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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며칠 전 우리나라 해안도로를 타고 80일(5830리)간의 자전거 전국일주를 마쳤다. 의정부를 출발해 설악산 미시령을 넘어 동해안과 남해안을 지나 추자도와 제주도를 일주하고 서해안을 타고 다시 의정부로 돌아왔다. 그 여행길에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것을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제주도에서의 인연들이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다.

완도를 출발한 배는 추자도를 거쳐 5시간 후면 이어도의 꿈을 안은 제주도에 도착한다. 추자도를 안 거치면 3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나는 오래전부터 낚시꾼들의 꿈의 고향인 추자도에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아마도 나는 바다 가운데 외로이 떠있는 섬에서 해식동굴(海蝕洞)처럼 닳고 또 닳은 바위들과 오직 바다에만 의지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바다사람들의 애환을 더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추자도를 자전거로 일주하고 다음날 제주도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동문재래시장으로 가서 백설처럼 투명한 살을 가진 한치 몇 마리를 샀다.

한 여름, 제주 해변은 어디를 가나 아름다웠으며 어느 곳에서 여장을 풀어도 잠깐은 쉴 수 있는 그런 공간들이 많았다. 한치를 썰어 막걸리를 한 잔 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술 한 잔은 그 여행의 맛을 훨씬 더 배가 시켜준다. 특히나 혼자 하는 여행지에서는 더 말해서 무얼하랴. 벌써 수평선이 내 얼굴처럼 붉어오기 시작하였다.
시장 풍경, 한치
▲ 제주 동문시장 시장 풍경, 한치
ⓒ 윤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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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주가 세계 자연유산으로 선정되었는데 그곳은 한라산, 성산 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뱅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이다. 우리나라 '세계문화유산'으로는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등 7곳이 있는데,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일본 등 이웃나라들에서도 자못 관심이 크다고 한다. 특히 자연유산으로는 에베레스트산, 그랜드 캐년,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섬 등이 유명한데 일본은 3곳, 중국은 5곳이며 전세계적으로 162곳이 '세계자연유산'으로지정되어 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제주. 특히 몇 번 와서 보기도 하였지만, 24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샅샅이 들어가 본 제주의 속살은 어느 한 곳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파도가 바로 발밑에서 철썩거리는 제주 해변을 따라 달리다가 책갈피 속에나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은 호젓한 여행지 한 군데 발견했다. 서귀포 여고를 잠깐 지나면 돌비석처럼 세워진 곳에 '돔베낭골'이라는 팻말이 하나 있는데, 아마도 차 속도를 올리고 지나간다면 못보고 지나치기가 쉬울 것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약 5분여 정도 내려가면 바로 바닷가 절벽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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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경승지, 돔베낭골 .
ⓒ 윤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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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라보니 범섬이 안개에 쌓여 바다로 막 나가려는 거대한 콘테이너배처럼 떠 있었다. 여름날 망연히 바라보는 제주바다는 어디가 하늘이고 또 어디가 바다인지... 가물가물 떠있는 수평선만 여행자의 마음을 한없이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닷가를 따라 한없이 이어진 그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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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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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상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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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계단이 하나 나타나 자전거를 들고 낑낑거리고 올라서니 야자수 군락이 나타났고 절벽 쪽으로는 소나무들도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길가에 자판기가 하나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노상카페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배낭을 풀고 차 한 잔을 마시는데 그 차맛 또한 일품이라. 군데군데 신혼부부인 듯한 연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으며,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한가하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금방 바다에 잠길듯한 여 하나가 위태롭게 놓여 하얀 파도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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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태로운 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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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돌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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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끌고 쉬엄쉬엄 걷다보니 외돌개가 나타났다. 단체 여행객인 듯한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있었으며 이곳에서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도 촬영했다는 팻말도 있었다. 외돌개를 찍기 적당한 장소에 만들어 놓은 난간은 사람들로 붐비고 고양이들도 덩달아 왔다 갔다 했다. 1132국도로 올라가는 마지막 구간에 계단이 하나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온갖 들꽃들이 만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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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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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레옥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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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으로 한 5분 정도 가면 'SGI 한·일 우호 연수원'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 제주도 길에서 몇몇 사람이 이 장소를 꼭 가보라고 추천하였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에 하나를 볼 수 있으며, 옛날에는 이곳이 프린스 호텔이었다고 하였다.

아담하게 놓여있는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자 빨래 몇 장이 바람에 흩날리며 남국의 햇볕 아래서 마르고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큼직한 종려나무 한 그루가 여행자를 가장 먼저 반겼다. 그리고 그 위로 이국적인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그 옆으로는 잘 단장된 호수가 있어 다가가보니 한쪽 편에 조각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고르, 페트라르카, 워즈워드 시인들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며, 세계 계관시인이라고 하는 이께다 회장의 시도 새겨져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호수 안에는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이 저마다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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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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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와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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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계관시인 이께다 선생 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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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즈워드 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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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라보니 새섬, 문섬, 숲섬(섶섬) 등이 화반(花盤)처럼 곱게 떠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만다라의 바다에 뜬 숲정이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다시 수십 종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여기에 온 값어치는 충분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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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그 안에는 새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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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제주 바다는 아이들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붉어져 오기 시작하였으며, 나는 부장님의 배려로 그곳 연수원에서 하루의 여장을 풀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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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평화를 염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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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나는 서귀포에서 유명한 보목포구에 있는 '해녀의 집'으로 제주 특산물인 자리돔과 한치 물회를 먹으러 갔다. 특히 이곳에선 해녀들이 직접 물로 들어가 잡아온 것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여행자를 더욱 흥분시켰다. 그곳으로 가는 차안에서 연수도장의 여직원은 나에게 제주에 와서는 절대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제주에서는 돈을 빌리면, '가파도 좋고 마라도 좋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것은 지명에서 나오는 유머 같았다. 바닷가 초지에는 말들이 매여 있었고, 하늘을 향해 나팔을 불 듯한 갯메꽃들까지 피어있어 더한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갯메꽃 - 송수권
채석강에 와서 세월 따라 살며/좋은 그리움 하나는 늘 숨겨놓고 살지/수평선 위에 눈썹 같이 걸리는 희미한 낮달 하나/어느 날은 떴다 지다 말다가/이승의 꿈 속에서 피었다 지듯이/평생 사무친 그리움 하나는/바람 파도 끝머리 숨겨놓고 살지//때로는 모래밭에 나와/네 이름 목 터지게 부르다/메마른 줄기 끝 갯메꽃 한 송이로 피어/딸랑딸랑 서러운 종 줄을 흔들기도 하지//어느 날 빈 자리/너도 와서 한번 목 터지게 불러 봐,/내가 꾸다꾸다 못 다 꾼 꿈/이 바닷가 썩돌 밑을 파 봐./거기 해묵은 얼레달 하나 들어 있을 거야/부디 너도 좋은 그리움 하나/거기 묻어놓고 가기를


얼음이 가득 든 큼직한 그릇에 담겨 나온 자리돔회는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했다. 거기에다가 파도가 칠 때마다 넘어오는 하얀 물보라와 해안 절벽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것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에피타이저였다.

그리고 제주 여행을 하면서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음식으로 '겡이죽'이 있는데, 뭍에 그 맛이 특히 독특하다. SBS <올인>의 촬영지로 유명한 섭지코지를 돌아 내려가다가 보면 신양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해녀의 집'이 나온다. 여기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수더분하게 생기신 아주머니가 친절하시기까지 하니 얼마나 맛이 더한지.

혹시라도 비라도 내리면서 안개까지 쌓인다면, 그때는 바로 앞바다에 떠있는 성산포가 선경(仙境)이다. 이 겡이죽은 게딱지를 갈아서 만든 것이다. 요즘에는 키토산이 유행하여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일부러 그것을 사서 먹이기까지 하는데, 게딱지에는 키토산이 많이 함유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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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섬 가는 길 .
ⓒ 윤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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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24일 동안 제주바다를 맴도는 갈매기처럼 떠돌았다. 떠나오는 길에 방파제를 보니 그 끝에는 빨간 등대 하나가 얹혀 뭍 쪽을 향하여 뻗어 있었는데, 그 방파제는 마치 육지로 나가고자 하는 섬사람들의 혜원처럼 파도만 애돌고 있었다. 방파제는 바다 속으로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었으며 하얀 파도는 그 속살을 빠드득빠드득 씻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그 파도 위로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메모지를 꺼냈다.

태양이 바다로 떨어지는 마을/섬의 새벽은 파도소리와 함께 감겨온다/지난 밤 달빛에 끌려갔던 섬이/치맛자락을 끄을며 돌아오는 새벽/들고나는 바다가 그들에게는 일상의 시간표다//바다보다 더 부지런한 할머니/해안로를 따라가는 그 등이/파도처럼 굽어있다/방게 몇 마리가 그 뒤를 따라간다//바다마을 사람들은 자신만의 바다가 있다/통발 속에서 펄떡거리는 바다 생명들//제가 품은 생명을 내어주는 바다/그것을 헤아리는 것은 바다사람들의 몫/범섬이 연시처럼 걸려 흔들린다//주상절리 절벽 위/누군가의 절개 같은 裸木 한 그루/스스로를 살찌우지도, 키우지도 않고/세월 속에 스스로를 삭히는 朱木//햇볕 물러난 자리에 바람이 불어온다/바람의 결대로 흔들리는 것이 나의 순리/바람도 멈추고 인적도 품어버린 보목포구가/바다에 길을 내어준다/잠시 유보된 삶 속에/하루에 두 번씩 바다는 맨살을 드러낸다//콘크리트가 키워낸 내 마음 속에도/바다 하나를 담고 돌아선다/뱃전으로 올라오는 투명한 살결들/그 바다 위로 황금빛이 몸을 눕힌다/서쪽하늘과 바다사이에 햇볕은 길을 내고/장대처럼 길게 누운 그림자 하나/노을 속에 서 있다 - 윤재훈, 보목포구에서

배에 오르니 바다에는 안개가 잔뜩 끼여 있었다. 어디가 육지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지상이 있기나 한 것인지, 내가 지금 이 지구라는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는 것인지, 배 한 척만 아득하게 바다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 기사



태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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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여 세계오지 배낭여행을 했으며, 한강 1,300리 도보여행, 섬진강 530리 도보여행 및 한탄강과 폐사지 등을 걸었습니다. 이후 80일 동안 5,830리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였습니다. 전주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를 쓰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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