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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융숭한 환송을 받으며 한양을 출발한 하륜의 마음은 경쾌했다. 조상을 끔찍이 모시는 임금의 특명을 받아 함길도에 행차한 자신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철원과 김화를 지나 창도 삼거리에서 잠시 망설였다. 회양을 지나 철령을 넘으면 지름길이고 우회하여 단발령을 넘으면 하루가 더 걸리지만 금강산을 거치는 길이다.

언제 또 다시 금강산 구경을 나오랴 싶어 단발령 길을 택했다. 금강산 자락에 접어드니 온 산이 단풍으로 불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만산홍엽의 풍악(楓嶽)이 장관이었다. 당나라의 대문호 소동파가 해동의 으뜸이라고 극찬했던 것이 과장은 아닌 것 같았다. 북쪽에는 옥밭봉과 남쪽에는 성봉대가 있는 마루턱에 올라서니 여기저기에서 즐거운 탄성이 울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점심이나 먹고 갑시다."

고갯길을 올라왔으니 배도 고프고 쉬어가자는 얘기다. 가마꾼을 비롯한 행차인원이 30여명이다. 작은 숫자가 아니다. 마루턱에 행차를 멈추도록 했다.

"인석들아 점심은 마음에 점(點)을 찍는 것이야. 장소를 옮겨 가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던 당나라에서 다음 장소의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간단한 먹거리를 대접하는 것을 톈신(點心)이라 하였다. 조금만 먹고 금강산 구경이나 실컷 하도록 하여라."

"우리 같은 무지랭이 들이야 금강산 구경해서 무에다 쓴답니까? 먹는 게 남는 것이지요. 안 그러냐? 장쇠야. 으헤헤헤."

가마꾼들이 하륜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쑥덕거렸다.

"금강산은 지리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다. 또한 백두산, 묘향산, 삼각산, 지리산과 함께 우리나라를 수호하는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 동악(東嶽)이라 불렀다. 영산으로 백성들의 숭앙을 받아왔으니 몸가짐에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라."

음식을 받아든 가마꾼들의 얼굴로 환해졌다. 동트기 전 아침을 먹고 해가 중천이니 시장기를 느꼈을 것이다. 배고픔에 식탐이 겹친 장정들이 먹느라 소란스럽다. 점심이라는 생활 습관이 중국에서 유입되기 전, 우리네 백성들의 식생활은 1일 1식 내지는 1일 2식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가마를 메고 걸어야 하는 가마꾼들에게 특별히 3식이 제공되었다.

가식의 옷을 벗어버린 개골산을 보고 싶다

배고픔을 해결한 장정들이 쭈그리고 앉아 잡담을 나누는 동안 하륜은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암괴석이 천지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가히 선경(仙境)이었다. 신선이 따로 없었다. 자신이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시 한수가 읊어져 나올 것만 같은데도 시심(詩心)이 메말랐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왕명을 잠시 접어두고 내금강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불끈거렸다.

'봄이면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겨울이면 개골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우리의 선인들이 너무 멋있다. 단풍으로 불타는 지금을 풍악이라 하였으니 시적(詩的)이지 않은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내 다시 금강산을 찾는다면 가식의 옷을 벗고 속살을 보여주는 개골산을 찾으리.'

비로봉을 바라보고 있는 하륜의 머리위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반가웠다. 금강산 자락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새였기 때문이다. 금강산에는 새들의 먹이가 되는 벌레가 많지 않기 때문에 새의 개체수가 적었다. 새처럼 훨훨 날아 내금강으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회암사에 있던 자초는 왜 여기까지 들어와 죽었지? 열반산에 들어와 열반(涅槃)하려고? 열반은 아무나 하나. 권력에 근접하지 않으며 학벌에 미혹 하지 않고 재물에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의 경지에서 열반할 수 있는 것이지, 왕사가 되어 권력 주변에서 맴돌았던 자초가 열반이라니 날아가는 새가 웃겠다.'

한양을 도읍지로 정할 때, 인왕산에 올라 태조 이성계에 바짝 붙어 인왕 진산론을 펼치던 무학대사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승려가 왕사가 되는 순간 그는 승려가 아니라는 것이 하륜의 지론이었다. 이 생각은 정도전과 함께 공유했다. 불타는 단풍을 바라보던 하륜이 깊은 사색에 잠겼다.

'나무 가지에 매달린 단풍이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살기 위한 절규 말이다. 겨울이 다가옴을 감지한 나무는 동해(凍害)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잎을 떨구어 내려 하고, 잎은 매달려 있으려하니 참 처절한 싸움이다. 나뭇잎을 떨어내지 못하는 나무는 동상으로 죽는다 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잎이 발버둥 쳐도 나무 잎은 결국 떨어져 나무의 양분이 되겠지?'

훗날 어떤 사나이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했는데 생각하는 만큼 들리나 보다. 심오하다. 사나이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맞는 말이다. 아는 만큼 보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배우면 알게 된다. 허나, 배운다고 낙엽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것을 듣고 생각한다는 것은 경지가 다르다.

'임금과 신하도 나무와 나뭇잎의 관계일까? 그렇다면 잎이 지지 않은 낙락장송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등골이 오싹했다. 하륜이 무릎을 치며 탄복했던 바로 그것 이었다. 시간이 가면 아무리 매달려도 떨어진다.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자신의 생각을 누가 훔쳐보지 않았을까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나마 불경스러운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서둘러 출발한 하륜은 철령에 이르렀다.

철령을 탐내는 명나라의 속셈을 알 것 같기도 했다

▲ 경복궁의 진산 백악산. 광화문 사거리에서 바라보면 비틀어져 있다.
ⓒ 이정근
철령에서 바라본 조국산천은 장엄했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백두산 정기가 태백산 등허리로 내려가는 길목 철령. 조국의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 혈맥에 서있는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고 목울대에서는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왔다. 명나라가 왜 철령을 탐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철령은 대륙으로 가는 길목이다. 철령을 밟는 자가 대륙으로 나갈 수 있고 철령을 잃는 자는 반도에 갇히게 된다. 대륙의 맹주 명나라는 조선을 반도에 가두어 두기 위하여 철령을 요구했고 우리는 지켰다. 그것이 비록 사대하여 얻은 것이지만 전쟁으로 잃은 것 보다 낫다고 생각되었다. 한양에 돌아가면 임금에게 주청하여 철령에 조선이라 새겨진 쇠말뚝을 꼭 박아두고 싶었다.

철령을 넘어 함길도에 들어갔다. 예원군에서 하룻밤 묵으며 오른쪽 턱 위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종기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하륜은 주치의로 대동한 방민으로 하여금 질침(蛭針) 요법을 쓰게 하고 함흥부에 들어가 임금의 할아버지 환조를 모신 정릉(定陵)과 할머니를 모신 화릉(和陵)을 살펴봤다.

정릉과 화릉을 살펴보는 동안 환송연 막간에 임금이 던진 "천세(千歲)를 생각하시오"라는 한 마디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 태종이 천하의 도참 하륜을 동북면에 보낸 것은 그냥 살펴보라고 보낸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를 잘 모셔 왕업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태종은 천년(千年)의 수성을 생각하고 보낸 것이다. 천년사직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감정하라고 보낸 것이었다.

성리학적 측면에서 도참을 배척한 태종은 하륜의 풍수는 신뢰했다. 특히 한양천도 당시 하륜이 주장했던 무악 번영론에 아쉬움이 남아 연희동에 이궁을 지었고 백악산이 비틀어져 장자승계가 어렵다는 주장에 동의하여 경복궁을 멀리하고 창덕궁을 지었다. 이러한 하륜에게 할아버지의 묘를 감정해보고 싶었다. 오늘의 현안도 장자 양녕대군에게 왕통을 승계 해주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다. 그러나 백악의 훼방이었을까. 역사는 세종으로 흘렀다.

귀주동에 자리한 정릉과 화릉 능침을 살펴보던 하륜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굳어졌다. 할아버지를 모신 화릉은 천하의 명당 터에 자리 잡았는데 할머니를 모신 화릉은 진산에서 각도를 벗어나 있었다. 음택에 음, 즉 여자를 모신 방위가 틀어지면 자손이 귀하다. 양의 기운을 받아 150년은 버티겠는데 200년이면 기운이 고갈되어 자손으로 아귀다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한양에 돌아가면 화릉은 천장해야 된다고 주청하고 싶었다.

놀라운 예지력이다. 이로부터 딱 151년 후, 왕통을 이어갈 후손이 끊겨 덕흥군의 아들을 옹립하여 선조대왕이 탄생하지 않았는가. 여인천하 치마폭에 휘둘려 세월을 보낸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 덕흥군이다. 명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손자가 등극하였으니 이 분이 선조대왕이다. 이로부터 시작한 왕손 품귀현상은 드디어 강화도의 나무꾼을 데려다 철종을 만드는 사태에 까지 이른다.

관아에 마련된 숙소에 돌아온 하륜은 대동한 주치의 방민으로 하여금 종기부위에 질침을 시침하라 일렀다. 질침은 사혈(瀉血)침술의 하나로 환부에 거머리를 붙이거나 배(梨)와 같은 흡인력이 강한 약재를 붙여 죽은피를 뽑아내는 한의술이다.

질침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은 하륜은 정평부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륜의 일거수일투족은 속속들이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하륜이 병환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접한 태종은 내신(內臣-내시) 황도를 급히 파견하여 하륜의 병을 위로하고 병세를 알아오라 명했다. 성질이 급한 태종은 황도의 귀환을 기다리지 못하고 어의(御醫) 이헌을 불렀다.

"산릉을 살펴보던 진산부원군이 병을 얻어 정평부에 누워있다. 역마를 내줄테니 화급히 달려가 내 몸처럼 치료해주도록 하라."

임금과 동격으로 치료하라는 명이다. 왕이 역마를 내준다는 것은 쉬지 않고 가라는 뜻이다. 말(馬)은 고속으로 어느 정도 달리면 지쳐서 달리지 못한다. 이럴 때 지친 말에서 내려 새말로 바꾸어 타는 곳이 역참이다. 역참은 국가 안보에 없어서는 아니 될 중요한 교통 통신망이다. 중앙집권체재를 강화하고 있던 태종은 전국 41역로와 516 역참을 병조에 소속시켜 잘 정비해 놓았다.

어의(御醫) 이헌이 탄 말이 창덕궁을 빠져나와 흥인문을 통과할 때였다. 한필의 검은 말이 날쌔게 따라 붙었다. 천리 길도 쉬지 않고 달릴 것 같은 하체가 잘 빠진 준마였다.

태그:#이방원, #하륜, #금강산, #점심, #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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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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