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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권중희 선생 백범 시해 현장인 경교장(현재 강북 삼성병원 본관) 앞에서
▲ 고 권중희 선생 백범 시해 현장인 경교장(현재 강북 삼성병원 본관) 앞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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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월 17일)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나는 격주 토요일이면 횡성고등학교 학생 논술 지도를 한다.

오늘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학교로 가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횡성버스터미널에서 12시 50분 안흥행 완행버스를 타고 마을 앞 정류장에 내린 뒤 내 집까지 1km 남짓한 길을 터덜터덜 오돌오돌 떨면서 걸어오는데 손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이는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로, 뜻밖에도 권중희 선생의 운명 비보를 전했다. 구 기자는 나와 권중희 선생의 인연을 상기시키며, 추모 기사 한 꼭지를 부탁하는 듯했다. 10여 분 걸어오면서 지난날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뒤 곧장 컴퓨터를 켰으나 자판을 두드릴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장면과 생각들이 떠오른 탓이리라.

첫 추위에 몸을 너무 움츠린 탓으로 따뜻한 방에 들어오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나자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 <오마이뉴스>로 들어가 지난 연재기사에서 '박도의 <의를 좇는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글방 책장에서 그때의 기사를 가제본해 놓은 '감동과 좌절, 150일의 기록'을 펼쳤다. 거기에는 그때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환영 나온 동포들에게 꽃다발을 받다.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환영 나온 동포들에게 꽃다발을 받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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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좇는 사람

나는 2002년 7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된 이후 한동안 봇물이 터지듯 이틀에 한 꼭지 꼴로 매우 열심히 기사를 썼다. 연재기사 '눈의 나라 기타도호쿠'에 이어 '의를 좇는 사람'을 만들고는, 첫 기사로 고 박종철씨 아버지 박정기 선생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그 무렵 한 독자가 박정기 선생 다음 분으로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추적 응징한 권중희 선생의 근황을 취재해주면 좋겠다는 제보를 내 메일로 보냈다. 나도 그분의 지난 일들을 익히 알고 궁금한 터인 데다가 나의 항일유적답사 안내를 해주신 이항증 선생과 권중희 선생은 같은 고향으로 잘 아는 사이라 권 선생과 쉽게 연결이 됐고 취재 수락도 쾌히 받았다.

 NARA 보이랜 방에서 자원봉사자 이도영, 보이랜, 이선옥 씨. 보이랜은 중요문서 대부분은 파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NARA 보이랜 방에서 자원봉사자 이도영, 보이랜, 이선옥 씨. 보이랜은 중요문서 대부분은 파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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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25일, 우리 세 사람은 내가 근무하던 학교(이대부고)에서 가까운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첫 상봉을 하였다.

나는 그날 취재 계획을 미리 세운 바, 첫 만남의 장소는 권중희 선생이 안두희를 응징하다가 징역형을 산 서대문 형무소로 잡았다.

그런 뒤, 안두희가 백범 선생을 시해한 경교장(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본관), 그리고 효창원의 백범 묘소로 장소를 옮겨가도록 세웠더니, 두 분 모두 아주 잘된 기획이라고 흔쾌히 따라 주셨다.

우리 일행은 택시로 세 곳을 다니며(세 사람 모두 승용차가 없음) 사진 촬영을 했다. 효창공원 부근 밥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취재를 하는데, 실내가 어수선해서 하는 수 없이 내 집으로 모셨다. 그날 저물도록 권중희 선생의 안두희 추적 응징사를 듣는데 매우 흥미진진하였다.

12년 동안 안두희를 추적했던 이야기가 끝났다. 그새 네댓 시간이 흘러갔다. 권중희 선생이 어찌나 실감나게 얘기하시는지 마치 007 시리즈를 한 편 본 듯했다.

나는 아무래도 한두 회 기사로는 그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할 것 같아 오마이뉴스 데스크에 하소연을 했다. 당시 정운현 편집국장은 아무리 좋은 인터뷰라도 2회를 넘기면 독자들이 식상해 하니 2회로 줄여 송고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건성으로 답하고는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첫 회 기사를 송고하였다.

데스크의 압력을 묵살하다

 아키비스트 보이랜이 97~98%는 파기되었다고 쓴 글
 아키비스트 보이랜이 97~98%는 파기되었다고 쓴 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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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버금) 기사인데도 조회 수 7000을 거뜬히 넘겼다. 나는 데스크의 압력을 묵살하고, 연재를 계속 이어갔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댓글도 조회 수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인터뷰 마지막 회인 8회 "안두희 입에서 쏟아진 이승만 연루설"은 조회수가 2만을 넘었고 44개의 댓글이 달렸다.

연재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리자, 돈이 마련되면 영어를 잘 하는 사람과 동행하여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가 한 달 정도 머물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한국 관계 비밀문서를 죄다 열람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백범 선생의 암살에 관한 얘기가 어딘가에서 나올 것이라면서 그게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왕복 비행기 삯과 체류비를 포함하여 2천~3천만 원 정도면 충분할 텐데 기업인들이 정치인에게는 사과상자에다 현찰로 수십억씩 갖다 바치지만, 자신 같은 이에게 백범 선생 암살 배후를 밝히라고 단돈 10만원이라도 주겠느냐면서 로또 복권이라도 한 번 사보고 싶다고 했다.

누리꾼의 댓글

이 기사가 나가자 아이디 '독야청청'이라는 누리꾼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주셨다.

"박도기자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리고요, 나라를 위한 일인데 조금씩 모으면 삼천만원은 가능 하지 않을까요? 기자님께서 주도하시면 가능 할 것도 같은데… 한번 심사숙고하시길… 그럼 수고하세여."

그리고 조성준씨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댓글로  달아주셨다.

우리는 아직도 치욕스런 역사 속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다

권중희 그를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자
우리의 역사가 치욕스러운 것은
우리가 30여 년간 일제의 압박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해방 후 지금까지도
그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직도
치욕의 역사 속에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범법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조국
나는 그런 조국을 원하지 않는다.


권중희 선생을 위해
그가 우리의 치욕스런 역사를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귀국길 덜레스 공항 출국장에서. 권중희(가운데) 선생 좌우의 동포 유학생이 부부가 되었다. 권중희 선생, 아니 오마이뉴스 누리꾼이 맺어준 부부다
(왼쪽부터 정희수, 권헌열, 주태상, 권중희, 이선옥, 박유종, 이재수 씨, 어린이는 권헌열 씨 아들).
 귀국길 덜레스 공항 출국장에서. 권중희(가운데) 선생 좌우의 동포 유학생이 부부가 되었다. 권중희 선생, 아니 오마이뉴스 누리꾼이 맺어준 부부다 (왼쪽부터 정희수, 권헌열, 주태상, 권중희, 이선옥, 박유종, 이재수 씨, 어린이는 권헌열 씨 아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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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귀국행

그 댓글에 몇몇 누리꾼이 동의한다는 글을 실어주셨다. 이 댓글들이 계기가 되어 모금이 시작되었다. 모금 1주일 만에 1000만원이 모였고, 2주 만에 애초의 목표액 3000만원을 달성하여 마감하였다(총 4300여 만원 모금). 그해 연말까지 모금하려던 계획이 단 2주 만에 목표액을 초과한 것이었다. 대단한 열기였다.

마침내 권중희 선생과 나는 2004년 1월 31일 출국, LA를 경유해 미국 워싱턴 덜레스공항에 안착하여 2월 1일부터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재미 동포와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동포 유학생 권헌열(오른쪽)씨가 NARA 마이클로필름에서 한국관련 문서를 검색하자 그 곁에서 당시 시대상황을 설명해 주는 권중희 선생.
 동포 유학생 권헌열(오른쪽)씨가 NARA 마이클로필름에서 한국관련 문서를 검색하자 그 곁에서 당시 시대상황을 설명해 주는 권중희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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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곧 벽에 부딪쳤다.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학예사 보이랜(Boylan) 씨에 따르면, 미국정부에서는 9·11 테러 사건과 노근리 사건 발표 뒤 대부분의 문서(97~98%)를 '파기(Destroyed)'했다고 하여 맥이 빠졌다. 조기 귀국이냐, 잔류냐 고심하다가 북데기에서 낱알을 찾듯이 애초 일정대로 눈에 핏발을 세웠지만 딱 부러지는 문서는 찾지 못하고 허망하게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신의 평생소원이 물거품이 되자 권중희 선생은 "태평양 바다에 투신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런 선생을 극구 만류하였다. 귀국한 뒤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강원 산골로 아주 내려오는 바람에 권중희 선생을 자주 만나 뵙지 못하다가 오늘 비보를 받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지난 봄 한국전쟁 사진 자료 수집 차 워싱턴에 가, 당시 우리 일행을 도와준 동포와 유학생 주태상씨와 이선옥씨를 만났더니, 그들은 그새 부부가 되어 예쁜 딸을 데리고 나왔다. 이들 부부의 인연은 권중희 선생이 맺어준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면 저승에서 권 선생은 매우 기뻐하시리라.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고 권중희 선생에 대한 추억의 나래를 접는다.

 귀국길 LA 동포들의 환영모임
 귀국길 LA 동포들의 환영모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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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회를 빌어 고인을 대신하여 백범 암살범 진상규명에 그동안 성원해 주시고 모금에 응해주신 누리꾼 여러분에게 엎드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고인은 저승에서도 늘 고마운 마음을 지니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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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단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