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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쪽에 숨어 있듯이, 조용히 깃들어 있는 헌책방.
▲ 책방 앞에서 골목 안쪽에 숨어 있듯이, 조용히 깃들어 있는 헌책방.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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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을 가슴에 안으려면

'숨어있는 책'에 들르기 앞서 두 군데 헌책방을 찾아갔습니다. 이제 가방은 꽉꽉 들어차서 더 들어갈 곳을 찾을 수 없는 노릇. 하지만 그예 숨어있는 책까지 찾아옵니다. 보고픈 책이 있으나 살 수 없더라도, 그냥 눈으로 구경하며 마음에 담아둘 수 있다면, 이렇게 하는 일로도 좋지 않겠느냐 생각하면서.

속은 쓰릴 테지요. 마음에 담뿍 와 안기는 책을 가슴에 품을 수 없다면. 하지만 책을 가슴으로 품는 일이란, 주머니에 돈이 넉넉해서 이 책 저 책 걱정없이 사들여서 두 팔이 무겁도록 껴안는 일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비록 침을 흘리며 부러워할는지 모르더라도, 책방에 서서 차근차근 살피고 돌아보고 읽으면서 곰곰이 되새겨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가슴으로 책을 꼬옥 안을 수 있지 않을까요. 부자가 아니더라도 책을 읽을 수 있고, 책을 얼마든지 장만할 수 있는 부자라고 해서 가슴 깊이 책을 안아들이거나 맞아들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주머니마저 텅 비었군요. 인천 집으로 돌아갈 찻삯만 남았습니다. 그래도 헌책방 한 군데를 더 찾아갑니다. 책을 못 사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제가 못 찾아온 사이 어떤 책들이 구석구석 쌓였는가 헤아려 보고자.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한 권도 좋고, 두 권도 좋고, 세 권도 좋습니다. 주머니 닿는 대로 넉넉하게 고르면 됩니다.
▲ 책 고르기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한 권도 좋고, 두 권도 좋고, 세 권도 좋습니다. 주머니 닿는 대로 넉넉하게 고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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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말을 넘어서

주머니가 텅 비니, 책을 구경하는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다문 천 원이라도 있으면서 ‘천 원짜리 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조차 아니니까요. 마음이 벌써 여려졌나요. 책방 아저씨한테 외상도 되는지 물으려다가 그만둡니다. 문득, 은행계좌로 넣으면 될까 싶은 생각.

책 볼 생각보다, 책값 걱정을 하느라 책시렁과 눈길을 제대로 못 맞추고 있다가 《백기완-거듭 깨어나서》(아침,1984)라는 책을 끄집어내 봅니다. 헌책방에서 드문드문 보는 책이며, 저는 예전에, 얼추 열 해쯤 앞서인가 읽었던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 담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안 떠오릅니다. 읽은 지 열 해도 넘었으니 다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그래, 예전에 읽었던 책은 여기저기 잔뜩 밑줄을 그어 놓았으니, 아무것도 그어지지 않은 말끔한 책으로 다시 읽으면서 내 마음에 와닿는 곳을 찾아보아도 좋겠지.

책 안쪽에는 ‘정동익’이라는 분이 ‘박찬종’이라는 사람한테 드린다는 손글씨가 있습니다. ‘정동익’이라는 이름이 낯익구나 싶어 판권을 보니, ‘아침 출판사’ 펴낸이. ‘박찬종’은 정치하는 사람.

.. 설사 그들 두 젊은이가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하며 자살을 했다고 하드라도 그것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며 피흘리는 조국의 역사가 허무에 빠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심약한 그들 한 쌍이 제국주의 침략정책에 오염된 것이었으니, 그 당시 한반도 국경지대에서 들고 일어난 독립군의 이야기는 못하게 하면서 이들 병든 사랑이야기만은 얼마든지 떠돌아다니도록 문화정책을 써 온 것은 그네들의 제국주의 지배의 위기를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  〈146쪽〉

책은 아주 깨끗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박찬종 님은 <거듭 깨어나서>라는 책을 받기만 했을 뿐, 읽지는 않았구나 싶어요. 책 선물 받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받은 책을 고맙게 여기며 차곡차곡 읽지는 않으니까, 뭐. 덕분에 저로서는 스물세 해나 지난 묵은 책을 아주 깨끗한 채로 만날 수 있습니다.

박찬종 님이 지난날 이 책을 읽었다면 백기완 할아버지한테 여러모로 슬기나 깜냥을 얻었을 테지만, 박찬종 님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한테는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스물세 해가 지난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고맙게 받아안을 수 있도록 책 간수를 깨끗하게 해 주었으니, 우리 세상에 좋은 일을 하나 베풀어 준 셈이에요.

<숨어있는 책>은 1층과 지하, 두 곳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갈래에 따라 알뜰히 나누어 놓은 책시렁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마음밭을 살찌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책시렁 한켠 <숨어있는 책>은 1층과 지하, 두 곳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갈래에 따라 알뜰히 나누어 놓은 책시렁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마음밭을 살찌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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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여 그때 나는 쇼팡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쇼팡을 모르는데 그의 이별곡을 알 턱이 없었고, 따라서 그 곡을 실지로 들었을 때도 솔직히 말하여 슬픔 같은 것을 느껴 보지 못했으니, 그의 말마따나 어느 면으로든지 내가 무식한 건 사실이었다 ..  〈185쪽〉

아는 것이 없기로 치자면, 제 깜냥은 백기완 님 못지않습니다. 저는 그나마 쇼팽이니 슈베르트니 모짜르트니 하는 이름은 학교를 다니며 들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니 림스키코르 어쩌구저쩌구 하는 이름도 들었고요. 다만, 이분들이 남긴 노래가 어떤 가락인지는 하나도 몰라요.

으젠느 앗제니 스티글리츠니 안젤 아담스니 하는 분들 이름도 요사이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 이분들이 사진을 참 잘 찍었네 하는 생각은 들지만, 우리 나라에도 이만하게 찍는 사람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또 우리 나라뿐 아니라 제3세계라 하는 나라에서도, 덴마크나 스웨덴이나 네덜란드나 스페인 같은 나라에도 이만하게 찍는 사람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러나 진정한 작가는 작품으로 실천하기 전에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 ..  〈236쪽〉

참된 작가뿐 아니라 참된 교사도, 참된 기자도, 참된 공무원도, 참된 버스기사도 말이 아닌 온몸으로, 몸짓으로, 매무새로 보여주어야겠지요. 그 어느 노동자든, 농사꾼이든, 고기잡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백 마디 말이 아니라 한 가지 몸 움직임으로, 백 마디 핑계가 아니라 한 번 고개숙임으로 자신을 추슬러야지 싶어요.

<the complete work of Raphael>(Harrison House,1969)은 650쪽에 이르는 큰 책입니다. 빛깔 넣은 그림은 49점, 흰검 그림은 875점을 넣은. 60년대에 나온 책임에도 그림이 깨끗하고 짜임새도 좋습니다. 나라밖 책들은 참 훌륭하구나 생각하면서 판권을 살피니, ‘made in Japan’이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아하, 일본에서 찍어냈군요.

쌓이다가도 허물어지다가도 사라지다가도 다시 쌓이게 되는 책탑. 우리 손길과 눈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책탑 쌓이다가도 허물어지다가도 사라지다가도 다시 쌓이게 되는 책탑. 우리 손길과 눈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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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책 하나에

라파엘이라는 분이 펼쳐 보인 그림을 이만한 책으로 담아낼 솜씨가 우리 나라 책마을에도 있을까요. 또한, 이만한 책을 펴내는 출판사가 있을 때 스스럼없이 돈을 들여서 이 책을 사들일 책손이 우리 나라에 몇 분이나 있을까요. 라파엘이 아닌 고호 그림을 다룬 책도, 고호 그림이 아닌 박수근 그림을 다룬 책도, 이응노 그림이나 오윤 그림을, 이쾌대나 이상범 그림을 이만하게 담아낸 책이 나올 때 스스럼없이 주머니를 열 만한 한국 책즐김이는 몇 사람쯤 될까요.

어쩌면 책값이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낼 수 있습니다. 여느 일꾼들 살림살이로서는 너무 버거울 수 있습니다. 그래, 출판사에서는 ‘완전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두고두고 간수하며 즐길 수 있는 큰 그림책을 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책을 사서 즐기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급판’ 작은 그림책을 값싸게 엮어내어, 큰 그림책 못지않은 느낌과 깊이를 함께할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 주면 좋겠어요.

이처럼 두 가지 판으로 책을 내는 일이란, 돈이 쏠쏠히 드는 일인 만큼, 돈있는 출판사 아니고는 엄두를 못 낸다고 하겠는데, 돈이 좀 들어가는 책이라면 기꺼이 돈을 들일 수 있도록 작은 출판사들도 살림을 조이고 차근차근 아끼고 모아서 멋들어진 책 하나를 남기도록 마음을 기울여 볼 수 있겠지요.

우리들 책손이 백만 가지 책을 사서 읽어야만 하지 않듯이, 책마을 사람도 백만 가지 책을 펴내야만 하지 않아요. 한 가지 책이라도 알뜰히 읽어내며 속속들이 받아먹을 줄 알아야 좋습니다. 한 가지 책이라도 알뜰히 엮어내어 읽는이 마음에 깊은 울림과 뜨거운 눈물과 웃음을 자아낼 수 있으면, 책마을 사람들 땀방울이 한껏 살아나고 뜻깊으리라 믿습니다.

아참, 책값은 한 푼도 없었으나, 책방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은행계좌로 돈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에구구. 크고 좋은 책이었던 만큼, 헌책방에서도 책값이 만만치 않습니다. 라파엘 그림책 한 권에 4만 원이었으니까요.

백기완 님 수필모음 하나와 라파엘 그림책 하나.
▲ 고른 책 두 권 백기완 님 수필모음 하나와 라파엘 그림책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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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서울 신촌 〈숨어있는 책〉 / 02) 333-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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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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