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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명동 농성을 시작으로 고등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당시의 고등학생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고등학생 시절 일찍이 세상에 대해 눈을 떴던 그들은 아직도 그 시대의 치열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20년 전의 경험은 늘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었다. 그 기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들은 늘 당시의 열정을 화두로 지금도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20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전성원, 당시 동북고 2학년] "비참했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농성 해산"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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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명동성당에서 고등학생들이 농성을 시작할 때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2차 지도부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당시 서고련은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될 경우 농성자 모두가 구속될 수 있다며 나름대로 각오를 한 상태였고,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2차 지도부도 함께 구축한다.

전성원씨에게 서고련은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지막 촛불시위를 마치고 농성을 해산하던 날, 눈발이 휘날린 거리를 즐기던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참 비참했다"고 말한다.

"민주화를 위해 그토록 외쳤건만 성탄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은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고, 쓸쓸하게 마무리되던 투쟁은 개인적으로 큰 상처로 남았다"는 것이다.

고교 졸업 후 전국을 떠돌며 막노동을 하던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아서' 93년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광고회사 등을 다니다가 이후 지역문화 운동의 꿈을 안고 <황해문화>에 들어갔다. "나의 현장을 찾는다는 마음으로 지역에서 풀뿌리 문화운동을 하려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은행에 돈 맡긴 사람들처럼 운동 전력을 내세우며 자기 알아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고등학생운동을 돌이켜보는 그의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진보운동세력이 많은 실책과 실망을 저질렀다고 보기에 '1987년의 어느 한 시절을 뜨겁게 보냈노라' 고백하기엔 낯뜨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87년 고등학생운동은 인생의 중요한 계기였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에 대한 빚진 마음이 남아있고 아직도 그 시대의 소명은 그의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80년대의 어느 한 시절을 나름 운동가로 보냈으며, 현재 역시 의미는 다소 다를지라도 여전히 스스로를 운동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영진, 당시 문일고 2학년] "그 때의 마음 지금도 유효하다"

배영진  무주 구천초등학교 교사
▲ 배영진 무주 구천초등학교 교사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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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당시의 일을 배영진씨는 일자별로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이 가물거리는 부분도 있지만 시기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덮여있던 당시의 상황을 모자이크 해내며 적절히 복원시켰다.

87~88년으로 이어지는 고등학생운동의 기억은 그의 삶에 잊혀지지 않을 추억이면서 삶의 이정표가 됐다. 그의 표현대로 "삶의 가치를 갖게 했고, 삶의 지향점과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게 했던 것이 고등학생 운동"이었다. 또한 그것은, 지금도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때의 마음이 현재도 유효"한 것이다.

푼돈 모아 유인물을 만들고, 스프레이로 펼침막을 만들고, 집에 모아놓은 우표들을 아낌없이 가져와 친구들에게 편지쓰기를 할 만큼 고등학생 시절 그들의 모습은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역사 앞에서 그리고 당시 처해있는 군부독재의 현실에서 제대로 된 시각을 갖고 올곧게 서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현장의 삶을 택한다. 노동자로 민중 속의 삶을 실천한 것은 당시 고등학생 운동을 했던 사람들 대다수가 선택한 길이었다. 고등학생 때의 의식이 단순히 관념이 아닌 실천을 담보하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늦게 군대에 갔다 온 후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99년 또래들보다 10년 늦게 교육대학에 들어갔고, 지금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참교육을 위해 애쓰고 있다. 민주교육을 싸웠던 고등학생 시절의 영향이 그의 진로를 결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87년 고등학생운동의 경험을 회고하며, 지금 청소년 운동에 나서고 있는 후배들에게 주고 싶은 당부라며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나이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한데, 내가 사용하지 못하면 고쳐라도 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삶 주변에 대한 관심 또한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경화, 당시 동명여고 1학년] "자살학우 추모제 하던 그 때, 그리고 지금"

정경화  민주노동당 고양시당 부위원장
▲ 정경화 민주노동당 고양시당 부위원장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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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읽은 책은 충격적이었다.

광주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진실을 밝힌 <권인숙 성고문 사건>, 전태일 평전인 <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를 찾게 만들었다.

고1에 진학하며 6월 항쟁의 열기가 휩쓸고 지나갈 무렵 사회 현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고등학생은 차츰 세상에 대한 눈을 떠가고, 88년 서고련을 만든 선배들과 만나며 고등학생운동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88년 최대규모의 고등학생 집회였던 자살 학우 추모제 때 사회자로 나섰고, 그해 11월 고등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준비한 대학로 학생의 날 행사 때는 500여명의 학생들 앞에서 당당히 집회를 이끌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명여고 '동지단' '한울타리' 등 학내조직들과 함께 전교조 교사들이 해직됐을 때 종이비행기 날리기 시위를 벌이며 학내 집회를 주도하는 등 그녀는 고1~고3 시절을 고등학생운동의 중심에서 보냈다. 

정경화씨에게 그 시절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기도 하다. 고등학생운동을 통해 "내 삶의 주인은 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고, "노동자로 살겠다는 결정을 하면서 행복하고 가장 기뻤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지금과 별 차이 없는 교육 현실은 안타까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자살 학우 추모제를 진행하면서 친구들 영정을 볼 때 가슴 아팠는데, 근 20년 동안 활동을 해왔음에도 아직도 진전이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 같아요. 20년 전과 달라진 게 없잖아요."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됐고, 학교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은 선명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회상하고 "올바르지 못한 것과 불편한 것에는 당연히 저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일준, 당시 마포고 2학년] "기술개발로 사회에 이바지하고파"

손일준  (주)신기술산업 기술이사
▲ 손일준 (주)신기술산업 기술이사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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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부정선거 시비가 일었던 구로구청 주변에서 농성을 벌이던 그가 경찰의 강제해산을 피해 명동에 들어온 것은 12월 18일 오후였다.

그렇게 서고련의 농성에 합류한 그는 24일까지 명동성당에 있었고, 이후 이어진 각종 시위 때마다 고등학생답지 않은(!) 선동능력을 발휘하며 대학생들을 무색게 만들었다. 적극적인 성격 탓에 집회 때마다 맨 앞에 앞장서 구호를 외치며 적극 참여했던 것.

88년 전두환 이순자 처벌을 촉구하는 시위 때 맨 앞에 있다가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입원했을 만큼 저돌적인 면이 있었다. 

손일준씨는 89년 전교조가 결성됐을 때, 전교조 학생사업국에 상근하며 교육운동을 지원한다. 그러다 다른 친구들처럼 현장에 들어갔고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이내 작은 사업을 시작하며 지금은 건축 자재 벤처기업의 기술이사를 맡고 있다.

순탄하지 않고 부침을 거듭했던 사업 탓에 많은 어려움도 겪었지만, 최근 기술개발에 성공하며 한결 여유를 찾았다고 한다. 해외주문이 많아 외국출장도 잦은 모습이다.

그는 "자그마한 부분이지만 기술개발을 통해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한다"며 "작은 벤처기업이지만 대기업에 기술종속 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주도해 나가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등학생운동의 경험과 당시의 친구들을 소중한 자산이자 삶의 정체성을 찾게 해 준 근원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기술개발과 사업을 통해 사회에 작은 역할을 하려는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무치게 그리운, 그리워할 내 벗이여! 동지여!"
빚진 마음을 안겨주고 떠나간 전운혁, 이창진


서고련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빠짐없이 언급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운혁과 이창진 두 사람이다. 이들은 87~88년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며, 동시에 많은 아쉬움과 함께 빚진 마음으로 남는 인물들이다. 2003년과 2005년 각각 불의의 사고와 심한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서른 중반에 짧은 생을 마감한 이 두 사람에게 대부분의 친구들이 갖고 있는 안타까움은 매우 컸다.

서고련 출범 당시 핵심역할을 맡았을 만큼 고등학생운동의 유능한 활동가였고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살려던 사람들이었기에, 지금도 이들을 회상할 때마다 눈물짓게 된다고 한다.  한 친구는 이를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고 전운혁, 당시 서초고 2학년] 명동에서 영화판으로 다재다능한 인재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일본영화 100> 영화평론가였던 전운혁씨가 작고하기 전 펴낸 일본영화 전문 서적이다.
▲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일본영화 100> 영화평론가였던 전운혁씨가 작고하기 전 펴낸 일본영화 전문 서적이다.
ⓒ 삼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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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혁은 서초고 출신으로 서고련 출범 당시 3인 지도부 중의 한 명 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서고련 의장으로 불렸다. 87년 4월 교육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징계를 당하기도 했고 명동 농성준비와 이후 벌어진 고등학생들의 각종 집회에서 그는 늘 앞에 있었다.

고등학생운동의 성장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았으며 이후 운동단체에서 활동을 벌이면서 독재정권과의 대결이 있던 현장에는 어느 곳이든 달려가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제도교육 아래서는 그의 다양한 재능이 묻혔지만 문화적 소양이 깊었던 전운혁은 99년 이후 문화계 쪽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가 많은 관심을 두고 있던 영화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문필가로서 그리고 영화평론가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푸른나무' 무크 동인으로 활동했고, 여러 전문 주간지에서 문화담당 기자를 거쳤으며, 하이텔 매거진 <넷와이더> 편집장, 엠파스 콘텐츠(시티스케이프, 시네마플라자 등) 총팀장, 영화 인터넷 매거진 <시네버스> 편집장 등 영화와 관련된 그의 활동은 왕성했다.  

<푸른나무-우리들의 이야기>(푸른나무, 공저), 편역서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책갈피), 일본영화 전문 안내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일본영화 100>(삼진기획)등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펴낸 책들이다. <조용원의 일본 시네마천국>을 진행하면서 일본영화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그는 이후 수많은 일본 감독들과의 직접 인터뷰 등을 통해 일본영화를 알리며, 일본영화 전문가로서 그 위치를 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의의 사고만 없었다면, 지금쯤 자기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을 인재였기에, 그를 아쉬워하는 마음은 그래서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고 이창진, 당시 신일고 2학년] "이생의 삶이 더이상 의미없다 느낄 때"

신일고 문예반 반장이었던 이창진은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 소년이었다. 침착하면서도 리더십이 뛰어났던 그를 많은 친구들은 신뢰했고, 늘 겸손하게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그를 처음 본 사람도 호감을 갖게 만들었다.

서울시내 고등학교 문예반끼리의 백일장을 주관한 것도 그였고, 문화단체와 연관을 맺거나 다른 학교나 단체에 있던 친구들을 보듬던 것도 그의 몫이었다.

또한, 집회나 행사 때마다 그는 진지함과 안정감을 보여주며 친구들을 잘 아우르고 있었다. 88년 고등학생 집회 당시 연극공연에서 그의 배역은 친절하면서도 학생들을 아끼는 교사역할이었다. 성숙한 모습으로 차분한 성격의 이창진만이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는 배역이었던 것이다.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에서 활동했던 정경화씨는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홍대에서의 자살 학우 추모제 때였어요. 당일 사회를 보기로 한 분이 집에서 알고 막는 바람에 못 온 거예요. 행사시작 30분을 남기고 창진 선배가 갑자기 저를 부르더니 손을 꼭 잡고서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경화야! 네가 사회를 맡아줘야겠다' 급작스럽게 사회를 맡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마치 창진 선배의 목소리에 홀린 기분이 드는 게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네 그럴게요’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생운동을 마무리한 후 노동현장에 들어간 그는 인천에서 오랜 시간 현장활동을 하며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앓게 된 심한 우울증은 그를 힘들게 만든다. 그 소식을 알게 된 친구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써보지만 안타깝게도 2005년 7월 그는 세상의 끈을 놓아 버린다.

우울증 증세가 있던 2003년 그는 한 글에서 고등학생운동을 이렇게 회상했다.

"87년, 우리는 분명 우리 시대를 살았고, 주어진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껴안고 씨름했지요.누가 알아주든 안알아주든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민중을 사랑했을뿐이니까요. 역사의 진실은 후세대들이 전하는 것이지 우리의 몫은 아닐껍니다. 다만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습니다. 그 삶이 진리를 향한 삶, 노동하는 다수 대중의 이해를 전취해 내는 삶이길 소원합니다."

또한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지금도 전 저의 이생의 삶이 더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몸을 던져버릴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작게 평가하고 살아가지는 않지요. 우리의 생명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요. 어쨌든 지금은 살아있다는 것이 눈물 나도록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전성원씨는 친구 이창진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이렇게 작별했다.

벗이여! 이 땅에 살기 위하여, 그 누구보다 노력했던 나의 사랑하는 벗이여!
잘 가거라, 나의 87년이여!
잘 가거라, 내 어린 날의 열망이여!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리운, 그리워 할 내 벗이여! 동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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