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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이 쓴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 전파의 숲 속으로>는 참 재미난 책이다. 그 안에는 그림만이 있지 않다. 역사가 있고 문학이 있으며 근대를 바라보는 비평이 있다. 우리는 흔히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그림에 관한 책을 접한다. 그래서 그림보기는 그림읽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바로 그 그림읽기의 한 방편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그 그림읽기라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어서 많은 수고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소개된 책은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리고 재미나게 읽힌다. 저자 이택광의 놀라운 필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다.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근대의 계급성을 끄집어내는 그의 시선에서 우리는 예술작품이 왜 당대의 전범(典範)이 되는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인상파-근대를 넘어 새로운 지평으로

우리는 이 그림에서 음악과 그림의 호환을 발견한다. 이른바 공감각에 대한 발견이다.
▲ 콤포지션/칸딘스키 작 우리는 이 그림에서 음악과 그림의 호환을 발견한다. 이른바 공감각에 대한 발견이다.
ⓒ 도서출판 아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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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택광은 칸딘스키의 그림 <콤포지션 8>에서 음악의 선율을 듣는다. 김광균의 ‘외인촌’이란 시에서 만난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와 같은, 소위 공감각에 대한 발견이다. 시인은 보통 미학에서 말하는 ‘정서’라는 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일종의 도구를 사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미지이다. 시각이미지 등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미학자나 철학자가 다루는 이미지는 주로 마음속의 이미지이고, 어떻게 보면 이 마음속의 이미지를 놓고 치고받고 싸워온 것이 현대미학이자 언어철학이라 저자는 말한다.

이 이미지 덕택으로 우리는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졸라맨’을 통해 자연스럽게 실제 사람의 행동을 떠올리는 것도 이미지 때문이다. 이미지는 이처럼 하나의 반응을 일괄처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제각각인 마음들이 하나의 대상을 보고 동일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이미지가 마음 안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주입된 것이라는 반증이다. 즉 이미지는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집단에 의한 것이다. 곧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저자는 이 전제 위에서 그림읽기의 사례들을 들려준다.

맨 처음 만나는 마네의 ‘올랭피아’는 근대성의 상징이다. 마네의 붓질은 당대의 전통과 인습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원했든 그렇지 않는 미술사의 혁명적 전환이라는 인상파의 거두가 되었던 것이다. 마네는 당대의 주류였던 아카데미 회화들의 이상화된 여성상을 비웃으며, 비너스의 이미지를 졸지에 매음녀로 바꾸어 버렸다. 즉 세속의 것을 신화 속 상징으로 표현하던 기존의 예술 인습을 뒤엎고, 세속의 것을 세속의 상징으로 그렸다. 여기에서 근대는 태동하였던 것이다

아카데미즘 회화를 거부한 마네의 누드에는 근대의 매음녀가 있다. 세속의 것을 세속의 상징으로 그린 마네의 붓질은 이전의 고루한 인습을 거부한 것이었다.
▲ 올랭피아/마네 작 아카데미즘 회화를 거부한 마네의 누드에는 근대의 매음녀가 있다. 세속의 것을 세속의 상징으로 그린 마네의 붓질은 이전의 고루한 인습을 거부한 것이었다.
ⓒ 도서출판 아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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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는 여인의 육체를 여신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고, 매음녀의 육체를 그대로 드러나도록 그렸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등장이다.”(책 33쪽)

마네는 근대 시민사회와 함께 등장한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알아챈 것이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산업임금노동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등장은 모든 예술의 혁명적 변화를 초래한 동인이기도 하였다. 모네의 <인상-해돋이>에 중요한 것은 일출이라는 자연 경관의 포착이 아니라, 그 뒤로 보이는 부둣가의 크레인이 상징하는 근대 문명의 도래라는 사실이다. 그는 인간의 노동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풍경을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흔히 인상파는 ‘빛의 양감에 의한 대상의 변화와 그 순간의 포착’이라는 회화 기법상의 새로운 시도를 한 19세기 후반의 일군의 미술가들을 총칭한다. 그러나 저자는 르네상스 이래의 원근법의 소멸과 사진술과 일본회화에 영향을 받은 인상파의 회화적 특징에 주목하지 않는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인상파 화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파리 코뮌 이후의 세상에서 왼쪽에 피사로와 모네가 서 있다면 오른쪽에는 드가와 르누아르 같은 화가가 서 있다는 식의 접근이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에서 시작된 근대 미술의 힘찬 속도는 기차라는 근대 문명의 이기들과 만나면서 그 행보를 더욱 빨리한다. 근대를 알리는 기적소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도착한 근대의 관객과 그림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책의 표지화이기도 한 카유보트의 <유럽의 다리>는 인상파의 전혀 다른 내면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그림의 신사는 생라자르 역의 기차를 보고 있고 기차는 곧 근대의 상징이다. 이제 인상파의 그림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한 근대의 관객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유럽의 다리/카유보트 작 이 그림의 신사는 생라자르 역의 기차를 보고 있고 기차는 곧 근대의 상징이다. 이제 인상파의 그림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한 근대의 관객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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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랑스로 가는 관문역인 생라자르 역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신사는 지금 기차를 보고 있고, 여인과 함께 걸어오고 있는 남자는 화가 자신이다. 그렇다면 화가를 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반대편에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견공이 실마리다. 유럽의 경우, 대도시에서 개 혼자 길거리로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저자는 귀띔한다. 말하자면 저 견공의 뒤에 주인이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곧 이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들,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탐닉하는 소비자들인 것이다.

라파엘전파-근대를 거꾸로 거슬러 유토피아를 찾아서

라파엘전파의 이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존 러스킨은 자연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통해 자연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림은 “자연을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정의했다. 한마디로 말해 “자연으로 돌아가자”이다. 근대에 사는 인간은 모두 병들었음으로 결국 자신의 고향인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 라파엘전파다.

아카데미즘의 인습을 거부하고 라파엘 이전 시기의 예술기법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 이들은 이런 이름을 자신들에게 붙였다. 별 것도 아닌 듯이 보이지만, 19세기 당시에 미술아카데미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전범으로 삼는 화가들이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였다. 이렇게 대단한 라파엘을 버리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니, 사제 간의 예의를 최고로 치던 빅토리아 영국에서는 그야말로 가르쳐준 선생을 불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물려준 회화의 전통을 우습게 여겼다는 점에서 라파엘전파는 프랑스 인상파와 닮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다소 상이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서로 다른 예술 기법을 낳았다. 인상파가 오늘날 거론되는 추상주의를 낳았다면, 라파엘전파는 상징주의의 뿌리 노릇을 했다. 라파엘 이전의 이탈리아 미술이야말로 솔직하고 단순한 자연묘사가 돋보이는 가장 자연에 친숙한 예술형식이라 주장한 라파엘전파는 로세티, 헌트, 밀레이에 의해 결성되었고 후에 제임스 콜린스, 토마스 울너, 윌리엄 다이스 등이 합류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소설가 디킨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이른바 고전주의 계열의 이상미를 무시했고, 사실주의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다루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이유였다. 러스킨은 이런 비판에 대항에서 이들을 옹호했고 그들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기성세대화 되어갔고 라파엘전파의 지조를 지킨 이는 헌트 한 사람뿐이었다. 이어 후기 라파엘전파 운동의 기수는 번 존스로 대표되는데, 초기작에 비해 확실히 진부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그림은 언뜻 사랑하는 연인을 그린 것 같지만 여인의 어깨를 감싼 양치기의 손에는 나방이 들려있고 그 나방은 해골문양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에드가란 인물의 대사를 묘사하고 있는데, 해골무늬 나방은 죽음을 상징한다. 죽음과 사랑은 중세의 주제의식이다. 중세의 표현양식을 통해 문학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라파엘전파의 모토였다.
▲ 고용된 양치기/헌트 이 그림은 언뜻 사랑하는 연인을 그린 것 같지만 여인의 어깨를 감싼 양치기의 손에는 나방이 들려있고 그 나방은 해골문양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에드가란 인물의 대사를 묘사하고 있는데, 해골무늬 나방은 죽음을 상징한다. 죽음과 사랑은 중세의 주제의식이다. 중세의 표현양식을 통해 문학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라파엘전파의 모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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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전파는 시각이미지를 문자이미지와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러스킨의 영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시각이미지와 문자이미지가 일치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이들은 이 둘을 일치시키는 것이 예술행위의 임무라고 봤다. 이런 ‘거룩한 임무’를 위해 이들은 중세의 신화나 르네상스의 문학작품에 나오는 장면을 그림으로 옮기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특히 이들이 좋아한 문학작품은 셰익스피어였다.

인상파가 근대의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근대의 뒷골목으로 들어가 노동자 창녀 등과 만나던 때에, 라파엘전파는 근대의 산업화가 멀리 쫓아버린 자연을 찾기 위해 상상력의 터전으로 옮겨갔다 할 수 있다. “혼탁한 현실이야말로 투명한 예술에 대한 요청”이라 주장한 러스킨의 입장이 곧 라파엘전파의 생각이었다. 문명이 타락할수록 예술이 더욱 꽃을 피운다는 생각이 곧 라파엘전파의 윤리였다. 즉 그들의 예술론은 근대 예술의 속성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대 예술에 대항하기 위해 근대 이전의 세계를 상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인상파가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갔다면, 라파엘전파는 근대가 몰고 온 온갖 병폐의 징후들을 제거하고 치료하기 위해 상상력의 세상에서나 가능한 중세 이전의 유토피아로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화의 상징처럼 놓인 철길 위를 기차가 멈추지 않고 달리듯, 문명의 질주는 멈출 줄 몰랐고 자연으로 돌아가기란 참으로 요원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럼으로 라파엘전파는 점차 근대의 정거장에 내려 쓸쓸한 현실과 조우하고 만다. 다만 그들이 근대에 대해 품었던 윤리의식과 이상사회로의 염원은 지금도 아름다운 무엇임에는 틀림이 없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아트북스(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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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읽어야 제맛이다!

태그:#근대미술, #인상파, #라파엘전파, #이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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