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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火山) 이현상(1905-1953).

그를 다시 만난 곳은 생전 그가 누볐던 충북 영동의 민주지산 자락 시골마을이다. 구름덩이를 이고 있는 무주 구천동 덕유산 자락이다.

민주지산과 덕유산 자락 그 중간쯤에 위치한 고향마을에서 <이현상 평전>(안재성 지음, 실천문학사)을 통해서다. 책을 읽는 동안 시선은 수도 없이 먼 발치로 보이는 민주지산과 덕유산을 향했다.

<파업> <경성 트로이카>의 저자 안재성이 그린 이현상은 '평전'이기보다는 일제침략사요, 한국 근현대사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역사의 시련에 가슴 한켠이 아렸다. 입에서는 긴 한숨이, 두 눈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렸다.

"세계적 혁명가의 한 사람"

▲ 이현상 평전
ⓒ 실천문학사
'이현상' 이름 석 자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생 때다. 덕유산 자락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빨치산'이라는 호칭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양민을 살상한 공산당원'쯤으로 지레짐작했다.

대학시절 역사책을 다시 넘기며 '외세에 맞서 싸운 헌신적 인물'로 수정했지만 이마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감옥에서 반평생을 산 장기수들을 만나며 '남한지역 유격대를 파괴시킨 장본인'이라는 평가와 대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전의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 이현상의 온전한 모습이 보였다. 소설가 김성동이 평전을 읽고 '발문'을 통해 "저 라틴아메리카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는 따끔한 지적이 울림으로 전해왔다.

안재성은 이현상을 "약소민족의 주권을 위해 일본과 미국의 침략에 저항해 모든 것을 바친 세계적인 혁명가의 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가 이끈 유격대의 규모와 전적은 세계 민중혁명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단언한다.

이전에도 이현상의 일대기가 소개된 적은 있었다. 이에 대해 안재성은 "필자들의 천박한 역사인식과 지식인 특유의 냉소와 교만함으로 훼손됐다"고 말한다.

새로 그린 이현상은 진정한 휴머니스트고 사회주의자다. 진정한 애국자요 영웅이다. "왜곡과 은폐로 경악스러울 만큼 자료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그의 이름을 온전하게 되찾아 준 것은 작가의 끈질긴 발품의 산물이다.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이들부터 군경에 체포돼 옛 전우를 잡으러 다닌 할아버지까지 '닥치는 대로 아무나 붙잡고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 헤맨 결과다.

안재성은 이현상 평전을 쓰기 전 갈등을 겪는다. 여순사건 당시 좌익에 의해 우익 청년단원들과 지역유지 등이 무더기 학살된 사실과 대면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그들이 반민족적 패악을 저질렀다 해도 저항할 수 없는 포로들을 무더기로 학살할 수 있다면 정의가 아니었다"며 "아득한 절벽을 만난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휴머니스트 저자, 휴머니스트 혁명가와 통하다

▲ 1925년 6.10만세운동에 참여해 첫 감옥살이에 들어간 이현상(좌)과 그가 남긴 글 (이현상 평전에서 발췌)
ⓒ 오마이뉴스 심규상
그가 평전 쓰기를 다시 시작한 것은 "이현상은 여순사건을 수많은 인민과 혁명 역량을 훼손시킨 당적 오류요 죄악"으로 평가했고 "교전이 아닌 이상 포로로 잡은 군인이나 경찰을 절대 죽이지 못하게 했다"는 증언을 접하면서다.

또 있다. "순천에서의 학살에 대해 호되게 비판했으나 그렇다고 나라의 정의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목숨을 걸고 봉기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인명존중의 정신과 휴머니즘적 역사인식이 빛나는 대목이다. 다른 한편 이현상과 작가 안재성이 통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의 평론은 초지일관 대쪽 같다. 해방 직후 좌우 대립과 전쟁시기 유격대와 국군 및 미군의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국군이) 일단 촌락에 주둔하게 되면 가축을 잡아 술상을 차리게 하고 동네 여자들을 강간하는 일이 재미처럼 행해졌다. (중략) 미군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은 여순사건 이후 경사 이상 경찰과 소위 이상 국군 간부에게 즉결처분권을 줬고 이들은 곳곳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남부군은 마을 사람들에게 반드시 존댓말을 썼고 함부로 겁을 주거나 약탈하는 일이 없었다.… 실상,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유격대에 살해당한 국군이나 민간인의 수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평전은 이현상 외에도 일제 항쟁사, 여순사건, 대구 사건, 4·3항쟁, 한국 전쟁, 북측의 유격대에 대한 하산지시, 미국의 세균전, 북의 숙청작업 등 현대사의 핵심 문제들에 대해서도 분명한 비평을 가하고 있다.

작가 안재성은 이 글을 쓰기 앞서 스스로 이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빨치산이 형성됐는가?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이현상은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그의 정신은 무엇인가?

평전 속에 담겨진 그의 답변은 너무도 성실하고 알차다.

북에서는 '영웅' 남에서는 '악질 빨갱이'
"이현상의 전쟁은 끝났는가"

평전의 시작은 의병장 조헌과 칠백명의 영웅적 투쟁과 죽음으로 시작한다. 이어 인근 마을(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태어나 칠백의총에 대한 전설을 들으며 자란 이현상이 등장한다.

1926년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해 "원쑤를 몰아내자!"고 외치다 구속된 이현상은 이후 해방 때까지 네 차례에 걸쳐 12년 동안을 감옥에서 보낸다.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고려공산청년연맹), 1933년 경성트로이카 최고지도부의 일원으로 동맹휴학을 지도하다 체포돼 징역 4년, 1940년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활동하다 체포'

하지만 그는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단 한순간 변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제 치하 국내의 사실상 마지막 전국적 항일조직인 '경성콤그룹'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해방되는 날까지 조직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반쪽짜리 해방과 여순사건은 그를 다시 지리산으로 향하게 했다. 산 생활은 총탄과 폭격, 네이팜탄, 세균, 굶주림, 추위 등 끝없는 생명의 위협이었다.

목숨을 건 유격대 활동은 대원들과 주민들에게 그를 '최고 지도자' '선생님' '거대한 지리산 바위' '영웅'으로 각인시키게 했다.

그는 5년동안 지리산 유격대 사령관, 남부군 총사령관 등을 맡아 총탄 속을 누비다 끝내 군경토벌대에 의해 지리산 빗점골에서 49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북한은 사후 그를 평당원에서 영웅으로 복권하고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 가묘(1호)에 안장했다. 또 제1호 열사증(1968)과 조국통일상(1990)에 추서됐다.

그러나 남한은 그의 시신을 서울 창경원 등지에서 이십 일간 전시하는 등 가장 악질적인 빨갱이 중 한 명으로 기록했고, 그의 어머니는 누군가에 의해 무덤마저 파헤쳐져 목과 사지가 잘려 사라져야 했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이현상과 동료들의 전쟁은 이제 끝났는가? 아니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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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