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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 한강에 나부끼는 깃발. 사진은 특정사실과 무관한 재연장면입니다.
▲ 군기. 한강에 나부끼는 깃발. 사진은 특정사실과 무관한 재연장면입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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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통사로, 참찬 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로, 사인(舍人) 오선경과 군자정(軍資正) 곽존중을 도통사 종사관(都統使從事官)으로, 사직(司直) 정간과 김윤수를 도절제사 진무(都節制使鎭撫)로 임명했다. 오늘날의 전시내각이다.

상왕은 장천군(長川君)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고 중군을 거느리게 했다. 실질적인 전투사령관이다. 우박·이숙묘·황상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이순몽을 우군 절제사로 삼았다. 전술부대장이다.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00척과 하번 갑사(下番甲士), 별패(別牌), 시위패(侍衛牌) 및 수성군 영속(守城軍營屬)은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라고 명했다. 국가적인 총동원령이다. 전열을 정비한 태종은 교유했다. 오늘날의 대국민 성명이다.

"병력을 기울여서 무력을 행하는 것은 성현이 경계한 것이요, 죄 있는 이를 다스리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으로서 부득이한 일이다.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궁벽하게 막혀 있고 좁고 누추하여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행하고 있으니 눈뜨고 보아줄 수 없다.

음흉하고 탐욕 많은 버릇이 더욱 방자하여 병자년에는 동래 병선 20여 척을 노략하고 군사를 살해하였으며 내가 대통을 이어 즉위한 이후, 병술년에는 전라도에, 무자년에는 충청도에 들어와서 운수하는 물품을 빼앗고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를 죽이기까지 하니 그 포학함이 심하도다.

비인포에 몰래 들어와 노략질하고 인민을 죽인 것이 거의 3백이 넘고 배를 불사르며 우리 장사(將士)를 해쳤다. 서해에 떠서 평안도까지 이르러 우리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며 장차 명나라 지경까지 범하고자 하니 그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여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게 함이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왜구가 탐독(貪毒)한 행동으로 뭇 백성을 학살하여 천벌을 자청하여도 용납하고 토벌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장수를 보내 출병하여 그 죄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신민들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버리고 생령을 수화(水火)에서 건지고자 하니 나의 뜻을 일반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노라."

두모포, 두무개 가는 도로 표지판은 있지만 군항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 두모포, 두무개 가는 도로 표지판은 있지만 군항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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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세종을 대동하고 두모포(豆毛浦)에 거둥했다.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하는 장수들을 환송하기 위해서다. 한강과 중랑천의 두 물줄기가 합류한다 하여 ‘두무개’라 불리는 두모포는 오늘날의 옥수동으로 풍광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응봉산 깊숙이 들어온 물길은 천혜의 수군기지였다. 강원도에서 뗏목으로 운반한 목재로 함선을 건조하여 한강에 나아가 실전과 같은 시험을 했다.

백사정(白沙亭)에 상왕 태종과 임금 세종이 좌정했다. 멀리 남한산과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한강에는 저자도가 그림처럼 떠 있다. 태종은 환관 최한으로 하여금 삼군도통사 유정현에게 술을 치게 했다.

"신하가 군무(軍務)를 띠고 적진에 나갈 제 임금이 꿇어앉아 수레바퀴를 밀어 주며 '왕의 적을 근심하는 마음을 대신하기를 신하가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호위하는 것과 같이 한다' 하였다."

태종은 삼도도통사 유정현에게 부월(鈇鉞)을 내려 주었다. 군 통수권자로서 모든 권한을 준다는 뜻이다. 세종은 임금으로서 전립(戰笠)과 군화를 내렸다.

"조그마한 왜 나라가 섬나라에 있으면서 화심(禍心)을 가슴 속에 품고 벌처럼 덤비고 개미처럼 우글거려 상국을 능멸하였도다. 지나간 경인년부터 우리나라 국경과 해안을 제멋대로 침략하여 우리 사민들을 죽였으니 고아과처(孤兒寡妻)들의 원망으로 화기가 상하고 지사(志士)와 백성들은 마음이 썩고 이가 갈렸던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개국하신 이래로 저자들이 겉으로는 신(臣)인 체하고 정성껏 화친하기를 구하는지라 나도 또한 모르는 중에 끌려서 놈들이 올 때에는 예를 갖춰 맞았으며 돌아갈 때는 선물을 주어 대접했다. 이제 은혜를 잊고 덕을 배반하여 가만히 변방에 들어와서 배를 불사르고 군사를 죽이니 토죄(討罪)의 형벌을 어찌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경의 충의로운 천성을 내가 가상히 여겨 경에게 절월(節鉞)을 주어 바다의 도적들을 섬멸하게 하는 것이니 5도의 수륙 대소 군민관(軍民官)과 도체찰사 이하를 경이 다 통솔하되 상과 벌로써 명을 받드는 자와 받지 아니하는 자에 쓰라."

이어 이종무장군과 여러 장수들에게 술을 치게 하고 장수에게 활과 화살을 주었다.

"명하는 대로 다하면 조상에게까지 상을 줄 것이고 명하는 대로 반드시 못하면 사(社)에서 죽일 것이니 예로부터 상벌이 이와 같다. 여러 장수들은 군사들에게 알려서 각기 마음과 힘을 다하게 하라."

둥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군졸들의 함성이 두모포를 진동했다. 명령만 있으면 대마도가 아니라 혼슈(本州)를 정벌할 태세다. 환송식을 끝낸 정벌군의 함선이 한강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한강을 꽉 채운 200여 척의 함선이 장관이었다. 한강이 물줄기를 흘러 내린 이래 최초이자 마지막 대규모 군사의 이동이었다.

적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병법이다

대마도 정벌군을 출동시킨 태종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했다. 도체찰사 이종무에게 명하여 대마도에 사람을 보내어 글을 대마도 수호(守護)에게 전달하라 일렀다. ‘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은 차선이고 적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다 ’고 손자는 모공편에서 말했다. 강온양면작전이다.

"의(義)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자는 자손에게까지 후하게 하려니와 은혜를 배반하고 들어와 도적질한 자는 처와 자식까지도 아울러 죽일 것이니 이것은 천리의 당연한 바요 왕자(王者)의 대법(大法)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더불어 물 하나를 서로 바라보며 우리의 품안(撫育)에 있는 것이거늘 어찌 우리의 변경을 침략하고 군민을 죽이며 가옥들을 불사르고 재산을 빼앗아 가는가? 이는 은혜를 잊고 의를 배반하며 천도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수호의 선부(先父)는 조선 왕실을 정성껏 섬겨서 내 이를 심히 아름답게 여겼더니 이제는 다 그만이로다. 이제 군대를 발하여 투항한 자들은 죽이지 말고 잡아 오라고 했다. 수호는 적당(賊黨)으로 섬에 있는 자들은 모조리 쓸어 보내어 한 놈도 남기지 말지어다. 선부(先父)가 정성을 다하여 바치던 뜻을 이어 성의를 다하면 너의 섬의 복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면 뒷날에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호는 잘 생각하여라."

대마도 정벌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고려 공양왕 1년(1389년) 2월에 박위가 10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였으며 태조 5년에도 김사형이 오도병마사(五道兵馬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 있다. 허나 세종조의 태종의 대마도 정벌은 격이 달랐다.

명나라와 왜국, 그리고 조선이라는 동북아 삼각 구도 속에서 회심의 일격을 가한 정치행위였다. 명나라에는 만만치 않은 조선을 보여 주었고 일본에는 무서운 조선을 각인시켜 주었다.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받아들인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무로마찌 시대가 막을 내리고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등장할 때까지 조선을 넘보지 못했다. 대마도 정벌을 기점으로 150년간 바짝 엎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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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