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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경대 전경
ⓒ 권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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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유배지 산내면 학교 학예회에 뮤지컬 아동극이라니….

60년대 전북 정읍시 산내면은 칠보발전소 댐공사로 수몰되어 6개의 초등학교로 분산되었다. 그래서 초임 교사나 '로비에 어두운 참교사'가 문제 교사로 낙인 찍히면 좌천 발령되는 지역이었다.

6·25의 참화로 생지옥 같았던 전후 산내

산내면은 6.25 전쟁의 치열함과 그 학살로 모든 마을이 불타버렸다. 파란만장하고 험하게 당하고만 살아온 산내면의 이야기다. 6.25가 할퀴고 간 가장 참혹한 지옥으로 움막을 짓고 살다가 겨우 초가집을 세우고 사는 정읍에서 최소 인구를 지닌 면지역이다.

1920년대는 남한 최초의 거대한 댐공사로 남사당패, 판소리 협율사 창극단들이 공사장 인부들의 위안공연차 자주 왔었고 흥부전에서도 흥부가 이곳(태인 산안 山內)으로 살려고 왔다고 기록된 풍요로움의 역사도 있다.

그래서 산내는 예술의 맛을 알고 있는 지역이긴 하나 최악의 전쟁지옥으로 걸인같은 목숨부지의 세월이 기니 문화예술은 생각도 못하고 유명한 '너디장', '능다리장'도 없어지고  유랑 가설극장도 없다

일제시대 능교국민학교의 학예회를 본 적이 있지만 6.25 전쟁후에는 전무했다. 거기에다 해마다 학년초에 좌천 교사 몰입으로 어수선한 복식수업에다 결강과 자습이 빈번했고 예술제서 뮤지컬 아동극은 있는지도 몰랐다.

산내 학교들은 '문제 교사'들이 좌천돼 가는 교사 유배지

심지어  그 당시 면 소재지 능교국교는 정신질환를 앓던 교사도 있어서 D모 교사 등은 공포 불안을 느껴 일부 교사들이 분교인 매죽초등으로 자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교무주임을 교대를 갓 졸업한 신규 교사가 맡아야 했다.

전쟁과 교육 행정이 부패된 교사 인사로 힘없는 산골의 학부형과 학생들은 수업 결손이 빈번한 응달에서 살았다. 힘없는 산골은 교육이 낙후된 최악의 지대였다.

1971년 당시 정읍교육청 H장학사는 박정희 군사독재의 칼인 신모 검찰총장 동창생이라 하여 당당하게 박모 장학사와 인사를 담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승진은 학생에 대한 애정과는 무관하였다. 교사가 승진이 되는 근무점수는 학교장과 장학사의 고유 비밀 권한이었다.

피해 교사가 그 점수를 밝히면 기밀누설죄가 되어 범죄가 된다. 지금도 이 제도는 한국이 세계 부정부패 상위국이 된 근본이며 사교육으로 달리는 부패 제도로 보인다.

아부도 못하면서 뮤지컬·국악교육 한다 미운 털

이러한 시기에 아부와 로비는 못하면서 뮤지컬 아동극과 국악 교육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기자는 산내면 유배지 매죽초등학교에 좌천되었다.

부패한 교육행정을 실감하고 교육청에 가서 고함을 퍼붓고 아예 사표를 쓰려고 산내면 유배지 매죽초등학교에 가 보았다.

당시 산내면의 모든 학교는 학년초에는 결강 투성이었다. 그때문에 매죽초등학교 김팔용 육성회장이 기자의 손을 잡고 학생에게 부임인사라도 해달라고 했다.

매년 3월 신학기 학교에 온 학생들은 교사 얼굴도 못보고 그냥 가는 게 다반사라고 했다.
너무나 헐벗고 가난한 산골 학생들의 상처투성이 얼굴과 초라한 표정을 보는 순간 불쌍한 느낌에 마음이 아팠다. 학생들은 부모가 버린 고아 같이 보였다. 내가 사표를 쓰면 또 문제 교사가 오고 또 결강과 자습이 몇 달씩 반복됨은 분명해 보였다.

사표 쓰겠다 결심하고 한번 가서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전국의 산골 오지 출신 학생이면 학년초에는 수업도 못하고 돌아오는 이런 교실 풍경을 대부분 연상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원초등학교, 칠보초등학교, 산성초등학교에서 매년 어린이날 학예회 때 무대에 올렸던 뮤지컬 아동극, '풍선가게 고양이'를 5월 5일 학부형과 산내면 주민 앞에서 공연하였다.

그리고 매죽초등학교 교가와 매대북당골(매죽리 지명) 노래를 지어 가르처 주었다. “만경대 굽이치는 맑은 물 위에 새싹들이 배움찾아 여기 모였다…”라는 그 마을 고유명사 “만경대” “사리목” “매대북당골”에서 산골 애들은 더욱 감동하고 그 노래를 늘 불렀다.

그리고 만경대 물가 강변에서 질렁구(큰새우), 가물치, 물고기 등을 잡으러 가자고 체육시간에 졸라대었고 음악시간이 되어도 기다렸다는 듯이 농성으로 외치며 만경대 시냇가로 가자고 졸라대었다.

매죽초 교가, '매대북당골'을 지어 힘차게 부르니...
 
만경대 풍금수업. 저 계곡으로 풍금을 나르고 노래를 부르고 놀았던 1971년의 역사 추억이 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 들기엔 무거운 풍금을 매고 끙끙거리며 그 아름다운 만경대 모래사장 물가 위에 비치해 놓았다.

만경대 물 속엔 피라미 물고기가 떼로 몰려와서 춤추고 있었다. 풍금소리는 물결소리와 화음을 이루니 만경대에서 “만경대” 노래를 부르면 음악시간은 가장 맑은 수업시간이 되었다.

그러다가 물속에서 들어가서 물장난에 다슬기, 물고기까지 잡아서  교실로 들어가라고 지시해도 마구 떼를 쓰며 노래하자고 졸랐다.

풍금이 무거워서 기자는 사비로 아코디온을 사서 음악시간에 만경대 물가 수업을 하였다. 아코디온으로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는 다 반주를 해주었다.

풍금 무거워 아코디온 사서 들고 모래판으로 나가
 
가난한 산골 애들이라 등교하는 고갯길에서 산딸기를 따서 칡잎에 싸서 선생님 교탁에 올려놓고 간다. 배고픈 산골애들이 먹지 않고 담임인 기자에게 준 칡잎 속의  선명한 산딸기는 정말 맛있었다. 그것을 따온 숨겨진 여학생이 40대 어른이 된 이제서야 박은정 학생이라고 알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동창회를 하면 이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당시는 악극단과  영화가 판치는 시대인데도 산내면에서는 영화구경 한번 제대로 못하니 주민들은 더욱 감동적이어서 소문이 났다.

이해 가을 운동회에서는 학생이 직접 치고 도는 농악판 굿을 하였다. 전국적으로 초등학생 농악은 처음으로 보는 구경이라서 구경 온 타 학교 능교, 두월, 장금국교 등의 학부형들은  마구 자기학교 교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쫓아내야 한다고 소리 질렀다.

일반수업보다 희귀한 연극이나 농악을 하니 본교인 능교국교보다도 능교에서  분리되었던 매죽학교가 더 우월하게 보여 그런 결과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역시 국악에 흥분하더이다~

그때 기자는 한국인들에게는 농악이 폭발적인 감동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 뮤지컬 연극보다 뮤지컬 농악 즉 태평소 연주가 있는 농악만을 교육하게 되었다.

운동회에서 학생농악을 본 매죽학교 학부형인 공복수, 박주석, 박주추 등은 수일 후에 자기마을 진상골로 가을 소풍 오는 걸 알아 이날 전교사를 마을에 감금하여 진상골 마을 밤 예술제를 구상하였다.

마을 학생들은 가난한 부모님이 선생님과 함께 자기 마을에서 어울리는데 기가 살았고 다투어 가무고취에 밤을 세웠고 감나무 감도 단풍으로 둘러쳐서 구경을 하였다.

지난번 진상골 <정읍통문> 뉴스를 그날의 학부형  박주석님이 듣고 또 한번 오라고 당부 했다. 그 매죽초등 학생들은 지금도 동창회를 자주 하고 '매대북당골', 이 노래를 부른다.
그때 사표 쓰지 않아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됐었다.

교사의 유배지였던 그 시절 산골에서 그날 사표를 쓰지 않은 것은 기자의 인생에서 천만다행한 일이다. 오늘날에 어디에도 드문 '산골 노래 교사'의 추억을 소지하게 됐고 그날의  제자들이 지껄이는 그날밤 이야기는 더욱더 기자를  즐겁게 한다.

더 높은 지위를 얻고자 줄서기 하여 영화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는 현실은 여전하다. 낙후된 산골이 아름다운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변신해야 산골을 찾는 자가 많아져 산내에 새로운 예술의 '꽃 피는 봄'이 올 것이다.      

그 애들은 권 선생과 만나기 위한 여름 동창회. 매죽리 강변에서 그날의 추억을 되살려 8월에 동창회를 벌였다. 서울에서 모두 내려와 추억을 되새기며 놀았다.

덧붙이는 글 | <정읍통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정읍, #산내, #만경대, #국악교육, #음악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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