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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옥헌 원림 전경.
ⓒ 오승준
여름이 깊어가면서도 가을을 기다리게 되는 요즘. 길가 도로변이나 아파트 단지, 오래된 정자 주변에서 화사한 연분홍·진분홍색 혹은 흰색의 꽃을 피우는 꽃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바로 목 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다.

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 해서 '간지럼나무'라고 한다. 이 꽃이 질 때쯤 벼가 다 익는다고 해서 '쌀밥나무'라고도 한다.

백일홍은 두 가지가 있다. 화단에 심는 초본성과 나무에 꽃을 피우는 목본성이 그것이다. 두 식물은 사실 식물학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백일홍은 국화과에 속하는 초본성이고, 목 백일홍은 부처 꽃과에 속하는 목본성이다. 모습을 보아도 두 식물이 왜 같은 이름을 가졌는지 이상할 정도이다. 그것은 꽃철이 한여름 100일 이상 간다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다.

두 식물 모두 작은 꽃들이 차례로 피고 지면서 100일 동안 꽃핀다. 이 꽃이 지면 가을이 오고, 그래서 목 백일홍의 꽃말이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인가 보다.

▲ 사각의 연못과 동그란 섬.
ⓒ 오승준
배롱나무는 중국이 원산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지 않는다. 즉, 심어서 가꾸어야 자라는 나무이다. 그런데도 옛 건물이나 산소 주변을 보면 오래전부터 배롱나무가 심어진 흔적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배롱나무가 오래전부터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다.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에 있는 명옥헌 원림이다.

▲ 연못의 꽃잎을 부지런히 카메라 앵글에 담고 있는 사진작가.
ⓒ 오승준
지난 일요일 지인들과 함께 명옥헌 원림을 찾았다. 호남고속국도를 타면 동광주 나들목으로 나가 광주교도소, 국립5·18묘지 입구를 거쳐 담양 고서 사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창평 방면으로 1.5㎞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명옥헌 원림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피어서 열흘 동안 아름다운 꽃이 없다지만 백일홍은 다르다. 며칠 동안 눈부시도록 화사하게 피었다가 냉정하게 꽃잎 떨어뜨리는 그런 꽃이 아니다.

이 백일홍은 어느 한철 며칠 눈부시도록 화사하게 피었다가 냉정하게 꽃잎을 떨어뜨려 버리지 않는다. 그것도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오래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날마다 새 꽃을 피워낸다.

▲ 원림 주변의 노송들.
ⓒ 오승준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도종환의 '목 백일홍'에서 )


명옥헌(鳴玉軒) 원림(苑林)은 시방 팔월 땡볕에 진분홍 세상을 펼치고 있다. 쏟아지는 말매미 목청에 진분홍 꽃잎은 한층 투명하고 붉어진다. 구름도 바람도 쉬어가는 정자 옆으로 흐르는 냇물에서는 세월의 비늘이 굽이친다.

커다란 나무에서 피워낸 붉은 꽃과 그 꽃들이 선홍빛으로 물들인 연못, 그 위에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포개지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명옥헌 원림. 연못에 비친 백일홍과 하늘의 모습이 색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 명옥헌 정자 앞에서 잠시 쉼을 얻고 있는 방문객들.
ⓒ 오승준

명옥헌 원림은 목조기와집과 주위 경관을 그대로 살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민간정원으로 담양 소쇄원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곳이다. 1300평이 넘는 넓은 뜰에 아담한 정자와 깨끗한 냇물, 그리 크지 않는 연못, 그리고 연못가의 배롱나무와 노송이 조화를 이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명옥헌에서 내려다보는 정원은 마치 한폭의 그림 같다. 사각의 연못에 동그란 섬이 있고 섬 위에는 백일홍 몇 그루가 앙증맞게 서 있다. 사각 연못은 땅을 의미하고 동그란 섬은 하늘을 뜻하며 정자에 앉은 사람과 어우러지면 천지인의 합일이 된다든가.

▲ 50여그루의 백일홍 물결이 명옥헌 원림의 여름을 무릉도원으로 수놓고 있다.
ⓒ 오승준
명옥헌은 인조반정에 기여한 오희도의 아들 명중(1619∼1655)이 호봉산 기슭에 꾸민 원림으로, 낮은 구릉에 정자를 짓고 그 앞에 연못을 판 다음 중앙에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연못과 정자 주변에 목 백일홍으로 불리는 수십 그루의 배롱나무를 심었다.

오희도(1583~1623)는 이곳 후산마을 명옥헌 자리에 애초에 ‘망재’(忘齋)를 짓고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며 살았는데, 기질이 순수하여 말씀과 웃음이 절차가 있었으며, 강직하면서도 과감하지 않았으며, 화평하면서도 우유부단하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뒷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 진분홍 세상 펼치고 있는 백일홍.
ⓒ 오승준
명옥헌이라는 말은 정자 옆을 흐르는 ‘계류의 물소리가 마치 옥이 부딪혀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와 같다’는 뜻에서 지어졌다 한다.

원림은 방지 중도형태의 연못 주위에 7월 초부터 피기 시작하는 백일홍이 9월 초순까지 연못에 투영되며, 무릉도원을 만들어내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곳은 인공적으로 산을 쌓고 온갖 괴석을 가져다 놓은 일본이나 중국의 정원과 달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자연의 풍광 속에 정자를 들여앉혀 자연의 미를 이용하는 우리네 정원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 제철 만나 화사하게 웃고 있는 백일홍 꽃잎들.
ⓒ 오승준
명옥헌은 한여름 배롱나무 꽃이 만개하면 뭉게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연못과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후산마을에 가면 꼭 보아야 할 문화재가 또 하나 있다. 일명 ‘인조대왕의 계마행수’라 부르는 은행나무. 후산리 은행나무의 나이는 문헌상으로는 900여년. 구전 상으로는 1300여년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키 높이도 30m가 넘는다.

은행나무를 ‘인조대왕의 계마행수’라 부르는 것은 인조(재위 1623∼1649)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호남지방을 돌아보던 중 이곳 후산에 사는 오희도라는 학자를 방문하러 왔는데, 그때 인조가 타고 온 말을 이 은행나무에 맸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 후산마을에 있는 '인조대왕 계마행수' 은행나무.
ⓒ 오승준
이 나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꼽히는 명옥헌으로 들어가는 길에 하늘을 찌를 듯한 위용으로 버티고 서 있다. 은행나무 오른편으로는 오희도 선생의 생가 터인 도장사가 있으며, 뒤편으로는 노거수가 자리하고 있어 주변의 옛 영화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후산마을은 지금 여름나기에 한창이다. 산과 들은 온통 초록 물결과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는 풍성한 먹을거리들로 출렁이고, 마을 입구에서부터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연분홍 진분홍 백일홍 꽃잎들은 붉은 속살 훤히 드러내놓고 화려한 춤사위를 펼치고 있다.

이밖에도 후산마을에는 수백 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 버드나무와 노송, 1만여평의 연방죽과 연꽃, 개구리밥 가득한 저수지와 소류지, 지천에 널려 있는 수백 종의 이름 모를 풀과 꽃들, 산과 들을 온통 뒤덮고 있는 감나무와 포도밭 등이 후산마을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다.

▲ 마을입구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백일홍 나무들의 도열.
ⓒ 오승준

태그:#명옥헌, #백일홍, #원림, #후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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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국민을 위한 봉사자인 공무원으로서, 또 문학을 사랑하는 시인과 불우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또 다른 삶의 즐거움으로 알고 사는 청소년선도위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이웃을 위한 사랑나눔과 아름다운 일들을 찾아 알리고 싶어 기자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우리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아기자기한 일, 시정소식, 미담사례, 자원봉사 활동, 체험사례 등 밝고 가치있는 기사들을 취재하여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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