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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지식이 다른 학문 지식보다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관찰이나 실험의 역할이 큰 작용을 한다. 과학자들이 내놓은 갖가지 이론이나 가설들은 객관적인 실험에 의해 검증되거나 기각되기 때문이다. 혹은 과학이란 실험을 통해 획득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론화한 지식이라는 통념도 널리 퍼져 있다. 물리학을 연구하는 나 또한 학창시절엔 뉴턴의 운동법칙(F=ma)이 실험실의 실험 결과에서 도출된 것으로 오랫동안 오해했었다.

'굳건한' 과학이론은 반증이 어렵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심상은 우리에게 꽤 익숙하고 또 오래되었다. 혹자는 이를 주로 베이컨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경험주의적 전통에서 찾고 있다. 비교적 최근의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Karl Popper)는 과학과 비과학을 가르는 기준으로 이른바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을 제기했다.

어떤 과학이론에 대해 그 예측과 부합하는 실험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그 이론이 온전히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예측과 전혀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오게 되면 그 이론이 틀렸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듯 과학 활동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내부에 자신을 기각할 수 있는 '반증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이 포퍼의 요지이다.

그러나 지난 기사(6월 18일 '한나라 집권 땐 나라 망한다?/ 과학적으로 한번 따져봅시다')에서도 보았듯이 관찰은 기본적으로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관찰의 이론 의존성). 어떤 이론적 편향도 없는, 절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순수한 관찰이나 실험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관찰이나 실험은 이론에 의해 '구성'된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과 더불어 과학에 대한 경험주의적 오해에 타격을 가한 것이 바로 '뒤엠-콰인(Duhem-Quine) 명제'이다. 이에 따르면 하나의 실험적 사실에 대해 원칙적으로 무한히 많은 이론과 가설이 존재할 수 있고 그 층위 또한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실험이 이론과 다른 결과를 내었다고 하더라도 그 어긋남이 그 이론의 제1가설에 기인한 것인지 그 하부의 수많은 보조가설에 의한 것인지 논리적으로 확증할 수가 없다. 그래서 뒤엠-콰인 명제는 '증거에 의한 이론의 과소결정(underdetermination of theory by evidence)'으로 불린다.

수성의 공전궤도는 우주공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천천히 움직인다.
▲ 수성의 근일점 이동 수성의 공전궤도는 우주공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천천히 움직인다.
ⓒ 이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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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 역학 '철옹성' 깬 아인슈타인 '이론'

이 때문에 하나의 과학 이론을 실험으로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 가장 성공적인 과학 이론 중의 하나였던 뉴턴 역학도 그와 어긋나는 천문학적 관측들의 무수한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뉴턴 역학과 맞지 않는 결과들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뉴턴 역학이 틀렸다는 점을 반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대부분 그 관측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고려하지 않은 여러 요소들의 부수적 효과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다.

과학자들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천상의 비밀을 벗겨 낸 뉴턴 역학이 그렇게 쉽사리 반증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언뜻 이 모든 상황이 지당하고도 자연스러워 보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사태가 좀 복잡해진 것은 역시 뉴턴에 맞먹는 슈퍼스타인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고 나서부터였다.

뉴턴 역학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 중에 수성의 근일점(近日點, perihelion) 이동 현상이 있다. 뉴턴 역학에 따르면 (그리고 케플러가 그 이전에 발견한 바에 따르면)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안정되고 고정된 타원궤도를 돌고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수성의 타원궤도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궤도 전체가 천천히 회전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궤도가 이렇게 회전하게 되면 궤도의 근일점 또한 이에 따라 회전하게 되니까 '근일점 이동'이라는 말이 붙었다. 뉴턴 역학도 이 근일점 이동을 갖가지 요소로써 설명하지만 관측된 결과와 비교해서 100년에 약 44초(1초는 1도의 1/3600에 해당하는 각도)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 미지의 효과 때문에 뉴턴 역학이 거부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가설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결국 이 문제는 아인슈타인에 의해 해결되었다. 그의 중력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뉴턴의 고전역학에는 없는 새로운 중력효과가 생겨난다. 이에 의한 수성의 근일점 이동이 놀랍게도 100년에 약 43초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무수히 많은 실험적 도전에도 끄떡없었던 뉴턴 역학이 무너진 것은 100년에 43초라는 미세한 관측이 아니라 그것을 매우 그럴 듯하게 설명한 아인슈타인의 '이론' 때문이었다.

중성미자 개수 실험을 둘러싼 과학계 논쟁

중성미자(neutrino)를 이용한 최신 연구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자연에는 경입자(輕粒子, lepton)로 불리는 입자가 6개 존재한다. 전자(electron) 및 그 형제뻘인 뮤온(muon)과 타우온(tauon), 그리고 이 각각의 파트너 격인 전자형 중성미자, 뮤온형 중성미자, 타우온형 중성미자가 그들이다.

이 세 가지 중성미자는 전자, 뮤온, 타우온과 각각 짝을 이루어 약한 상호작용에 참여한다. 그래서 전자의 형제가 3형제이기 때문에 자연에는 3종류의 중성미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성미자의 개수에 관한 한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의 실험은 이 자연스러운 생각을 뒷받침해 왔다.

그런데 1993년 미국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시작한 LSND(Liquid Scintillator Neutrino Detector, 액체발광 중성미자 검출기)실험은 자연에 또 하나의 중성미자가 존재해야 함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충실한 경험론자라면 이 새로운 실험결과에 따라 지금까지 구축된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폐기하거나 그 대체물을 찾아나서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LSND의 실험결과가 나온 이후 오히려 그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물리학자들이 상당수였다.

그러다가 올해 봄 LSND의 실험결과를 검증하는 새로운 실험 결과가 나왔다. MiniBooNE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실험 또한 미국에서 행해졌는데 높은 신뢰도로 LSND의 결과를 기각하는 것이었다. 이 결과가 나온 지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각종 국제학회에서는 이 결과에 큰 신뢰를 보내는 듯한 분위기이다.

같은 실험결과를 놓고도 하나는 오랫동안 잘못된 실험으로 여겨진 반면 다른 하나는 즉각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론 자체의 정합성과 완결성이 굳건하면 그만큼 한두 실험결과로 폐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첫 당무보고를 받기 위해 8월 24일 오전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후보실내 접견실 탁자에 조선중앙동아 세신문만 놓여있자, "세 신문만 보는 줄 알 거 아냐"라며 황급히 신문을 덮고 있다.
 첫 당무보고를 받기 위해 8월 24일 오전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후보실내 접견실 탁자에 조선중앙동아 세신문만 놓여있자, "세 신문만 보는 줄 알 거 아냐"라며 황급히 신문을 덮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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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의혹'에도 지지후보를 바꾸기 어려운 까닭

현재 인류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정확도와 정밀도로 행해지는 실험의 결과마저도 그와 상충하는 이론을 완벽하게 배제할 수 없다면, 일상적으로 우리의 감각을 통해 얻게 되는 온갖 '관측'들이 우리 머릿속의 '이론'을 쉽사리 바꾸지 못하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각종 사회 현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대선후보 검증이다. 본격적인 대선경쟁이 시작되면서 각 정당과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대선에 나선 후보들을 다각도로 '검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가 지지하는 후보의 흠결이 드러나더라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의 지지를 철회하기란 무척 어렵다. 대개 우리는 그 검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후보의 적극적인 해명을 기대한다.

특히 그 후보의 지지율이 높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거나, 공신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편을 드는 경우는 이 '이론'이 더욱 굳건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명박 후보는 그 많은 의혹과 검증공세를 뿌리치고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될 수 있었다. 굳이 이름 붙인다면 '검증에 의한 후보의 과소결정'이라고나 할까.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과소결정이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비교적 중립적인 사람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보수언론이 이명박을 음양으로 밀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신문시장을 80% 이상 장악한 이들이 쏟아내는 기사에 따르면 이명박은 그야말로 '잘 갖추어진 이론'이다.

5년 내내 말썽 많은 대통령으로 위치 지워진 노무현과 비교하거나 청계천이라는 '객관적인 실험'과 결합하면 그 이론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진다. 설령 내가 이명박을 지지하지 않는 중립적인 입장이더라도 이명박이 괜찮은 대선후보라는 이론에 큰 이의를 달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론'과 영향력 있는 '학술지'가 만났을 때

이런 배경 속에서 터지는 한두 의혹은 말하자면 아인슈타인 이전의 수성의 근일점 이동과도 같은 것이다. 관측된 비정상성(anomaly)이 훌륭한 이론체계였던 고전역학 속에서 해명되리라고 기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명박의 수많은 위장전입은 '명박삼천지교'로 오히려 동정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이 과정이 보수언론에 의해 주도된 것은 마치 <네이처>나 <사이언스>가 직접 나서서 뉴턴의 손을 들어준 것과도 같다.

똑같은 위장전입 때문에 장상이나 장대환이 국무총리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들이 괜찮은 카드라는 '훌륭한 이론'이 없었거나, 그 이론을 만들고 유포시킬 '학술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론이 없는 관측과 실험과 검증은 사실상 무의미할 뿐이다.

이렇게 한두 의혹으로 이명박 이론이 쉽게 반증되지 않으면 그것은 그 이론이 옳은 것이라는 더욱 강력한 신뢰를 퍼뜨리게 된다. "모든 의혹과 검증은 이미 통과했다"는 말이 본선에서 나올 것이 분명하다.

5년, 10년 전에도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혹자는 당시 이회창 후보가 아들 병역이나 김대업 사건 등 결정적인 검증과 실험 때문에 패배했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그런 결정적인 검증에도 이회창이 중도낙마 없이 근소한 표차까지 따라붙은 것은 그가 훌륭한 대통령감이라는 그럴듯한 이론 때문이었다.

범여권 후보들은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 검증을 주장해 왔다. 사진은 9월 7일 광주 5.18기념문화관에서 열린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후보자 호남지역 정책토론회 .
 범여권 후보들은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 검증을 주장해 왔다. 사진은 9월 7일 광주 5.18기념문화관에서 열린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후보자 호남지역 정책토론회 .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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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에 보낼 수 있다? 경험만능주의의 위험

나는 대선후보 검증이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얻는 정보로부터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판단기준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모두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기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검증이 그 자체로서의 역할을 최대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실험결과'들을 발굴하고 보도하고 유포하는 '학술지'들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입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쉽게도 아직 우리 사회는 그렇게 좋은 '학술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조작된 이론의 가능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이명박 이론'의 최대 취약점은 남북문제이다. 이 이론으로는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의 미래를 설명하기가 꽤 어렵다. 경제대통령이라는 그의 이론은 최대 강점이자 최대 약점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아무 이론도 없이 무작정 검증과 실험에 뛰어드는 범여권 후보들을 보면 참으로 딱하기만 하다. 뒤엠-콰인 명제는 "한방이면 보낼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얘기하고 있다. 또한 이명박 이론이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그 나름의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후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관측과 실험의 이 원초적인 한계는 후보검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건과 현상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경험만능주의에 빠질 위험에 항상 처하게 된다.
자신의 경험적 판단력을 과신한 노무현 대통령이 '변양균'이라는 익숙한 도끼에 발등 찍힌 것도 그 때문이다. 제기된 의혹이 "깜도 안된다"거나 "소설 같은 이야기"로 치부되는 것은 노무현에게 변양균이 이미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론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정치, 경제, 외교, 남북관계 등 모든 문제에서 이 위험을 늘 경계하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태그:#대통령 , #이명박, #뒤엠 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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