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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속도가 빨라졌다.

빨라진 기술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기술의 속도 때문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기술의 속도를 포용할 수 있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최첨단 IT 인프라를 가진 나라다. 국민의 대부분이 고해상도 디지털 카메라가 부착된 이동전화를 가지고 다니고, 미니홈피 및 블러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집마다 광랜이 들어가고 있다. 휴가를 떠나도 전국에 있는 PC방에서 메일을 확인할 수 있고 와이브로, DMB, IP-TV 등 차세대 성장 서비스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법은 최첨단 IT 국가답지 않게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기본법으로 프라이버시법마저 만들지 못하였고, 가상세계의 안전을 정보통신망법에 의존한 지 수 년이 지나간다.

아직도 독일법의 원칙, 미국법에서의 판례 그리고 일본에서의 사례들을 중심으로 연구할 뿐, IT강국의 인프라를 살린 고유한 가상법체계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해외 법규와 사례도 중요하지만, IT 강국답게 '가상법'에서라도 강점을 살려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법을 공부하는 분들이 가상세계를 아날로그 법의 기본 틀로서 규제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가오는 미래사회는 가상공간에서 정의된 사물, 사람이 물리공간에 실제적인 사물과 사람의 특성을 규명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공간에서의 활동이 아날로그 공간에서의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최근 물리공간의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때, 인터넷을 이용하는 가상공간과 연결된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법을 공부하는 분들이 가상세계의 범죄를 소탕하는 것은 기술자들이 해야 할 포렌식 정도로 평가절하 한다. 다시 말하면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면, 해결할 수 있는 아웃소싱의 개념인 것이다.

하지만 경제범을 잡기 위해 회계전문가를 모시듯이 엔지니어를 모셔서 가상공간을 규율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인터넷이 국가, 기업, 개인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회와 문화에 변혁을 가져오는 시대에, 기술이 법만을 빗겨나갈 리 없기 때문이다.

수 십년 동안 선진국의 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오던 관행에 대한 비난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날로그 법은 오랜 역사와 철학적 담론이 풍성했던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힘에 부쳤던 것이다. 하지만 유비쿼터스 시대 또는 웹 2.0 시대는 우리나라도 기술의 수준과 국민들의 IT친숙도 그리고 활용 측면에서 선진국에 못할 것도 없다.

이젠 유능한 법조인들이 컴퓨터와 유비쿼터스 기술 앞에 보다 가깝게 다가서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법이 기존의 아날로그법의 그늘에 있는 법이거나 메인이 아닌 서브의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 법이 글로벌 스탠다드로 발전할 수 있는 첨병이 '가상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이 기존의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 있음에도 법은 기술을 따라잡을 의욕이 없어 보인다. 아니 기술과 방향성이라도 같아야할텐데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 통신비밀법 개정안을 살펴보면, 과거 미국의 '클리퍼칩(Clipper Chip)'과 '캐스톤칩(Capstone Chip)'을 연상시킨다. 미국은 필요한 경우 국민의 전자기록을 해독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려 하였지만, 시민단체 등의 노력으로 관련 법률이 제정되지 못하였다. 정보인권을 보호한 유사한 우리나라의 사례로는 전자주민카드에 대한 반대 운동이 있었다.

오늘날 1990년대 중반도 아니고 웹 1.0의 붐이 꺼지고, 웹 2.0의 새로운 기술들이 소개되는 대한민국에서 전국민의 휴대전화 감청이 가능하도록 전기통신사업자에게 감청장비를 갖추도록 의무화하고 또 사업자로 하여금 전국민의 휴대전화 사용내역과 인터넷 접속지를 추적할 수 있는 아이피 주소와 그 밖의 인터넷 사용기록을 보관하도록 하는 개정안이 누구를 위한 법일까?

이미 우리나라는 대검찰청에서 ‘디지털 증거수집분석센터(디지털 포렌식센터)'를 건립 중에 있다. 범죄자를 색출하고 IP를 추적하는 일은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ISP마다 도청장치를 설치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인 것이다. 디지털 포렌식 센터 등의 우수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비쿼터스 시대의 방향을 잡아줄 통신보호비밀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 논쟁이 대통령 선거 등 사회의 여러 현안에 묻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가오는 사회에 통신보호 및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준비하지 않으면, UCC를 통한 표현의 자유도 RFID를 신뢰하고 사용할 수 있는 프라이버시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 수사의 효율성이냐, 국민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것이냐'라는 중대한 새 시대의 이슈에 대한 뜨거운 논의 없이, 오늘도 대권 후보들의 무수한 프라이버시들이 국민의 알권리라는 이름으로 출처도 방법도 모른 채 언론의 안주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디지털포렌식센터는 대규모로 건립되는 최첨단 센터라고 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해킹 등 정보보호를 침해하는 범죄자를 찾아내고 법적인 증거를 적법절차를 준수하며 과학적으로 수사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국가의 최첨단 수사 기법 등은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국가에 의한 국민감시의 최첨단화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안전하게 사용하도록 관련 법규 등을 개정하는데 국가적 역량을 모아야 할 시점에,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국민의 모든 가상공간의 활동을 저장하고 필요한 경우 범죄수사에 사용한다는 발상은 전국민의 지문을 수집했던 아날로그적 관행을 연상하게 한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범죄자에게만 지문을 수집하며, 오늘날 우리나라가 개정하려는 법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IT 강국이 허울좋은 강국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술로 쉽게 감시하고 쉽게 잡을 생각보다는 기술로 발생할 국민의 정보인권을 보호하면서도 범인을 잘 잡을 수 있는 제도를 착안해야 할 것이다. 전체 사회의 비용을 커지게 하는 제도는 결국 어렵게 일군 IT 강국의 성과마저 허물어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태그:#디지털 포렌식센터, #포렌식, #디지털 증거수집분석센터, #정보보호, #가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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