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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이 한창 달아오른 지난 5일 이해찬 선대위 종합상황본부는 <정동영 후보측 부정선거 백서>를 펴냈다. 당내 경선에서 '부정선거 백서'까지 펴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만큼 경선이 과열과 불법으로 얼룩졌다는 반증이다.

 

<백서>는 정동영 후보에게는 '이벤트 정'과 '곶감 동영'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다고 정 후보를 인신공격 하면서, 그에게 '떼기 정'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선사했다. 명부떼기·박스떼기·차떼기·콜떼기 등의 불법선거운동 사례를 거론하며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뺨치는 불법타락 선거의 주인공'이라고까지 공격했다.

 

그러자 정치권에서는 35년 친구 사이인 정동영-이해찬, 두 사람이 갈 데까지 간 것이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신당 경선의 1차 분수령인 광주-전남 경선을 앞두고 네거티브 공세가 극에 달했을 때, 이 후보는 정 후보를 '참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정 후보가 "대학 1학년 때 친구…"라고 말문을 열자마자 이 후보는 "그 친구 이야기는 그만 하세요, 공적인 자리에서"라고 쏘아붙일 만큼 시선이 싸늘했다.

 

그래서 정 후보가 신당 후보로 선출되어도, 세 사람 특히 두 사람의 '금간 우정'이 회복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니냐는 의견들이 분분하다. 특히 이 후보는 이른바 '친노 세력'의 대표주자라는 점에서 유시민 의원 등 친노 세력이 문국현 후보와의 연대를 저울질하며 정 후보측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한, 이 후보도 비슷한 행보를 유지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오랜 우정과, 정 후보가 김근태 의원과 이해찬 후보 같은 반독재민주화운동 세력의 적자(嫡子)는 아니더라도 민주평화세력의 정통성을 잇는 후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우려는 기우(杞憂)일 가능성이 크다.

 

정동영의 용기가 없었다면, '5선' 이해찬도 없었다?

 

"정동영이 없었으면 5선 의원 이해찬도 없다."

 

MBC 기자 시절에 정동영 후보와 함께 근무했던 박영선 의원의 얘기다. 무슨 말일까?

 

지난 87년 민주세력은 '6월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러나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민주세력은 그해 12월 대선에서 군부세력의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 13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는 '여소야대'였다. 여당인 민정당은 125석(지역구 87, 전국구 38)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으나, 과반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DJ(김대중)가 이끈 평화민주당이 71석(지역구 54, 전국구 16), YS(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59석(지역구 46, 전국구 13), JP(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35석(지역구 27, 전국구 8)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른바 '후3김 시대'의 부활이었다.

 

당시 '평민연'이라는 재야 영입 케이스로 평민당에 입당해 정치에 입문한 '서점 주인' 이해찬은 처음 출마한 서울 관악에서 거물급 후보인 김종인 의원(당시 민정당 비례대표)과 맞붙어 승리하는'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은 대부분 경제학 교수 출신의 재선 의원으로 행정 경험도 있고 명문가의 후예(가인 김병로 대법원장의 장손)인 김 의원의 낙승을 예상했다.

 

결과는 그 반대였다. 평민당은 이해찬 후보의 승리 등으로 수도권과 호남에서 이른바 ‘황색 바람’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창당한 지 불과 5달밖에 안된 평민당의 약진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안동 돈봉투' 사건으로 기록된 정부여당의 부정선거를 언론이 폭로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방송은 정권의 그늘 아래 있었다. 정부여당은 총선거 직전에 터진 '안동 돈봉투' 사건의 방송 보도를 막았다. MBC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9시 '뉴스데스크'는 막았지만 밤 12시 마감뉴스는 막지 못했다. 당시 MBC '0시 뉴스' 앵커였던 정동영이 기습적으로 '안동 돈봉투' 사건을 헤드라인 톱뉴스로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도권에서의 평민당의 신승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호남에서 37석을 석권한 평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에서 과반을 넘기며 다른 당을 압도한 17석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이해찬 후보가 처음 출마한 ‘서울 관악을’이 대표적인 신승 사례다.

 

그후 이해찬 후보는 이곳에서 17대까지 내리 5선을 했다. 그때 정권의 보도통제와 해직을 무릅쓴 정동영의 용기가 없었다면, 5선 의원 이해찬도 없었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해찬의 영입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정동영도 없다?

 

물론 그 '역(逆)'도 성립한다. 이해찬이 없었으면 오늘의 대선 후보 정동영도 없다.

 

'청양 이 면장댁 셋째 아들' 이해찬과 정동영은 오랜 친구다. 이해찬은 52년생, 정동영은 53년생으로 나이는 이해찬이 한 살 위지만 대학 학번(서울대 72학번)이 같은 운동권 친구다. 이해찬은 원래 71년 용산고를 졸업하면서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다시 사회학과에 재입학했다. 이해찬은 그 때만 해도 '어리버리한' 사학도였던 전북 순창 산골 출신의 '순둥이 정동영'을 운동권 서클로 이끌었다.

 

이해찬은 3학년 때 '민청학련' 유인물을 뿌리고 시위를 벌이다 10년을 선고받고 1년간 복역했다. 정동영 역시 국사학과 3학년 재학중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지만 '거물'이 아니어서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군에 강제 입대했다. 대학 선배인 김근태(경제학과 65학번)와 손학규(정치학과 65학번)는 당시 민청학련 배후조종 혐의로 수배가 내려진 상태였다.

 

'빵잽이' 이해찬은 출옥 후에도 졸업을 하지 못한 채 서울대 앞 광장서적과 돌베개출판사를 운영하다가 80년 ‘서울의 봄’을 맞이해 서울대 복학생 협의회 대표 시절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투옥되어 다시 2년 6개월을 복역했다. 그는 이후 김근태가 이끈 민청련’(83년), 문익환이 이끈 민통련(85년), 87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로 이어지는 '재야운동 정통코스'를 밟았다.

 

이후 8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에 선 이해찬은 DJ의 눈에 들어 재야 몫으로 평민당에 입당해 88년 정계에 입문해 내리 5선을 했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각각 교육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정동영은 78년 대학 졸업후 MBC에 들어가 기자 생활을 했다. 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시작된 방송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땡전 뉴스'를 거부하고 MBC 노조 설립에 앞장섰다. 88년 총선에서 친구 이해찬이 서울 관악에서 금배지를 달았을 때, 정동영 앵커는 MBC 노조의 '최연장자 조합원'이었다.

 

그로부터 8년 뒤에 LA특파원 등을 거쳐 뉴스데스크 주말앵커로 잘 나가던 정동영을 DJ에게 소개해 96년 15대 총선 때 '화려하게' 정계에 데뷔시킨 사람이 바로 이해찬이다. 당시 그는 이해찬의 소개로 천정배·신기남 등과 함께 전문가 영입 케이스로 정계 입문해 15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대중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16대 국회에서는 이른바 천-신-정 그룹을 형성해 정치개혁을 추동했다.

 

손학규의 창당 노력이 없었으면 이해찬-정동영도 없었다?

 

손학규 후보는 젊은 시절 '골수 운동권'이었다. '운동권 연고주의'라는 비판도 있지만, 손 후보가 한나라당 14년 경력에도 불구하고 386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지원으로 범여권에 빨리 안착할 수 있었던 것도 운동권 경력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손 후보는 65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자마자 한·일회담 비준 반대시위,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 반대시위(66년), 6·8 부정선거 규탄 시위(67년) 등을 주도하다가 연거푸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는 군복무시절인 1971년에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보안대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1972년 제대 후에야 복학해 1973년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고난의 재야 운동권 생활이 이어졌다. 소설가 황석영씨와 함께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용접공으로 일한 손 후보는 73년에는 마오쩌둥 영문저서를 번역해 돌려보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74년 민청학련 사건 때는 배후조종 혐의로 서빙고 보안대 분실에 잡혀가 조사를 받았다. 민청학련 사건은 손-정-이 3인에게 겹치는 '연대의 고리'다.

 

1975년부터 2년 동안은 수배를 받아 도망다니느라 어머니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그는 10여년간의 운동권 삶을 마감하고 세계교회협의회 장학금을 받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이 터지기 전이었다. 87년 6월항쟁 당시에도 그는 영국 옥스퍼드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요한 고비마다 해외에 체류했던 그에 대한 '역사의 현장 부재 증명'은 한나라당 14년 경력과 함께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대신 손학규는 전두환 정권과 정확히 겹친 영국 유학 7년 동안 박사학위 논문과 '제3의 길'을 얻었다. 88년 귀국한 손 후보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련) 원장을 거쳐 인하대와 서강대 교수로 강단에 섰고, 1993년에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공천으로 경기 광명 보궐선거에서 민자당 후보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96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손 후보는 민자당 대변인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며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그는 1998년 경기지사 선거에서 쓴 잔을 마셨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3선에 성공한 뒤 2002년 경기지사에 다시 도전해 승리했다.

 

이를 바탕으로 손 후보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레이스에 참여했으나 3위를 벗어나지 못하자 지난 3월 "한나라당이 아닌 국민을 위해 순교하겠다"며 한나라당을 탈당해 3개월 만에 범여권에 합류했다. 이어 신당 창당 작업에 적극 참여해 현재의 '대선판'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손학규가 없었으면 신당의 '경선 삼국지'도 없었던 셈이다.

 

손-정-이 '3자 경선 관문'에서 문-정-이 '3자 단일화 관문'으로

 

하지만 범여권의 핵심 지지층은 여전히 손학규 후보를 '우리 후보'로 인정하지 않는 눈치다. 이 때문에 손학규 진영에서는 "(신당에) 들어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어차피 '운명 공동체'인데 해도해도 너무 한다"(김부겸 의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손 후보가 경선 중간에 궤도를 이탈해 칩거와 잠적의 반기를 든 것도 사실상 "내가 빠지면 신당 경선도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손 후보에게는 그 때나 지금이나 돌아갈 '퇴로'가 없다. 손 후보 역시 패배가 굳어진 14일 밤 참모들에게 "나는 여러 분과 대선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새로운 정치로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도 여러분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해찬 후보 또한, 한 측근 의원의 말마따나 이번 경선에서 '뿌리깊은 반노(反盧)'의 정서를 실감해야 했다. 정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던 유시민 의원 또한 주변에 정동영 후보가 민주평화진영의 정통성이 있는 후보인 만큼 대선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정-이 '3자 경선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다시 문-정-이(문국현 정동영 이인제) '3자 단일화 관문'과 맞닥뜨린 정동영 후보로서는 그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라도 두 후보의 협력이 절실하다.

 

정 후보 측은 손-이 후보에게 선대위원장직 제의를 포함한 통합선대위 구성을 제안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함께 신뢰하는' 한명숙 전 총리의 역할이 주목된다.

 

지난 10월초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신당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거룩한 계보'라는 영화포스터 패러디 사진이 걸렸다.

 

이 패러디처럼 신당은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노무현 전-현직 대통령의 '전략적 제휴' 아래서 손-정-이 3인이 치열한 '경선 삼국지'를 연출했고, 이제는 비록 '상처뿐인 영광'일망정 정통성을 확보한 정동영 후보를 중심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구도이다. 물론,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최선을 다해도 대선에서 진다면 두 사람에게는 곧 이어지는 총선이라는 기회가 있다.


태그:#정동영, #손학규, #이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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