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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화동 소재 이승만 기념관인 이화장의 마당에 있는 이승만 동상. 꽃바구니 옆에 있는 석판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본문에서 이 글귀가 다시 언급될 것이다.
 서울 이화동 소재 이승만 기념관인 이화장의 마당에 있는 이승만 동상. 꽃바구니 옆에 있는 석판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본문에서 이 글귀가 다시 언급될 것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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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이 11월 30일 발간된 계간 <시대정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노무현 두 전·현직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4사5입 개헌 이후 주변에서 잘못했으나 나라를 건국한 ‘국부’로서 현실적 지도자였다”며 치켜세웠다.

자유당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인터뷰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아직도 일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부’로 존재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이승만이라는 존재는, 한편으로는 4월혁명의 물결 속에 하와이로 떠밀려간 망명객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은 과연 국부인가? 그는 과연 중국의 손문 같은 국부라 할 수 있을까? 중화민국의 ‘민국’을 연상시키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과연 중화민국 초대 임시대총통인 손문 같은 국부라 할 수 있을까?

▲중화민국-대한민국 ▲중국 국부-한국 국부라는 대응구조가 일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인식구조의 타당성 여부를 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국부 손문처럼 이승만도 국부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를 판단하려면, 손문이 중국에서 어떤 이유로 국부 소리를 듣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대략적으로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베이징의 송경령고거(故居)에 있는 손문 부부의 사진.
 중국 베이징의 송경령고거(故居)에 있는 손문 부부의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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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중국인들이 손문을 국부로 숭상하는 것은 그가 봉건제도를 혁파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전문에서는 “이십세기에 중국에서는 하늘을 뒤엎고 땅을 뒤집는 위대한 역사적 변혁이 발생했다”면서 “1911년에 손중산(손문, 인용자 주) 선생이 영도하는 신해혁명은 봉건전제를 폐지하고 중화민국을 창립하였다”라고 하였다.

중국인들이 헌법에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손문을 칭송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봉건전제제도를 혁파한 신해혁명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족들에게는 손문의 혁명을 계기로 권력이 만주족에서 한족으로 옮겨졌다는 점도 중요할 것이다.

물론 중화민국 창립에 참여한 것도 그의 주요 업적이기는 하지만, 그 점은 오늘날의 중국인들에게 ‘손문을 존경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륙에서는 중화민국 그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만에서는 기존의 중화민국 대신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화민국이라는 나라가 현대 중국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중국인들이 손문을 국부로 숭상하는 것은 그가 좌우의 대립을 통합할 만한 역량을 보유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손문이 대륙과 대만에서 모두, 그리고 공산당과 국민당에게서 모두 존경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손문 생전에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갈등이 잠복해 있다가, 손문이 죽은 뒤인 1927년에 장개석(장제스)이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손문은 으르렁대는 두 아들의 싸움을 억제할 만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손문에게는 좌우의 대립을 억제할 만한 ‘아버지’로서의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이다.

손문이 중국인들로부터 국부로 존경을 받는 것은 위와 같이 봉건전제제도를 타파한 ‘혁명가’인 동시에 좌우의 대립을 억제하고 통합을 가능케 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당 중국이나 국민당 대만의 어느 한 쪽에 국한되지 않는, 초월적인 통합의 지도자였다. 

그에 비해 이승만은 어떠한가? 자세히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승만은 한국에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준 인물이 아닌 데다가 통합은커녕 남북분단에 중대한 책임을 진 사람이기도 하다.

손문은 국·공 분열 이전의 중화민국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지만, 이승만은 한민족이 분열된 상태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에 올랐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라는 점에서는 손문을 닮았을지 모르지만, 전체가 아닌 부분의 대통령에 불과했다는 점에서는 손문과는 분명히 다른 인물이었다.

1953년 11월 대만에서 만난 이승만과 장개석(왼쪽 두 번째)
 1953년 11월 대만에서 만난 이승만과 장개석(왼쪽 두 번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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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손문을 국부로서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가 초대 임시대총통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좌우 대립 이전의 통일국가의 초대 임시대총통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한국의 이승만은 중국의 손문에 비견될 만한 국부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손문의 업적에도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승만을 손문에 비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이승만은 손문보다는 장개석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손문에게서는 통합의 이미지가 느껴지지만, 이승만에게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승만에게서 느낄 수 있는 확실한 이미지는 분열 혹은 분단의 주범이라는 점이다. 두 아들의 싸움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어느 한쪽을 편드는 사람에게서 과연 ‘아버지’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을까?

그래서 이승만은 한국의 국부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이나 미국의 국부들은 결코 기존의 나라를 분열시키는 전제에서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그들이 자기 후손들에게서 존경받는 것은 그들이 ‘온전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승만 동상 밑에 있는 석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쓰여 있다.
 이승만 동상 밑에 있는 석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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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승만이 세운 나라는 그런 ‘온전한 나라’가 아니었다. 사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화장에 있는 이승만의 동상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지만 이승만 그 자신은 한민족을 뭉치게 한 게 아니라 도리어 흩어지게 한 존재였다.

단지 초대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국부로 떠받들고 싶다면, 국부(國父) 대신 국부(局父)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전체가 아닌 일부에 국한(局限)된 지도자라는 의미에서 국부라고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태그:#이승만, #국부, #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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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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