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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14일 한승원 선생님댁에서 선물 받은 <추사> 김정희 1, 2권

추석 앞날인 지난 9월 24일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리 해산토굴에 대학생인 딸 가희와 아들인 일훈이를 데리고 방문했다. 추석을 앞둔 터라 고향을 찾아온 이대흠 시인도 함께 했다. 한승원 선생님은 바쁜 시간임에도 우리 일행에게 손수 작설차를 가져와 끓여주셨다.


차를 마시면서 한 선생님은 차 이야기와 이번에 출간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이야기를 감칠 맛나게 해주시면서 책(<추사 1·2>)을 선물해주셨다.


"추사의 삶을 통해 역사의 악순환을 각성시키고 싶었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 시대는 작가에겐 분명 난세일 법하다. 노(老) 작가 한승원이 이 '난세'에 화두로 조선의 혁명을 꿈꾸었던 비운의 정치개혁가 추사 김정희를 최근 세상에 던져 놓았다. 소설 <추사 1, 2>(열림원 간)가 그것이다.

 

'오만한 천재' 추사를 개혁적 지식인, 범속한 인간으로 재탄생시킨 한승원

 

한승원 선생님의 사인 선생님은 제 이름 아래 '대아'라고 써주셨다. 나는 대아의 참된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대아라 써주셨는데, 저는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소상하게 설명을 하여 주셨다. 그러나 난 아직도 참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며, 선생님의 뜨거운 사랑에 고마울 뿐이며, 열심히 살고자 한다.

이 '난세'의 시대에 김훈이 영웅 이미지에 감춰져 있던 인간 이순신을 끌어냈듯, 한승원은 '오만한 천재' 추사를 '개혁적 지식인' 추사, '범속한 인간' 추사로 재탄생시켰다.

 

천재 예술가로, 화려하지만 비운했던 정치가로 조선 후기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작가는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추사에 대한, 정치적 좌절과 오랜 유배가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오만함에 있다는, '명문가 출신으로 시·서·화 삼절에서 현묘한 경지에 이른 오만한 천재'라는 통념을 불식시켰다.

 

그러면서 추사 말년의 삶을 중심으로 고독과 좌절, 분투 속에서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로서 추사, 서얼 자식을 둔 한스런 아비와 범속한 인간으로서 추사의 면모를 거의 완벽히 그려냈다.


이 시대에 <추사>가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 까닭도,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과천 초당에 은거하던 추사 말년의 삶을 엿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하늘과 당이 감응하도록 써야 한다"는 이 '판전((板殿·경판각을 저장하는 전각)'이란 두 글자,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 일생에서 가장 소박하고 향기로운 보석 하나"를 만들려는 일이 일흔한 살의 예술가를 몹시 괴롭힌다.


"이러다가는 이 글씨를 쓰지도 못하고 죽게 될 듯싶다.”(1권 21쪽).
그는 결국 숱한 파지를 만들며 고뇌 끝에 최후의 명작을 남긴다.(소설 종결부분)

 

수문리 앞바다에서  지난 9월 15일 광주문화방송에서 맛이야기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 장흥에 왔다. 한승원 선생님과 함께 배를 타고 키조개 작업장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그곳에서 묵은김치와 키조개, 그리고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작가는 추사의 이처럼 빼어나고 아름다운 글씨와 그림과 간찰과 시들…. 그리고 신선이 남긴 것과도 같은 영험한 그의 작품들이 그의 천재적 소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유배지의 절대 고독과 고뇌, 좌절과 절망, 분투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는 추사의 시련을 통해 순종,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던 조선 후기 왕권이 무너져버린 혼란기를 접목하고 있다.

 

추사는 6세 때부터 스승인 박제가로부터 이용후생의 경학을 배웠다. 24세 때 중국 연경에서 근대문명을 견문했던 북학파 선구자였던 추사. 그는 외척의 세력을 제치고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개혁을 꿈꾸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보수세력 안동김씨 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말년(55세 1840년)에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절대 고독과 싸움이기도 했으며, 정치가로서 품었던 높은 욕망과 싸움이기도 했고, 한 인간일 뿐인 자기 자신과 싸움이기도 했다. 추사는 과거로부터 떠나 마음을 비우고 시와 그림에만 몰두했다. 걸작 '세한도', '불이선란'은 제주 유배지에서 탄생했다.

 

꿈꾸었던 욕망 버려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더욱 도드라진 '인간 추사'

 

 젊은 시절 선생님은 '덕도'라는 섬에서 나고 자랐다. 그래서 배멀미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스로 '뱃놈'이라 부르는 선생님, 배 위에서 묵은김치 이야기는 더욱 빛났으며, 묵은김치는 추사 김정희로 너무나 자연스레 옮겨갔다. 수없이 갈고 닦은 작가의 인내와 선생님이 수십 년을 찾아나선 추사의 행적은 바로 묵은김치였다.

작가는 추사가 그동안 꿈꾸었던 욕망을 버려가는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추사는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일에만 전념한다. 그리고 마침내 "글씨가 시이고, 시가 그림"인 경지, "전서가 해서를 꾀하고, 해서가 예서를 꾀하고, 예서가 행서를 꾀하고, 행서가 초서를 꾀하고, 초서가 다시 행서, 예서, 해서, 전서를 모두 꾀함으로써 새로이 만들어진, 어지러운 헝클어짐 속에서 찾아지는 정돈된 질서"의 경지에 이른다.(1권 7쪽)

 

소설은 부처를 받아들이고 '유마거사'가 되어버린 추사가 명필 현판을 쓰고 죽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추사의 50대 후반 이후의 삶은 이처럼 "잘못 흘러가고 있는 역사를 제대로 흘러가게 하려다가 보수 반대파들에게 당한 고난의 삶"이면서 동시에 절대 고독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꿈'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며 절대 고독 속에서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기간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추사는 지극히 범속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사실적 묘사가 '인간 추사'의 사실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추사는 생계를 위해 글을 파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유배지에서도 탈속한 예술인이 아니다. 사약을 받을까 봐 두려움에 떠는 범속한 인물이다. 추사는 또 젊은 첩을 말등에 태우고 즐거움에 빠지기도 한다.


"등줄기를 압박하는 초생의 볼록한 가슴과, 그의 사타구니와 엉덩이와 무릎과 발에 느껴지는, 질주하는 살진 암말 등허리의 탄력이 가슴에다 향기로운 술 같은 아릿한 환희를 풍겨주었다."(1권 14쪽)

 

한승원, 왜 새삼 이 시대에 추사를 불러냈는가


 우주의 섭리였다. 선생님은 늘 바다는 우주의 섭리라고 말씀했다. 키조개가 뻘속에 뿌리를 박고 입을 약간 벌리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주의 섭리라고 말했다.

작가는 왜 새삼 이 시대에 추사를 불러냈는가. 작가는 "역사의 악순환을 드러내고 싶어서였다"고 말한다.


"왜 하필이면 이 시대에 김정희를 쓰는가에 대한 당위성이 성립하지 않으면 소설을 쓸 수 없다. 추사는 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예술가로서 또 정치가로서 사회를 개혁하려 했던 그 시대 지식인이었고, 그런 지식인은 지금 시대에도 필요하다.

 

추사를 주저앉힌 보수세력은 오늘날, 이 땅의 어떤 거대한 보수집단을 닮았다. 역사는 반복된다. 나는 '추사와 그의 시대 이야기'를 통해 그 반복되는 슬픈 일을 나 스스로 각성하고 경계하고 싶었다."


자신의 소설사에서 원형의 상징성을 띤 공간인 고향 바닷가로 회귀, 해산토굴에서 왕성한 생산력으로 소설들을 '해산'하고 있는 원로작가 한승원.
 
그동안 주로 써 왔던 바다 소재의 소설에서 한 걸음 비켜나, 지금은 과거의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과 그 삶이 중심이 돼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소설 작업에 한창이다.


<소설 원효>, <초의>가 그랬다. 작가의 차기 작품 역시 역사상 인물이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추사>의 경우, '어쩌면 유배지' 같은 해산토굴에서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비우고 차와 연꽃과 여다지바다와 벗하며 창작에만 천착하고 있는 작가는 <추사>를 통해 자신의 고독한 예술적 삶을 투영시켰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지역신문인 장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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