 기다려 타고 청진동으로 향했다. 커피가 1차였고, 성곽 길 산책이 2차였다면, 3차는 청진동 빈대떡 집이다. 우린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건배를 외쳤다. 오늘 산책길 아주 성공적이었다는 자축을 하면서.


태그:#서울 성곽, #와룡공원, #취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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