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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성 첸동난묘족동족자치주는 중국의 오지 중 오지다. 자신들을 동이족의 한 갈래로 믿고 있는 묘족은 지금도 치우천황을 조상신으로 숭배하며 '아시아의 집시'로 불리는 민족이다. 동족은 오지 산골에 거주하면서 지금도 고대의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민족문화의 활화석으로 불리는 첸동난자치구에서 우리 한민족과 유사한 민속풍습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소수민족 묘족과 동족의 생생한 문화와 풍습, 끈끈한 삶과 생활의 현장을 7차례에 걸쳐 현지 르포로 전한다. <편집자주>

"우리 동족의 인생사는 고루와 떨어질 수 없지요."

 

깊은 골짜기에 수백여 채 펼쳐진 목조 주택들, 주택가 가운데를 흐르는 맑고 깨끗한 개천, 사극 영화의 세트장 같은 마을 곳곳에 우뚝 솟은 고루들….

 

한 고루 앞 풍우교에서 옆집 노인과 얘기를 나누던 루원리(67)는 동족에게 고루가 어떤 의미인지 전해준다. 루는 "동족이 사는 마을 중앙에 반드시 고루가 있다"면서 "고루는 마을 사람들의 회합장소이자 문화공연이 벌어지고 휴식공간으로도 중요한 곳"이라고 말했다.

 

중국 구이저우성 첸동난묘족동족 자치주 리핑현 자오싱진. 구이저우 수도인 구이양에서 자동차로 11시간여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자오싱은 '동족 건축예술의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자오싱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다. 구이양에서는 자오싱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 먼저 총장이나 리핑으로 가야 한다. 그 사이 펼쳐지는 구이저우의 산하는 아름답지만,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을 타고 가는 고역을 감내해야 한다. 총강·리핑현청에서 각각 자오싱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단 두 대. 그마저 발차 시간이 불규칙하거나 취소되기 일쑤다.

 

굽이굽이 산길따라 11시간 달려서 닿은 '박물관'

 

끝없이 펼쳐지는 다랑논과 수없이 많은 소수민족 마을을 거쳐 닿은 자오싱은 겉모습만 보아서는 여느 동족마을과 다를 바 없다. 자오싱이 동족을 대표하는 집단촌락으로 인식되는 것은 고루 때문이다.

 

수백여 채의 오래된 목조 건물과 곳곳에 자리 잡은, 탑 같기도 하고 망루 같기도 한 고루는 자오싱에만 다섯 개나 있다. 게다가 리핑현은 중국 최대의 동족 거주지로, 동족은 전체 현인구의 71%를 차지하고 있다. 고루는 리핑 내에만 300여 개가 있는데, 그 수가 중국에서 가장 많고 다섯 개의 고루가 있는 마을은 자오싱이 유일하다.

 

자오싱은 '동족대가'로도 유명하다. 동족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민족의 역사·문화·풍속·정서 등을 노래에 담아 이어왔다. 동족대가는 자연의 소리를 다양한 음색에 담아 표현하는데, 목소리의 유연한 떨림과 청아한 고음 처리가 일품이다.

 

동족은 자식이 태어나면 어머니가 아기에게 자장가처럼 동족대가를 들려주고, 아이들은 말과 함께 노래를 배운다. 자오싱은 총장현 샤오황과 더불어 동족대가의 전승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마을이 생기면 먼저 고루부터 세운다'

 

2005년 현재 자오싱은 주변 향촌까지 포함해 750여 가구, 4600여명이 사는 제법 큰 농촌마을이다. 오늘날 자오싱을 '동족제일촌'으로 규정짓게 한 고루는 1982년부터 1984년 사이 중건된 것이다.

 

수백여 년 전 세워져 자오싱과 억겁의 세월을 함께 했던 고루는 1966년 문화대혁명 발발 후 외지에서 온 홍위병들의 방화로 파괴됐다. 문혁의 광란이 끝난 뒤 자오싱 주민들은 폐허 위에 다시 고루를 지었고, 첫 번째로 1982년 16개의 축대를 박아 즈자이 고루를 복원했다.

 

동족이 고루를 지은 것은 언제부터일까? 중국 역사문헌을 살펴보면, 18세기 초 청나라 옹정제 때 '동족은 마을 중앙에 거대한 목재를 땅에 박아 수십m 높이의 고루를 세운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오랜 세월 동안 동족 거주지에는 중국 봉건왕조의 직접통치가 미치지 못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고루를 만들기 시작한 유래는 그보다 훨씬 오래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대로 내려져 오는 동족 고사에는 '마을이 생기면 먼저 고루부터 세운다'는 말이 있는 정도다.

 

동족은 예부터 같은 성씨의 촌락 집단을 구성해서 발전해왔다. 오늘날 많게는 수백 가구에서 적게는 20~30가구까지 늘어난 동족 마을 가운데에는 우뚝 솟은 고루가 있기 마련이다.

 

고루는 성씨 집단마다 하나씩 건립하여, 한 마을에 큰 성씨가 둘 있으면 고루도 2개, 셋 있으면 3개 하는 식이다. 한 마을에 주요 성씨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고루의 숫자도 달라진다. 다섯 개의 고루가 있는 자오싱에는 실제로 런·이·리·즈·신으로 나뉘는 다섯 성씨의 촌락 집단이 존재한다.

 

고루의 건축 양식은 대동소이해서 보통 사각형 모양에 높이는 20~30m, 10~14층 구조로 되어 있다. 고루에 사용되는 나무는 삼나무로, 웬만한 지진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도가 단단하다. 고루의 중심은 넓고 평평한데, 중앙에 돌로 만든 불도가니가 있어 겨울에도 주민들의 사랑채와 같은 구실을 한다.

 

고루의 가장 윗부분은 처마의 선을 한껏 살려 천년학의 비상을 연상케 하는데, 마을에 길복이 깃들고 영원히 평안하기를 표현한 것이다. 고루 건축에서 특이한 것은 짓는 과정에서 단 하나의 못도 쓰지 않는 점이다. 또한 고루의 단청에는 동족의 생활풍속·종교의식·자연풍경·동식물형상 등을 그려놓아 한껏 멋을 부렸다.

 

 

마을 회합장소이자 대외 통신수단 기능까지 수행하던 고루

 

본래 중국에서 국보 문화재급 고루가 있는 마을로는 총장현 정충이 손꼽힌다. 정충에는 1672년 청나라 강희제 때 세워진 고루가 지금도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다.

 

정충 고루는 높이 20여m에 13층 구조로, 1997년 중국 우전부가 발행한 '동족건축' 우표 시리즈에 고루의 대표로 기재됐다. 정충 고루가 유구한 역사와 웅장한 건축미를 보여주지만, 자오싱 고루가 더 주목을 받는 것은 고루 자체의 역할을 충실히 보여준 데에 있다.

 

고루의 가장 큰 용도는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할 때 촌장이 꼭대기에 올라 북을 울려 마을 주민을 소집한 뒤 전체 회합을 여는 데 있다. 고루는 사교의 장이자 손님을 맞는 장소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중대한 변란이나 화재·범죄 등이 발생할 경우, 고루 북을 여러 번 울려 다른 마을에 전달하기도 했다. 즉, 한 마을 고루에서 시작된 북소리는 봉화처럼 옆 마을로 이어져 소식을 전달하고 사람을 불러 모았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통신 수단으로까지 쓰였던 고루도 지금은 현대문명의 발전에 따라 평소에는 휴식장소로, 명절 때는 주민이 모여 동족대가를 부르는 곳으로 축소됐다.

 

고루의 역할은 줄어들었지만, 고루가 끼친 영향은 동족의 건축토목양식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동족의 뛰어난 건축술은 주변 소수민족에게 영향을 주었고 심지어 한족에 견주어서도 뒤쳐지지 않았다. 또 하나의 동족 건축물 '풍우교'는 이를 잘 보여준다.

 

자오싱을 가로지르는 개울 위에는 고루와 마찬가지로 다섯 개의 풍우교가 세워져 있다. 풍우교는 일반 다리와 달리 다리 위에 지붕이 씌워져 있고 지붕 단청에는 고루처럼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다리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의자에 앉아 있노라면, 밑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교각 사이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길 가던 나그네의 아득한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자오싱에서 20여㎞ 떨어진 디핑 풍우교는 중국 최대를 자랑한다. 디핑풍우교는 1894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1959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964년 중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리 길이 70m, 폭 4.5m, 높이 8m인 디핑풍우교는 광시 장족자치구의 청양 풍우교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다리로 유명하다.

 

비록 다리 축대는 중건과 보수를 거쳐 푸른 돌 위에 시멘트를 덧칠하긴 했지만, 나무를 이용하여 튼튼하고 조형미 넘치는 다리를 만든 동족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수세기 걸쳐 만든 수로로 다랑논을 일군 탕안의 기적

 

자오싱 북쪽에 있는 향촌 탕안은 동족의 질긴 생명력과 뛰어난 지혜를 보여주는 또 다른 공간이다. 구이저우는 전체 면적의 67%가 산악지대다. 첸동난자치주는 산지 비율이 평균 90%에 육박하고 리핑현 동족마을의 대부분은 산간에 위치해 있다.

 

가파른 산지에 살아야만 했던 동족은 험한 자연조건에 적응하여 계단식 논밭인 다랑논을 일궜다. 해발 935m에 위치한 탕안은 대표적인 다랑논 농가 마을로, 700여 년 동안 독특한 관계수로시설을 발전시켰다.

 

원래 탕안은 산 정상 부근에 자리 잡아 농사지을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탕안 동족의 선조들은 산 정상과 자락 곳곳에 무궁무진한 지하수원이 널려 있음을 발견했고, 돌과 대나무로 수로를 만들어 이를 마을로 연결했다. 수세기에 걸친 고된 작업 끝에 주변 지하수를 모두 끌어들이는 수로가 완성됐고, 바가지로 물을 쏟는 듯한 우물 '퍄오징'이 탄생했다.

 

탕안 고루 위쪽에서 쏟아져 나오는 퍄오징의 물은 약수와 같아서 바로 마실 수 있고 식수로 쓰인다. 퍄오징에서 흘러내린 물은 첫 단계에서 과일이나 채소를 씻는 데 사용되고, 다음 단계에 다다른 물은 빨래를 하는 데 이용된다. 빨래터를 거친 물은 주택가 사이사이를 지나 다랑논으로 내려간다. 탕안에는 이런 퍄오징이 여러 개 있어 주민들의 생명선 역할을 한다.

 

우이산(42)은 "20여 년 전 외부에서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지하수에서 뽑아온 물에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하기도 했다"면서 "조상 때부터 만든 수로는 탕안 주민의 삶과 생활을 지탱해 주고 다랑논 농사를 가능케 한 근원"이라고 말했다.

 

리원밍 첸동난자치주 민족종교위원회 주임은 "고루는 동족마을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동족의 족휘이자 지역사회의 특수한 교류 공간"이라며 "동족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자연 속에서 얻은 지혜를 생활에 반영하여 발전한 민족"이라고 진단했다.


태그:#동족, #고루, #풍우교, #다랑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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