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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 길 바닥에 낙서하는 아이(부쿠레슈티)
ⓒ 김향미 & 양학용
신이 났다. 오라데아(Oradea)에서 영화와 오페라를 보았다. 부쿠레슈티(Bucuresti)의 국립극장에서는 하프 독주회도 관람했다.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유럽에 입성해서 처음으로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고, 하고 싶은 짓을 다 했다.

아내와 나는 펑펑(?) 돈을 써댔다. 이국에서 로또라도 당첨된 것일까. 물론 아니다. 국경을 넘자 물가가 '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1유로(euro)에 4만550레이(lei). 환전할 때부터 예감했다. 당장 기름 값이 리터당 2만7000레이(0.6유로)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다른 생활물가는 3~4배까지도 차이가 났다. 하늘같던 유럽 물가가 루마니아에서는 아내와 나의 납작 엎드린 호주머니보다도 더 아래에 있었다.

'혹시 천국이 아닐까. 아니라면? 루마니아 출신 드라큐라 백작이 나그네를 살찌워서 피를 빨아먹을 심산일지도.'

루마니아를 떠나는 날이었다. 아쉬웠다. 국경도시 기우르기우(Giurgiu)에 차를 세웠다. 마켓에서 장을 잔뜩 봤다. 애마에 기름도 가득 채웠다. 그러고도 아내와 나는 '뭐 더 할 일이 없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를 천천히 걸었다. 아내가 무언가를 찾아냈다.

"저거야!"

"뼈다귀로 말아도 스트레이트 머리가 나오나요?"

▲ 시골길의 루마니아 정교 십자가(오라데아에서 클루즈 나포카 가는 길)
ⓒ 김향미 & 양학용
아내의 손가락 끝에는 미용실이 있었다. 마침 머리카락 손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내는 웨이브파마를 부탁했다. 나 역시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자라있어 어떻게든 해야 했다. 잠시 커트를 할지 파마를 할지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스트레이트파마를 해 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제겐 꿈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굿! 걱정 말아요. 제가 지금은 이 구석태기까지 와서 일하지만, 한 때는 인터내셔널 미용사였어요. 라인 강을 따라 독일까지 오르내리며 유람선에서 일했다니까요!"

중·고등학생 때였다. 이현세의 <떠돌이 까치>가 날리던 시절이었다. 곱슬머리였던 나는 '떠돌이 까치'의 그 삐죽삐죽 뻗친 머리가 그렇게도 부러웠다. 누나의 헤어드라이기로 '쭈욱' 세워보기도 했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다시 풀이 죽어버리곤 했다. 그 때 내겐 스트레이트파마 할 용기가 없었다.

미용사가 능숙한 솜씨로 내 머리를 뼈다귀로 말았다. 그리고 파마 약을 발랐다. 음~ 드디어 꿈이 이루어…. 가만, 좀 이상하잖아. 왜 뼈다귀로 말지. 평평한 판에다 붙여야하는 것 아닌가?

▲ 인터내셔널 미용사, 그녀에게 고맙다.
ⓒ 김향미 & 양학용
"저 저기요, 이렇게 뼈다귀로 말아도 스트레이트 머리가 나오나요?"
"노 프라블름(No Problem)! 아이 언더스텐드 유(I understand you)!"

나를 이해한다는데 뭐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마치 그녀는 나의 오랜 꿈마저도 이해할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께름칙했지만 믿기로 했다. 게다가 파마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또 다른 방법이 있나보다 생각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코리아!"
"루마니아 어때요?"
"너무 친절합니다. 왜 드라큐라 백작이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미용사와 많은 얘기를 했다. 유로통합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녀는 이미 갈 사람은 다 돈 벌러 서유럽으로 떠났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꽤 즐거웠다. 마침내 '인터내셔널 미용사'가 다 끝났다며 머리의 수건을 벗겨주었다.

"으악!"

기절하는 줄 알았다. 새까만 얼굴에 뽀글뽀글 올라붙은 머리. 거울 앞에는 처음 보는 아프리칸 흑인이 놀라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서 있었다. 미용사들이 죄다 모여들어 머리가 예쁘게 나왔다며 웃고 박수치고 난리가 났다.

"당신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저흰 경찰서로 끌려갑니다"

▲ 독일에서 중고차를 사서 5개월 동안 유럽여행을 했다.(루마니아 클루즈 나포카 캠핑장)
ⓒ 김향미 & 양학용
그러나 난 심각해졌다.

"아니, 내가 스트레이트로 해 달랬잖아요!"
"당신 머리카락은 짧아서 불가능해요."
"그럼, 처음부터 안 된다고 말했어야죠. 이건 제게 꿈이라고요! 원래 제 머리로 다시 돌려놔 주세요!"
"그것도 불가능해요. 아- 아니 난 몰라요. 지금 그 머리가 스- 스트레이트예요."

이제 그녀는 완전히 횡설수설이었다. 스트레이트파마라는 것 자체를 처음부터 몰랐던 것인지, 일단 해주고 나서 돈이나 벌자는 심산이었는지 통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미용사가 경찰을 불렀다. 내가 스트레이트파마를 다시 해주던지 원래 머리로 돌려놓던지 하지 않으면 돈을 지불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돈을 안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머리를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어서였다.

미용사가 경찰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루마니아 말로. 설명을 듣고 난 경찰이 내게 왜 돈을 지불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것 같았다. 미용사가 앞뒤 사연을 잘라버리고 아내와 나를 파마비용이나 떼먹으려는 불한당으로 몰아붙인 모양새였다.

"이런! 드라큐라 백작의 마누라 같으니라고!"

화가 났다. 하지만 경찰은 오히려 나를 경찰서로 데려갈 태세였다. 그때였다.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남녀가 미용실로 들어왔다. 아내가 그들에게 뛰어갔다.

"영어할 줄 아세요?"
"네."
"좀 도와주세요. 저흰 한국에서 온 여행자예요. 지금 억울한 상황을 당하고 있는데, 말이 통하질 않아요. 경찰에게 저희 얘기를 통역해줄 수 있겠어요?"
"그- 글쎄요…."

그들은 미용사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서로 잘 아는 관계 같았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였다. 가슴에 못을 박듯이 말했다.

"당신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저흰 경찰서로 끌려갑니다. 그리곤 곧 풀려나겠죠.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마음에 상처가 남을 겁니다. 당신들의 나라 루마니아가 먼 이국에서 온 여행자에게 가한 상처 말입니다!"

다행히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설명을 다시 들은 경찰은 미용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나는 내 머리에 만족하고 미용사는 비용을 포기하라는 거였다. 만족할 수 없었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그날 이후 파마머리는 조금씩 부어올라 한 달쯤 지났을 때는 거의 펑크 머리로 변해갔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점점 내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생각할수록 파격적이고 멋있었던 것이다. 나의 소심한 성격에다 주변에서 쏟아질 눈총과 입총까지 고려해본다면, 한국에서는 결코 시도하지도 못했을 스타일이었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또 그녀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인터내셔널 미용사가 오히려 고마워졌다.

그런데 그날 난 왜 그렇게 흥분했을까. 아직도 '떠돌이 까치'에 대한 열등감이 남아있었던 건 아닐까.

▲ 시간이 지날수록 펑크(폭탄)머리로 변해갔다.(세 달 후, 영국 옥스포드에서 친구와 함께)
ⓒ 김향미 & 양학용

덧붙이는 글 | 양학용 기자는 아내인 김향미씨와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습니다.


태그:#유럽, #루마니아, #세계일주, #국경, #드라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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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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