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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토평마을에 있는 석주명 기념비. 그는 일제말기에 이곳에서 2년을 지내면서 제주나비와 제주방언을 연구했다.
▲ 석주명 기념비 서귀포시 토평마을에 있는 석주명 기념비. 그는 일제말기에 이곳에서 2년을 지내면서 제주나비와 제주방언을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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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도로를 따라 서귀포 시내를 향하여 길을 가다보면 토평 사거리에서 제주대학교 부설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를 볼 수 있다. 석주명은 1943년 4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며 제주도와 인연을 맺었다.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1921년 13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명문 숭실고보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듬해 동맹휴학으로 숭실고보를 중퇴하고 개성의 송도고보로 옮겼다. 송도고보를 졸업한 석주명은 일본의 명문 가고시마 농림학교에 합격하고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의 주목을 받으며 곤충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석주명이 이 채를 들고 나비 한 마리를 채집하기 위해 3Km씩 쫓아다녔다.
▲ 나비채 석주명이 이 채를 들고 나비 한 마리를 채집하기 위해 3Km씩 쫓아다녔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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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은 1921년 졸업 후 귀국해 모교인 송도고보의 교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나비연구를 시작하였다. 휴일이나 방학이 되면 나비를 찾아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녔고 송도고보의 학생들에게 나비를 200마리씩 채집해오라는 방학숙제를 내기도 했다. 그의 열정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다.

그가 한국산 나비에 대해 독보적인 권위를 갖게 되자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의 한국지회는 그에게 한국산 나비에 관한 총목록을 출판할 것을 권했다. 그 때 정리된 책이 <조선산 접류 총목록 (A Synoni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이다. 이 책으로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나비의 표본을 만들 때 쓰던 표본장
▲ 표본장 나비의 표본을 만들 때 쓰던 표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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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연구열은 더해 갔고,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교사직을 사직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촉탁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구원으로 1년 정도 서울에서 연구하던 석주명은 1943년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 파견을 자원했다.

그가 당시 소장으로 근무했던 ‘경성제국대학교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은 지금은 ‘제주대학교 부설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로 바꿨다. 지금도 이 연구소 근처에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석주명 기념비와 흉상이 건립되어있다.

일제시대에는 이 곳이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이었다. 석주명은 이 연구소에서 소장으로 근무했었다.
▲ 제주대학교 부설 아열대 농업생명과학연구소 일제시대에는 이 곳이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이었다. 석주명은 이 연구소에서 소장으로 근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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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제주는 서울의 입장에서 볼 때 벽지중의 벽지이기 때문에 이 시험장은 누구나 근무를 기피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1년 기한으로 이곳에 부임한 석주명은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 근무 기간을 1년 더 연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의 근무연장 요청에 대학본부에서도 무척 고마워했고, 총장이나 의학부장이나 기타 교수들까지도 위문 왔던 형편이었다고 했다.(석주명의 <국학과 생물학>) 

그는 2년 동안 제주도에 머물면서 나비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제주도 방언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그의 제주 방언연구는 나비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의 연구는 같은 지역에 분포하는 같은 종류의 곤충일지라도 산지에 따라 지방적 차이가 있는 것이, 같은 지방의 방언도 소지역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착안되었다.

“나는 내가 전공으로 하는 나비류를 종별별로 지도상에 그 분포상태를 표시하는 방법을 방언에도 응용하여, 약간의 단어를 선택하여 그 분포를 지도 위에 표시하려고 기도하였다. … 그러나 이 방법이 방언학에서 취급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일본에서도 벌써 이 방법에 의한 업적이 많음을 알고는 불원간 조선에서도 널리 사용되리라 기대하고, 방언학은 나의 전문도 아니니 그만 중지하고 말았다.”(석주명의 <국학과 생물학>)

프시케월드 안에 전시되어 있다. 아쉽게도 제주방언과 관련된 저서는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 석주명의 저서와 논문들 프시케월드 안에 전시되어 있다. 아쉽게도 제주방언과 관련된 저서는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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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기왕 제주에 온 이상 제주방언을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단어 수집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곤충학에서 곤충 간 유연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을 방언 연구에 응용하여, 각 지역의 대표적 단어를 지도 위에 표시하는 언어지도를 만들어보았다.

“그랬더니 제주도방언과 가장 유연관계가 깊은 것은 전라도방언이었는데 양자 간의 공통 어휘는 5%여서 제주도방언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서울대 교수였던 방종현은 석주명이 제주방언을 연구해서 제주도방언집을 책으로 출판하게 된 것에 대해 "우리 언어학사에 귀한 자료를 남겼다"고 기뻐했다.

“신년 벽두에 좋은 책(제주도 방언집, 1948)이 나왔다. … 이 방언집이 우리의 방언학 상에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귀하다. 어휘며 음운 방면은 물론이고 제주도방언의 문법까지도 이것에 의하여 조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학적자료를 충실하게 제공하여 일반으로 편익을 주는 점에서 이 책은 실로 귀하다고 할 것이다.”(1948년 3월 12일 서울신문)

프시케월드 김용식 관장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장품들을 모아 석주명의 방을 복원하였다.
▲ 석주명의 방 프시케월드 김용식 관장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장품들을 모아 석주명의 방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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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을 포함한 우리말에 대한 그의 관심과 재능은 나비 이름을 짓는 데서도 잘 나타났다. 새로운 나비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 말로 된 예쁜 이름을 붙여주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굴뚝나비’는 굴뚝처럼 까맣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고, ‘봄처녀나비’는 봄에 금방 나왔다가 사라져서 처녀처럼 수줍음을 타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석주명은 나비연구에서는 세계적인 학자였지만 결혼생활에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석주명은 수업 외의 모든 시간을 나비연구에 쏟았고, 많지 않은 월급에서 상당량을 경비로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석주명은 고집이 세고 학문밖에 모르는 외골수였으며, 그의 부인은 활달한 성격의 자기주장이 강한 신여성이었다.

“석선생은 학문이 그의 전부였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어 수 천 마리 씩 나비를 채집해오게 하였고 그것이 그 과목의 성적이 되었다. 그는 가족걱정을 안했다. 월급 타다가 생활비를 떼어주면 가장으로서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부부 관계도 불화의 연속이었다. 학자들은 이런 사람이 적지 않다. 가족들 서로의 깊은 이해가 아쉽다.”(유영달)

그와 아내는 신혼 초기부터 부부싸움을 잦았고 결국 결혼한 지  4년 만에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의 학자로서의 유명세로 인해 이혼에 대한 세간의 구설에 자주 오르내렸다. 언론은 그를  '꽃 모르는 나비 학자'라며 그의 이혼과정을 보도하기도 했다.

석주명이 연구해서 이름을 붙였던 제주나비들
▲ 제주 나비의 표본 석주명이 연구해서 이름을 붙였던 제주나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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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밖에 모르는 열정으로 인해 그는 75만 개체의 조선산 나비를 조사하여 800여개가 넘는 잘못된 학명을 정리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채집으로 250여종에 이르는 조선산 나비에 대한 충실한 분포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와 그의 연구를 일순간에 앗아가고 말았다. 1950년 9월 말에 집중된 서울시내의 폭격으로 과학박물관이 전소되고 그의 분신이었던 나비표본과 원고들이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10월 6일 폐허가 돼버린 과학박물관을 다시 세우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석주명은 시내에서 불의의 총격을 당하고 말았다. 학문에만 정진했던 그는 총부리 앞에서도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라는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금년 7월에는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 '프시케월드(Psyche World)'라는 나비공원이 개관하였다. 이 안에는 국내외에서 수집된 나비의 표본들과 나비와 관련된 신화와 패러디 물들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 최근 개관한 나비공원이다.
▲ 프시케월드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 최근 개관한 나비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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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습관 안에 한쪽에는 일제말기에 제주에서 생활하던 석주명 선생의 당시 공부방이 복원되어 있다. 한국나비학회 회장을 지냈던 김용식 프시케월드 관장이 자신의 소장품들을 기증해서 만든 것이다.

최근 석주명을 기념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흉상과 기념관이 전혀 따로 만들어지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나비공원이 그가 제주에서 연구에 몰두하며 지냈던 서귀포시 토평 마을에 건립되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프시케월드 가는 길 : 제주시에서 서부관광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15Km정도 가면 경마공원이 나오는데, 경마공원 맞은 편에 프시케월드가 있습니다. (프시케월드 064-799-7272)



태그:#석주명, #제주방언, #토평, #프시케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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