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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노고단에서

노고단 올라가는 길 청량한 공기의 성삼재
▲ 노고단 올라가는 길 청량한 공기의 성삼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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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은사를 나와 굽이굽이 급경사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조금은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그 길. 네 바퀴 자동차가 오를 수 있는 한반도 이남의 가장 높은 곳, 노고단으로 향하는 길이 어디 쉬울 턱이 있겠는가. 산이 얼마나 높고 깊으면 중턱쯤 도착하자 산 밑의 무덥던 공기가 어느새 에어컨의 그것처럼 청량해져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노고단의 시작점 성삼재. 처음에는 성삼재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만 보고 갈까 했지만 새벽녘의 화엄사나 천은사도 그랬듯 노고단을 그냥 지나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우리 식구는 한 번도 노고단을 가보지 못했다는 동생을 핑계 삼아 다 같이 노고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2년 전 종주를 할 때도 그랬지만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특별히 경사가 급하거나 험한 것도 아닌데 분명 노고단까지의 길은 많은 수고를 필요로 했다. 과연 무엇이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의 발걸음을 이리도 천근만근 만드는 것일까?

맨몸으로 올랐던 10년 전을 돌이켜 보건대, 그것은 단순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것은 산 밑에서부터 성삼재까지 차를 타고 올라온 관성 때문이었다. 1090m나 되는 성삼재까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다 보니 막상 차에서 내려 얼마 되지 않는 길조차 걸어내기가 만만치 않게 된 것이다.

결국 노고단에서부터 천왕봉까지 종주를 했음에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예전의 그 정체 모를 찝찝함은 이 관성에 대한 불편함이었으리라. 화엄사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했던 이들에 대한 부러움이나, 바래봉부터 시작해서 지리산 전체를 돈다는 태극종주를 또 하나의 목표로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은 모두 성삼재까지 편하게 올라갔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일종의 자책인 것이다.

노고단에 남겨진 폐허 흘러간 세월의 흔적
▲ 노고단에 남겨진 폐허 흘러간 세월의 흔적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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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쯤 걸었을까? 노고단이 눈앞에 보이더니 저 밑으로 구례 시가지가 펼쳐졌다. 비록 안개 때문에 뿌옇게 보였지만 화엄사가 분명했으며, 굽이굽이 보이는 하얀 실타래는 섬진강 줄기였다. 과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산을 넘으며 저 풍경을 보고 또 보고 했을 것인가. 지리산이 아주 오래전부터 그 지역민들의 최적의 피난처임을 감안한다면 저 풍경에 울었던 사람들도 꽤 되었을 것이다.

노고단 대피소에 거의 다다르니 길옆으로 과거 선교사의 집이었다는, 다 부서져 폐허가 된 건물이 보였다. 10년 전에도 그랬듯이 그 건물은 이름 모를 야생화로 뒤덮여 있었고, 그 아름다움과 건물의 흉측스러움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덧없음에 관한 이야기.

종주를 향한 안내판 천왕봉과 반야봉으로 가는 길
▲ 종주를 향한 안내판 천왕봉과 반야봉으로 가는 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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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노고단. 저 멀리 반야봉과 천왕봉이 보였다. 또다시 두근거리는 심장. 무거운 배낭을 짊어 메고 또다시 저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싶어졌다. 그것은 좁은 등산로에 굵은 땀방울을 떨어뜨리며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픈 욕망이었다. 장엄한 산을 배경으로 마냥 걸으면서 나를 비우는 과정. 많은 산악인들이 끊임없이 지리산 종주를 찾는 것은 그것이 최소 1박 2일 동안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노고단 돌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건너편 노고단 정상으로 향한 문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휴식년제로 항상 굳게 닫혀 있던 그 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언제 또 닫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조건 노고단 정상을 향해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노고단 정상 돌탑에서 바라본 노고단
▲ 노고단 정상 돌탑에서 바라본 노고단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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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을 향한 문 자연휴식년제를 끝내고 열려 있는 문
▲ 노고단을 향한 문 자연휴식년제를 끝내고 열려 있는 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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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평탄했다. 고지대도 고지대였지만 사진 속의 예전 모습을 보니 사람들이 기존에 워낙 망가뜨려 놓은 이유도 있는 듯했다. 저렇게 무작정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니 수풀이 남아날 수 있었겠는가. 산이 깎이지 않고 이만큼 명맥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시민의식이 부족하다는 성급한 판단은 말자.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사적소유만 강조된 탓에 아직까지도 공공재 개념에 어색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럼에도 자연휴식년제를 도입하여 이만큼 자연을 되살린 것 자체가 기적인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서본 노고단 정상이었건만 산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구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걷힐 만하면 구름이 올라오고, 다시 걷힐 만하면 또다시 뿌옇게 구름이 끼고 그런 식이었다. 사진으로 만들어진 안내판을 보아하니 이곳에서 바라보는 섬진강은 예술일 터인데 마냥 아쉬울 뿐이었다.

운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노고단
▲ 운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노고단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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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를 나올 때도 그랬지만 여행의 원동력 중 하나는 아쉬움과 미련이던가. 내려다보지 못한 그 풍경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추후 꼭 쉬엄쉬엄 쉬어가면서 이곳저곳 샅샅이 지리산을 종주해 보겠노라고.

노고단을 내려오는 길. 정작 내가 정상에서 내려가면 구름이 걷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마냥 뒤를 돌아보며 지척거리는 발걸음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이번 지리산행의 운은 여기까지 닿았을 뿐,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2년 전 종주를 할 때도 천왕봉 일출만은 보지 못했는데 아직 3대의 덕이 모자라기 때문일까.

성삼재에 도착해 다시금 방향을 정한다. 다음 목적지는 예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정령치, 그리고 달궁계곡의 끝에 있던 지리산 전적기념관이었다.

빨치산의 흔적들

지리산 전적기념관의 시작 희생자분들을 추모한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 지리산 전적기념관의 시작 희생자분들을 추모한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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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치는 화엄사를 보고 난 뒤에 천은사를 본 느낌이었다. 이미 노고단까지 올라 밑을 내봤으니 무슨 감흥이 있겠는가. 구례 대신 남원이, 돼지령 대신 반야봉이 눈앞에 있을 뿐, 그나마 노고단보다 구름이 적어 밑을 볼 수 있었던 게 위로 아닌 위로였다.

정령치를 내려와 달궁계곡에서 점심을 먹고 지리산 전적기념관으로 향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볼 것 없는 기념관일 테지만, 앞서도 이야기한 바 있듯이 지리산에다가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나에게 지리산 전적기념관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장소였다.

그곳에는 다름 아닌 빨치산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빨치산. 이 땅에 대한 역사를 배운 이후 빨치산은 내게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왔었다. 하나는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고자 했던 좌파 게릴라로, 또 하나는 자신의 죽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이상을 펴기 위해 끝까지 싸웠던 지사들로서.

물론 그들 때문에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냥 그 희생만을 내세우며 그들을 폄하한다면 그것은 너무 결과론적인, 승자의 입장에서 쓴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당시의 희생이란 그 누구만의 잘못이 아니라 시대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의 시시비비는 차치하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빨치산은 다시 한 번 조명 받을 만하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결국 인간이 동물과 다른 최고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부귀영달만을 위해 애쓰는 용열한 군상이 판치는 요즘, 그들의 이상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새삼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드디어 지리산 전적기념관.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을 상상하고 있었던 난 그 작은 규모에 적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은 전적기념관이지만 국립공원 안내소가 그 건물을 반을 사용하고 있었고, 정작 지리산 전적에 관한 자료는 2층 구석에 그 구색만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헛웃음을 짓고 만다. 전적기념관이 커서 무에가 좋겠는가. 전쟁기념관이라는 것 자체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는데, 이 좁은 공간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기념관을 한반도 전체를 다룬 용산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추모의 장 선명하게 보이는 '추모'라는 글씨
▲ 추모의 장 선명하게 보이는 '추모'라는 글씨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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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과 토벌대의 격전 직후의 모습을 본뜬 모형을 지나 들어선 기념관. 코너의 이름부터 달라진 세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추모의 장’이라. 기념관에는 빨치산과 토벌대 각각의 전투기기와 생활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더불어 빨치산 출신의 증언이나 당시 시대상황 등이 끊임없이 비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예전보다야 비교적 중립적 시각으로 다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빨치산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었다. 안내판은 빨치산이 불어 파르티잔(partisan)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비정규 게릴라 군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임을 지시하고 있었다. 비록 빨치산에는 ‘빨갱이’로 비롯되는 우리의 편견이 묻어 있지만, 사실 빨치산의 원래의 의미는 인류의 역사상 보편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기념관 한편에는 또한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한시가 적혀 있었다. 비록 우리에게는 단순히 빨갱이 수괴였을지 모르지만, 그 한시에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어도 자신의 정절을 굳게 지키고자 했던 비극의 혁명가 이현상이 담겨 있었다.

地理風雲堂鴻洞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伐劍千里南州越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一念向時非祖國 언제 내 마음 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胸有萬甲心流血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기념관을 나서면서 드는 감정은 역시나 아쉬움이었다. 박제된 그들의 열정을 보는 것만으로는 빨치산의 흔적에 대한 기대가 채워지지 않은 탓이었다. 실제 지리산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흔적을 생생히 느끼고 싶었다. 2년 전 지났던 종주 길이 실은 50여 년 전 토벌대가 만들 길이라고 하니 이번에는 골짜기로 바위틈으로 해서 빨치산들이 숨어다녔던 그 길을 걸을 차례가 아니겠는가.

점심에 먹은 막걸리 기운 때문인지 기념관을 나온 나는 아버지께 핸들을 맡긴 채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워낙에 기대했던 지리산 전적기념관이므로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을 깨우는 동생 소리에 눈을 뜨니 아침에 일정을 세워두었던 실상사 입구였다.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천왕봉이 아직도 이곳이 지리산 기슭임을 이야기 있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다리를 넘어가야 하는 실상사의 입구는 매우 몽환적이었으며, 지리산 기슭 아담한 마을에 자리한 사찰답게 그 주변 풍경은 평화롭고 나른했다. 곳곳에 서 있는 장승들 역시 이 마을이 오래된 주거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리산 실상사의 입구 마냥 평화롭고 한적했던 그곳
▲ 지리산 실상사의 입구 마냥 평화롭고 한적했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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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의 두 탑 영광의 흔적
▲ 실상사의 두 탑 영광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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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실상사는 실망이었다. 화엄사에 천은사까지 보고 왔으니 동네 사찰 수준에 불과한 실상사가 눈에 찰 리 없지. 산기슭도 아닌 널따란 평지에 덩그러니 지어져 그 동네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았을 실상사는 이제 교통의 발달과 시대의 변화 때문에 지역민들의 일상을 모으는 기능보다는 쇠락한 문화재의 역을 도맡고 있는 듯했다.

사찰도 이를 인식했는지 전각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었지만 워낙 크고 웅장한 걸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실상사를 찾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나마 흘러간 영화를 웅변하듯 두 개의 탑만이 스산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만 실상사를 나와 덕유산 무주구천동으로 향했다. 지리산만큼이나 웅장한 덕유산이었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아 하룻밤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남덕유산부터 덕유산까지도 빨치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 터,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지리산과 묶어 한 번 종주를 해보겠다는 생각만을 간직한 채 일상으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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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지금은 비록 회사에 몸이 묶여 있지만 언제가는 꼭 공부를 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