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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지바르 눙귀 해변의 조용한 아침 모습
ⓒ 김성호

눙귀 해변에서 느끼는 해방감

스톤타운에서 하루를 보낸 나는 아침 일찍 잔지바르 섬의 북쪽 끝 해안 마을인 눙귀(Nungwi)로 향했다. 14인승 미니봉고버스에는 주로 유럽 여행객들로 꽉 차 있었다. 시내에서 조금 빠져 나오면 1860년대 지어진 '리빙스턴 집(Livingstone House)'이 나온다. 리빙스턴이 1866년 마지막 아프리카 탐험 준비를 위해 머물렀던 곳.

리빙스턴은 잔지바르를 떠난 뒤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1873년 유해만이 바가모요를 거쳐 잔지바르로 옮겨진 뒤 영국으로 보내졌다. 잔지바르는 리빙스턴 뿐 아니라 스탠리와 스피크 등 19세기 당시 탐험가들의 전초기지였다.

인도양의 해안선을 따라 달리던 버스는 내륙으로 들어갔다 다시 해안선으로 나왔다. 포장도로가 중간에 비포장도로로 바뀌기도 하는데, 주로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보니 지루하지 않은 길이다. 1시간 30분 정도 달려 맑고 깨끗한 바닷가에 도달했다. 눙귀 해변이다. 더 올라가고 싶어도 북쪽 끝이어서 갈 수가 없는 막다른 해안이다.

숙소를 찾는데 예약을 하지 않으니 쉽지가 않다. 7월 중순의 성수기라 방 자체도 없을 뿐 아니라 가격도 엄청 비쌌다. 하루 40달러의 거금을 주고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방갈로식 오두막집을 간신히 얻었다. 유니언 방갈로(Union Bungalows)였다. 바닷가에 붙어 있는데다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이어 운치 있는 곳이었다.

방갈로 앞마당이 바로 해안이다. 해변의 깨끗한 모래사장이 방갈로의 앞마당 역할을 하는 셈이다. 눙귀 해변이 다른 해안과 다른 점이다. 나는 해안으로 달려갔다. 맨발로 무작정 걸었다. 발이 너무 편하다. 킬리만자로 등반으로 혹사당한 발이 오랜만에 모래 해변과 바닷물을 만나 마사지를 받는 느낌이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해방감이다. 내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해변을 걸으니 자유 그 자체다. 아프리카 여행 내내 신경을 써야하는 치안도 먼 대륙의 이야기일 뿐, 인도양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 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눙귀 해변의 하얀 모래사장
ⓒ 김성호

밀가루를 뿌려 놓은 듯 한 하얀 해변

바다는 푸르다 못해 에메랄드빛이고, 옥색의 청록이다. 바다는 모두 푸르다지만 눙귀 해변의 바다만큼 짙푸른 바다는 그리 많지 않다. 눙귀는 깨끗한 바다가 더해져 생긴 짙푸름이다. 짙푸른 에메랄드 바다와 파란 하늘이 맞닿으니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나눌 수가 없다. 저 멀리 흐릿한 수평선만이 바다와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이곳은 세계5대 청정해역의 하나이다. 그 이름에 모자람이 없다. 잔지바르의 눙귀 해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모래는 왜 그리도 가늘고 고운지, 그리고 하얀지 알 수 없다. 모래라기보다는 촘촘한 채로 거른 하얀 밀가루를 바닷가에 뿌려놓은 모습이다. 한 움큼의 모래를 움켜쥐니 잡히는 것은 모래알이 아니라 차진 밀가루 반죽이다. 해변의 모래는 4각형의 나무틀로 찍어 누르면 하얀 백설기 떡이 바로 올라올 것 같다.

모래사장을 보며 나는 왠지 백설기 떡이 온 천지에 깔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눙귀 해변의 모래가 이처럼 가늘고 하얀 것은 산호가루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얀 산호가 파도에 밀리고 바닷물에 씻기면서 가루가 되어 해변으로 밀려와 쌓인 것이다.

잔지바르의 에메랄드 바다와 팔라우의 코발트 바다는 어느 곳이 더 아름다울까

인도양의 잔지바르와 태평양의 팔라우. 하얀색의 산호가루와 인도양이 만나 빚어낸 에메랄드 바다와, 하얀색의 석회암이 태평양과 만나 탄생시킨 코발트 바다. 두 바다가 빚어내는 색의 조화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잔지바르 바다가 에메랄드의 아름다운 빛을 띠는 것은 맑은 물과 그 밑의 하얀 산호가루가 빚어내는 색의 조화의 결과라면,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팔라우의 바닷물이 방금 물감을 뿌려놓은 듯 한 코발트색을 띠는 것도 깨끗한 바닷물과 그 밑에 흐르는 하얀 석회암이 만들어 낸 미묘한 색의 조합이다.

우간다와 르완다의 푸른 나무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초록의 스펙트럼'을 연출한다면, 잔지바르의 눙귀 해변은 아프리카 바다의 '에메랄드의 스펙트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눙귀 해변의 바다는 해안가에서부터 깊숙이 들어갈수록 맑은 푸른색에서 짙은 녹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색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래사장을 따라 스톤타운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끝없이 하얀 해변이 펼쳐진다. 파도가 치지만 위협적이지 않다. 바람결에 바닷물도 출렁이지만, 사람을 삼킬 정도로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자세가 아니다. 폭풍의 파도가 아니라 잔잔한 물결의 파장이다.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잔잔한 몸부림이자 조용한 밀려옴이다. 바다라기보다는 호수의 물결이다.

인도양이 원래 그렇다. 그래서 인도양을 누비던 다우선(Dhow)은, 선체가 견고하고 여러 개의 돛을 단 유럽이나 중국의 배와 달리 부드럽고 한두 개의 삼각돛으로 운행했다. 다우선은 비교적 잔잔한 인도양 해역에 적합한 선박 형태였던 것이다. 인도양의 바람은 잔잔한 계절풍(Monsoon, 몬순)이라고 부르고, 태평양의 바람은 폭풍 같은 태풍(Typhoon, 타이푼)이라고 부른다.

그리 깊지 않은 바다가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해수욕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해안선이 길고 바다가 잔잔하니 최고의 해변이다. 사람과 떨어진 바다가 아니라, 사람과 같이 어울려 사는 바다이다. 방갈로의 앞뜰이 해변이고, 해변의 저수지가 바다이다. 사람과 해변과 바다가 하나가 되는 곳이 인도양의 잔지바르이다.

▲ 내가 묵었던 유니온 방갈로의 모습
ⓒ 김성호

맨발로 걷는 해안 트레킹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하얀 모래사장을 밟으며 30분 정도 걸었을 때 멀리 내 뒤에서 조깅을 하듯 따라오던 유럽여행객이 나를 앞지른다. 그 역시 맨발이다. 샌들을 신고 모래사장을 산책하던 스페인 계통의 여행객도 잠시 뒤 샌들을 벗어 오른손과 왼손에 각각 들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샌들은 사치 일뿐 아니라 오히려 걷기에 거추장스런 존재이다. 맨발이어야 빨리 걸을 수 있는 곳이 눙귀 해변이다. 해안을 따라 맨발로 트레킹 하는 사람들이 많다. 트레킹은 꼭 산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바닷가를 따라 작은 바위들이 보인다. 바다가재와 게들이 바위틈을 기어오르거나 바위사이에 숨어 있다. 사람의 인기척에 바위 위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난다. 달아나는 속도가 번개이다. 그들에게는 속도가 곧 생명이다.

바위들의 모습도 갖가지다. 짠 바닷물에 직접 부딪힌 아래바위는 미끈미끈하게 둥글고, 세찬 바닷바람을 직접 받는 위 바위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도넛처럼 한 가운데가 뻥 뚫려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바위의 모습도 재미있다. 파도와 바람, 비로 인한 풍화작용이라고 하지만, 온갖 시련을 겪은 풍파와 오랜 경륜이 바위의 모습에서 묻어난다.

1시간 정도 내려오니 방갈로식 숙소가 아닌, 해안가 언덕 위에서 인도양을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한 최고급 휴양지가 나타났다. 요트와 윈드서핑, 수상오토바이, 야외 수영장 등이 갖춰진 최신식 '플랜 호텔 리조트(Plan Hotel Resort)'라는 곳이었다.

멋진 제복을 입은 안전요원이 리조트 지역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는 '방문자' 증을 가져와서 나의 목에 걸어 주었다. 개인 리조트이다 보니 방문증이 필요한 것이다. 리조트 안에는 숙소 뿐 아니라 실내 스포츠센터와 바비큐 음식점, 스쿠버다이빙 장비 등이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카페와 식당 등도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가족단위의 유럽인들이 수상스포츠와 수영 등을 즐기고, 일부는 선탠을 하고, 야자수 오두막에서 낮잠을 즐기기도 하면서 여유 있는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안전요원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하루 숙박비가 300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유럽의 돈 많은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연인끼리 오는 최고급 휴양지답다.

끝없이 내려가다 보면 하루해가 다 질 때까지 숙소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해안선의 길이와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다시 해안을 따라 되돌아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내리는 비가 아니다. 세수 대야로 물을 쏟아 붓듯 내리 퍼붓는다. 비가 올 때는 바위틈에서 피하고, 비가 그치면 다시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돌아왔다.

내려갈 때 밀물이었던 바다는 어느새 썰물이 되어 해안선에서 20여m 쯤 물러나 있었다. 그 때가 오후 2시쯤. 밤사이에 바닷물이 밀려와서 오전 내내 머물다 오후 1시가 되면서 밀려가기 시작해 순식간에 썰물이 되는 것이다. 소나기가 내리치던 모래사장도 썰물이 되자 강렬한 햇살이 내리 쬐고 있었다.

▲ 눙귀 해변에서 놀고 있는 잔지바르 어린이들
ⓒ 김성호

스노클링을 통해본 잔지바르 바다 속은 잘 정돈된 수중공원

오후 늦은 점심을 먹고 작은 모터 배를 타고 스노클링을 하러 갔다. 몸은 물 위에 뜬 상태에서 호흡 빨대를 밖으로 내놓고 얼굴만 물속으로 들어가 물안경을 통해 물고기와 산호초를 보는 수중관광이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산소탱크를 짊어진 채 물 속 깊숙이 들어가는 스쿠버다이빙과는 다른 초보적인 수중관광이지만 스노클링도 바다 속을 보는 재미는 즐겁다.

작은 배를 타고 15분 정도 달린 뒤 바다 한가운데에 멈췄다. 안내자가 스노클링 장비를 주면서 "이곳이 산호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물안경을 쓰고 호흡빨대(숨대롱)를 입에 물고, 오리발을 신은 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다 밑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놀라운 새로운 세상의 발견이다. 바다 밑의 용궁이 바로 이곳이다. 산호초가 둥근 벽을 성채로 쌓은 듯 병풍처럼 가로 막고 있고 그 안에 오래전 건설된 바다도시이자 바다왕궁이 있었다. 어떤 산호초는 연꽃이 바다 밑에 핀 것처럼 보이고, 길쭉한 배를 빼닮은 산호초도 있고, 뻥뻥 뚫린 구멍이 난 오래된 성벽처럼 생긴 산호초도 있다.

잔지바르 바다 속은 전체가 수중공원이다. 크고 작은 산호초가 나무처럼 물고기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산호초사이의 쭉 뻗은 수중통로는 물고기가 떼 지어 다니는 고속도로였고, 넓은 공간의 광장은 물고기들의 놀이터였다.

산호의 분비물이 만들어내는 산호초의 모양도 정말 사람의 얼굴처럼 다르다. 파랗고 노랗고 하얗고 검은 색의 다양한 색깔의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산호초를 넘나들고 있었다. 빨간 불가사리는 마치 용궁의 수문장처럼 산호초 입구에 다섯 팔을 쫙 펼치고 바싹 붙어 있었다.

안내자가 바다 밑으로 물고기처럼 내려가더니 그 불가사리를 손으로 잡아 나에게 넘겨준다. 5개의 팔이 별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스타피시(Starfish)라고 한다. 손으로 만져보니 물렁물렁한 것이 아니라 바위처럼 단단하다. 안내자는 스타피시를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았다.

▲ 해가 지기 시작하는 눙귀 해변의 모습
ⓒ 김성호

바다 속은 산호와 물고기의 수족관

인도양의 바다 밑은 어느 곳보다 깨끗하고 산호들도 깔끔하다. 산호도 그렇게 다양하다. 버섯 모양의 버섯산호(Mushroom Coral)와 부채산호(Fan Coral), 숫사슴뿔산호(Staghorn Coral), 가지가 흐느적거리는 소트프산호(Soft Coral) 등.

태평양 팔라우의 '록 아일랜드(Rock Islands)'의 바다 속이 자유분방한 천연림이라면, 인도양 잔지바르의 바다 속은 정돈된 분재 같다. 팔라우의 산호초는 거칠고 다듬지 않은 밀림 같은 용궁이었는데, 인도양의 산호초는 깔끔하고 정돈된 수목 같은 용궁이다.

잔지바르는 누군가 매일 아침 깨끗이 청소하고 깔끔히 빗질을 한 바다세상이다. 고기들도 팔라우는 각종 종류들이 제 멋대로 움직이는데, 인도양의 고기들은 질서 있게 움직인다. 팔라우가 화려한 수중정원이라면, 잔지바르는 정돈된 일본식 정원이다.

산호 구경을 한 뒤 조금 떨어진 곳으로 배를 몰아가니 여기는 바다 속이 물고기박물관이다. 인도양의 모든 물고기들이 다 모여 있다. 물고기 떼에 가려 바다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여러 개의 어항에 각각의 물고기가 들어있듯이 같은 물고기끼리 몰려다니는 것이 그 자체로 바다 속 수족관이다.

안내자는 "인도양에 살고 있는 물고기의 대부분이 이곳 눙귀 해변에 있다"고 말했다. 안내자는 바다 밑에 보이는 물고기를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화려한 색깔을 가진 나비 모양의 '나비 물고기(Butterflyfish)', 지느러미가 날개처럼 커서 물위를 나는 '비행 물고기(Flyingfish)', 바위처럼 산호초 밑에 붙어서 사는 '돌 물고기(Stonefish)', 흰 줄무늬에 몸통이 짓눌린 듯 움푹 들어가 우스꽝스런 모양의 '광대 물고기(Clownfish)', 앵무새 같은 주둥이를 가진 '앵무새 물고기(Parrotfish)', 꼬리가 가위처럼 두 갈래로 갈라지고 움직이는 모양도 가위 자르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가위꼬리 물고기(Scissortailfish)'.

▲ 해가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의 모습
ⓒ 김성호

너무 아름다워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잔지바르

저녁 6시 20분이 되면서 시작되는 인도양의 해넘이는 또 다른 장관이다. 해가 서서히 바다로 내려오면서 에메랄드 바다에 어둠이 깔린다. 하얀 구름들도 해가 인도양에 떨어지면서 해에서 가까운 곳부터 검은 구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밝음과 어두움은 가까이에 있는 법이다.

10분도 안되어 빨갛던 해는 하늘을 온통 검게 물들이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 떨어졌다. 한번 빠진 해는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잔지바르의 바다와 하늘은 아무런 구분이 없다. 수평선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틀 전 아침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보았던 해돋이를, 이틀 뒤 저녁 인도양에서 해넘이를 본다. 아침 6시 30분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하얀 구름을 빨갛게 물들이며 불타오르던 해가, 저녁 6시 30분 어김없이 인도양에서는 수평선의 하얀 구름을 검게 칠하며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저녁 7시 30분. 해안가의 멋진 식당. 검은 바닷가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그리고 킬리만자로 맥주와 낙지 등 해산물 요리. 마음이 흔들린다. 내가 아는 여자 배낭여행객은 "홀로 장기간 배낭여행하는 경우에는 아름다운 바다와 호수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고 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바다를 보면 오랜 고독감이 눈물로 흘러내리기 때문"이란다.

홀로 하는 오랜 기간의 배낭여행에는 고독이 따르기 마련이다. 물론 배낭여행객은 그 고독을 즐기기도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잔지바르의 눙귀 해변은 그녀의 말마따나 홀로 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와 김광석의 노래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방갈로 안에 누워 있는데 "철~억~썩~"하는 소리가 들린다. 점점 파도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소리가 커지더니 내 방안으로 파도가 밀려오는 느낌이 들면서 잠이 들었다. 인도양의 파도는 자상하다. 김광석의 노래와 잔지바르의 파도소리는 참 어울리는 이중주 자장가였다.

▲ 팅가팅가 그림을 그리는 길거리 화가
ⓒ 이정화

팅가팅가를 그리는 길거리 화가들과 거북등 같은 손을 가진 마사지 여인들

다음날은 하루 종일 바다와 놀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텅 빈 가슴으로 지냈다. 밤사이 또 다시 밀물이 들어와 바다와 방갈로가 하나로 붙었다. 야자수 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늦은 아침식사를 하는데, 단체 여행객으로 보이는 15명의 젊은 유럽여행객들이 배를 타고 스노클링을 하러 떠나고, 또 다른 남녀 8명은 산소탱크 등을 지고 스쿠버다이빙을 하러간다.

에메랄드 바다와 작은 나무배, 다우 돛배, 최신 모터선박 등이 어우러진 눙귀 바다는 평화 이다. 잔잔히 밀려오는 하얀 파도와 그 파도에 따라 좌우로 몸짓하는 수많은 배들, 성급한 서양 여인들은 벌써 바닷물로 뛰어든다.

여행에는 이처럼 평온이 필요하다. 침묵은 단순히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텅 빈 마음을 주고 파도소리를 받아들이면 된다. 한낮이 되자 물이 떠나고 썰물이 된다.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없다면 밋밋할 것 같다. 변화가 없는 지루함이라 참 참기 어렵다.

해안가 뒷길을 따라 걷다보면 멋진 그림솜씨를 뽐내고 있는 거리의 화가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팅가팅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다. 잔지바르는 길거리 화가들의 세상이다. 잔지바르의 바다가 화가들을 부르는 것이다.

동물과 사람을 재미있게 그린 팅가팅가와 눙귀 해변의 아름다운 장면을 그린 수채화도 있다. 아직 팔리지 않은 많은 그림들이 벽에 세워져 있다. 그래도 길거리 화가들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길거리 화가들을 구경한 뒤 해변을 걷는데, 뚱뚱한 체격의 잔지바르 여인 3명이 "마사지"라고 말하며 두 손으로 주무르는 시늉을 한다. 해변을 바라보면서 돗자리를 깔고 누우면 야외 마사지가 시작된다. 거북이 등 같은 거친 손으로 오일을 바르고 어깨를 주무른다.

손바닥이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이 거친 잔지바르 여인의 마시지는 둔탁함과 무게감이 느껴진다. 거칠면서도 힘이 있는 마사지다. 마사지가 끝나자 듬뿍 오일을 바른 뒤 그대로 바다로 몸을 던진다. 사이다를 마시는 느낌이다.

▲ 해질 무렵 돌아오는 다우선들
ⓒ 김성호

<신밧드의 모험>을 실은 다우선들이 돌아오고...

해질 무렵이 되자 언제 떠난 배들인지 삼각돛을 단 다우선이 하나둘 돌아온다. 물고기를 가득 싣고 오는 배인데도 왠지 쓸쓸해 보인다. 수백 여 년 동안 인도양을 넘나들던 풍경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하루는 또 이렇게 저물어간다. 잔지바르의 바다에서는….

먼 바다를 항해했던 저 다우선이 돌아오면서 가득 실은 물고기와 함께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옛날 잔지바르에 살고 있던 어린이들이 물고기 보다 더 기다렸던 바다의 탐험 이야기.

<신밧드의 모험>이다. 신밧드는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국까지 배를 타고 항해했던 뱃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인도양의 다우선 이야기이다. 첫 항해에서 쫄딱 망한 신밧드는 결국 태풍과 고래, 거대한 로크새 등에 시달리면서도 모험으로 가득 찬 7차례의 항해를 통해 엄청난 부자가 된다.

이라크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천 하룻날 밤(1001)의 이야기'인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에 나오는 신밧드의 모험은 다우선 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눙귀 해변은 지금도 다우선 건조로 유명한 곳이다. 해변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다우선을 만드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있다.

나는 지난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직전 이에 반대하는 전 세계 반전 평화운동단체가 펼친 '인간방패운동(Human Shields)'에 참여한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라크 바그다드를 방문한 적이 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탄생한 고대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이다.

바벨탑의 바빌론 유적지 뿐 아니라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공중정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그다드의 뒷골목에는 어디나 역사가 숨 쉬고 있었다. 민속박물관과 재래시장, 이슬람 국가답지 않게 그윽한 눈길의 이라크 여인의 얼굴이 담긴 그림을 파는 화랑골목, 티그리스 강변의 바그다드 카페….

나는 바그다드의 뒷골목을 거닐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과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만났다. "열려라 참깨"라고 주문을 외면 바그다드의 뒷골목 집들의 대문이 열릴 것만 같았다. 오랜 역사와 전통에다 모험과 상상이 넘치는 바그다드는 <아라비안나이트>의 도시였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그 때 다 만나지 못했던 <아라비안나이트>를 들으러 다시 바그다드를 찾아가리라.

전쟁이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까지 파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때는 반전운동이 아니라 평화로운 여행길로 나의 배낭 속에 <신밧드의 모험>을 꽁꽁 챙겨와야겠다.

▲ 해가 바다로 떨어진 뒤의 눙귀 해변 모습
ⓒ 김성호

하나의 대륙이지만 다양한 색깔을 가진 아프리카

눙귀 해변에서 이틀간의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봉고버스를 타고 스톤타운으로 돌아왔다. 익숙해진 해안가 공원을 따라 걷다가 전망이 좋은 2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인도인이 하는 식당인데 해산물과 카레가 나왔다.

잔지바르에서는 지난 1964년 아프리카인들이 중심이 된 스와힐리족의 혁명으로 술탄 왕국이 붕괴되면서 오랫동안 지배자로 군림해온 아랍인과 인도인이 한 때 추방되었다. 그 이후 많은 인도인들이 다시 돌아와서 잔지바르 뿐 아니라 다르에스살람, 아루샤 등 탄자니아 곳곳에서 식당과 호텔 등을 운영하고 있다.

아랍의 지배자들은 떠났지만, 현지 주민들은 아랍과 아프리카인의 혼혈로 태어난 스와힐리족이 대부분이다. 건물과 거리에는 여전히 아랍풍이 물씬 풍긴다. 아프리카는 하나의 대륙이지만, 각각의 다양한 색깔을 가진 나라이다. 인종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생활방식도 나름의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와 탄자니아의 잔지바르는 아랍과 아프리카의 결합이었고, 남아공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흑백 공존이었으며, 마다가스카르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만남이었다. 이처럼 같은 아프리카 국가이면서도 내가 다닌 14개국은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 눙귀 해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염소
ⓒ 김성호

인도양의 바다와 하늘이 만나 펼치는 탄자나이트 색의 조화

오후에 다르에스살람으로 되돌아가는 여객선에 올랐다. 잔지바르의 하얀 건물을 뒤로 하고 배는 다시 인도양으로 나아갔다. 잔지바르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앞으로의 고생과 달콤한 휴식의 여운이 겹쳐지면서 마음이 착잡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와 그토록 슬픈 노예의 역사가 공존하는 잔지바르. 여행객은 자연과 역사 앞에서 감성과 이성의 잣대를 왔다 갔다 하며 두 번 울게 된다. 잔지바르는 묘한 곳이다.

다르에스살람으로 오는 배에서 바라보는 아프리카 해안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다르에스살람 해안가의 하얀 건물들과 파란 해안선이 만나면서 풍기는 식민지풍의 이국적 아름다움이다. 아프리카의 하늘은 바다에서도 그렇게 낮을 수가 없다. 배 위에서 펄쩍 뛰어오르면 두 손으로 하늘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다르에스살람만으로 들어갈 때는 하늘과 바다가 붙어있어 수평선과 구름선을 헤치면서 배가 들어간다.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이 만나자 탄자나이트(Tanzanite)색이 되었다. 보는 방향에 따라 푸른빛의 짙음과 옅음으로 밝은 청색에서 진청색처럼 달리 보이는 탄자나이트처럼 아프리카 해안가의 바다와 하늘은 배의 움직임에 따라 다색성이었다. 세계적으로 탄자니아에서만 유일하게 생산되는 진귀한 보석인 탄자나이트는 다르에스살람 시내에서 흔히 구경할 수 있다.

▲ 잔지바르 스톤타운 항구의 건물
ⓒ 김성호

태그:#아프리카, #탄자니아, #잔지바르, #눙귀 해변, #다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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