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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지바르의 스톤타운 항구 모습.
ⓒ 김성호
아름다운 자연과 슬픈 역사가 만나는 잔지바르

오늘은 아프리카 여행 중 처음으로 배를 타고 섬으로 간다. 내가 가는 잔지바르(Zanzibar)는 아름다운 자연과 슬픈 노예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아랍풍의 좁고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오래된 뒷골목길과 향신료의 고장이기도 하다.

오랜 옛날부터 아프리카인과 아랍인, 인도인들이 함께 살아온, 다문화가 공존하는 섬이다. 아프리카 대륙 여행에 지친 배낭여행객에게는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피로를 씻기에 가장 알맞은 휴양지이다. 잔지바르 해변은 세계 최고의 하나이다.

아침 7시 30분 잔지바르로 가는 고속 여객선인 '씨 익스프레스(Sea Express)'에 올랐다. 여객선에는 놀랍게도 "소아용 구명조끼", "소화기"라는 한글이 쓰여 있고, 출입구 쪽에는 "출입구", "금연"이라는 한글이 표기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쓰던 중고선박을 들여온 것이다. 러시아나 중국, 중앙아시아 등에서 우리나라의 중고 차량을 수입해 운행하는 것은 보았지만, 이 멀리 아프리카에서 우리 중고여객선을 타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다르에스살람 항구를 떠난 배는 1시간 정도 해안가를 따라 운행하다가 점점 해안선과 멀어지더니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인도양으로 나아갔다. 왼쪽으로 해안가에 보이는 작은 항구도시는 바가모요(Bagamoyo)이다.

"내 마음을 놓고 떠난다"는 뜻이 있는 바가모요는 이름 그대로 슬픈 역사를 간직한 항구이다. 아프리카 내륙에서 붙잡힌 노예들은 바가모요에서 배에 태워진 뒤 잔지바르 노예시장으로 끌려가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비록 몸은 끌려가지만 마음만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아프리카에 남겨두고 떠나고 싶었던 노예들의 애절한 외침이 지명으로 남았다.

푸른 바닷물이 넘실대는 바다 깊숙이 배가 들어갔나 싶더니 멀리서 하얀색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잔지바르 섬이다. 한 눈에도 아랍풍의 이국적인 건물들이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각종 향신료 농장 투어의 재미

▲ 잔지바르의 향신료 작물 농장.
ⓒ 김성호
부두에서 내린 뒤 출입국 사무소에서 입국 절차를 따로 밟아야 했다. 별도의 비자는 필요 없지만 여권은 소지해야 잔지바르 섬에 들어갈 수 있다. 지난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잔지바르는 그 다음해 당시 본토의 탕가니카(Tanganyika) 공화국과 합치면서 이름도 탄자니아(Tanzania)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하나의 독립된 나라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잔지바르는 그동안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아왔으나 아랍의 영향이 가장 강한 곳이다. 오래전 아프리카인들이 본토에서 이주해 살아온 뒤 아랍 상인들이 도시국가를 만들었으나 1499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가 상륙하면서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 중반 다시 오만계 아랍의 통치 아래 들어갔으며, 1832년에는 오만의 술탄이 아예 궁정을 잔지바르로 옮겼으나 1890년 영국의 보호령을 받게 된다.

잔지바르의 옛 수도였던 스톤타운(Stone Town) 시내에 숙소를 정한 다음 향신료 투어에 나섰다. 향신료는 여전히 관광과 함께 잔지바르의 최대 수출작물이다. 19세기 말 노예시장이 쇠퇴하면서 향신료는 환금작물이자 중요한 수출품으로 떠올랐다.

▲ 바닐라 향을 만드는 바닐라 덩굴
ⓒ 김성호
나는 다른 여행객과 함께 반나절짜리 향신료 투어에 참가했다. 봉고버스는 스톤타운에서 북동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키짐바니 지역에 20여 분만에 도착했다. 높은 지대에 있는 농장에는 개인이 경작하는 향신료 농장과 정부가 경작하는 향신료 농장이 따로 있었다.

개인 농장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가 구경할 정부 소유의 향신료 농장이 나타났다. 20대 중반의 안내자는 "정부가 운영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에만 수백 가지의 향신료 나무를 키우고 있다"며 "향신료는 잎에서 추출하는 것뿐 아니라 나무 열매와 줄기, 뿌리 그리고 식물 뿌리 등 온갖 부위에서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농장에는 정향나무(클로브)와 계피(시나몬), 비누와 향수의 원료로 쓰이는 레몬그라스(Lemongrass), 향수 등에 쓰이는 카르다몬(Cardamom), 생강(진저), 육두구(Nutmeg), 후추, 바닐라와 박하(허브) 등 온갖 종류의 처음 보는 향신료 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향신료 작물뿐 아니라 별 모양의 과일인 스타푸르츠(Starfruit)와 고슴도치를 닮아 울퉁불퉁한 모양의 잭푸르츠(Jackfruit, 스와힐리어로 페네시(Fenesi)), 코코스야자, 망고, 바나나, 파인애플, 구아바, 두리안, 파파야 등 열대 과일. 여자들의 빨간 립스틱 만드는데 사용된다는 붉은 열매의 립스틱 나무(Lipstick Tree)와 향기나무(Perfume Plant) 등 독특한 나무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다른 나무줄기를 감아 올라간 짙은 녹색의 바닐라 덩굴에는 오이처럼 길쭉하게 생긴 열매가 열렸는데, 이 열매를 딴 뒤 발효시켜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 등에 사용되는 하얀 바닐라 향료를 얻어냈다고 한다. 우리가 늘 먹는 하얀 바닐라크림이 녹색의 열매에서 나온다니 신기하다.

3시간 정도 걸리는 향신료 투어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각종 향신료 작물과 열대 과일 등을 구경할 좋은 기회이다. 향신료 작물과 열대 과일나무 사이를 걷는 것은 산책과 삼림욕을 하는 기분이어서 투어의 덤이다.

미로 같은 아랍의 옛 도시 뒷골목에서 만나는 여러 풍경

▲ 회벽을 칠한 전통가옥과 잔지바르의 뒷골목.
ⓒ 김성호
오후에는 옛 도시의 뒷골목을 걷고 오만의 술탄 유적지와 노예시장 등을 둘러보았다. 내가 묵은 여행객 숙소인 헤이븐 게스트 하우스(Haven Guest House)를 찾는 것 자체가 미로 찾기였다. 이정표도 없는 골목길 안쪽에 있어서 한번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찾으려면 한참을 헤매야 했다.

스톤타운의 옛 도시는 모두 좁고 구불구불한 미로와 같은 길이다. 잔지바르의 멋은 옛 시가지 그대로의 뒷골목을 걷는 것이다. 18∼19세기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뒷골목 길은 먼지는 나지만 고풍스런 멋을 느끼게 한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머리에 하얀 히잡을 쓰거나, 눈만 내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가는 검은 차도를 쓴 여인들을 보게 된다.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히잡과 차도르를 입은 여인네들과 여기저기 있는 이슬람 사원을 보면 잔지바르가 이슬람의 도시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잔지바르의 일반 여자들이 입는 옷 중에는 화려한 색상의 캉가(Kanga)라는 제품도 있다. 여자들이 치마처럼 둘러 입거나 몸에 걸치는 화려한 무늬의 면으로 된 엷은 천이다. 잔지바르와 다르에스살람 등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고, 재래시장과 일반 기념품 가게에서도 팔고 있었다.

뒷골목 길에는 아랍과 인도풍의 건물들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그 건물들은 각종 팅가팅가 풍의 그림과 나무 조각제품, 캉가 등의 옷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로 바뀌었다. 옛 시가지에서는 가장 큰 도로라고 해야 차가 한 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다.

잔지바르 건물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얀 석회벽과 문이다. 건물의 바깥벽은 산호 가루와 모래를 섞어 하얗게 바르고, 벽도 매우 두꺼운데 후텁지근한 열대해안 기후로부터 건물 안쪽을 서늘하게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지붕은 이곳에서 많이 나는 망고나무를 서까래로 사용했다.

또 다른 특징은 꽃과 나뭇잎, 물고기 등을 추상화해 만든 각종 문양을 새긴 나무로 된 대문이다. 대문의 크기와 문양, 나무 재질 등에 따라 집주인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나타냈다. 지위가 높을수록 대문의 크기가 크고 더 정교한 문양을 새겼다.

문양도 각각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연꽃은 생식능력, 물고기는 다산, 쇠사슬(체인)은 안전, 유향은 부의 상징이다. 대문의 문양으로 사람이나 동물 등을 그리지 않고, 식물이나 문자 등의 기하학적인 문양만 나타내는 것은 이슬람의 영향 때문이다.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하는 유일신인 이슬람은 그림이나 문양에서도 사람이나 동물의 표현을 우상으로 여겨 피하고 있다. 이슬람을 대표하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나무와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표현되는 것도 같은 종교적 이유. 잔지바르의 대문은 스와힐리 전통에다 이슬람과 인도의 영향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그룹 '퀸'의 전설적 가수 프레디 머큐리가 왜 잔지바르 뒷골목에 있을까

▲ 프레디 머큐리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잔지바르 갤러리.
ⓒ 김성호
옛 시가지 도로 중 그래도 큰길에 속하는 케냐타 거리를 내려오다 보면 우체국 옆에 '머큐리 하우스(MERCURY HOUSE)'라는 놋쇠 팻말이 붙어 있는 가게를 만나게 된다. 잔지바르 갤러리라는 기념품 가게이다. 지난 70, 80년대 유명한 세계적인 록 그룹인 영국의 '퀸(Queen)'의 리드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가 살던 곳이라는 설명이다.

머큐리는 지난 1946년 실제로 이곳 잔지바르의 케냐타 거리에서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8세기에 이슬람교도에 쫓겨 인도로 피신한, 불을 숭상하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Parsi)이다. 머큐리는 이란계 인도인인 셈이다.

머큐리의 아버지는 영국 총독부의 공무원으로 일했다. 어린 나이에 인도로 보내져 학교를 다닌 머큐리와 그 가족은 1964년 잔지바르에서 아프리카인을 중심으로 하는 아랍과 인도인에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으로 완전히 이주했다.

잔지바르에는 이곳뿐만 아니라 머큐리의 집이라고 하는 장소가 여럿 있다. 옛날 캠러스(Camlurs) 레스토랑과 뒷골목의 허름한 개인 집으로 사용되는 곳이 머큐리의 집이라고도 한다. 머큐리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으로는 해안가 미징가니 거리에 머큐리스(Mercury's)라는 이름의 식당이 있는데, 안에서는 머큐리의 사진과 각종 기념품들도 판다.

내가 묵던 숙소의 주인도 "여러 가게가 머큐리의 집이라고 주장을 하는 데 정확한 곳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머큐리가 진짜 태어난 장소나 살던 곳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지바르를 찾는 여행객들도 머큐리의 고향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나친다.

단지 외국여행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가게주인들이 상업적인 목적에서 팻말을 달아 놓았을 뿐이다. 서구인들과 전 세계인에게는 전설적인 가수로 사랑받고 있는 인물인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머큐리는 지난 1991년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으로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와 '위 아 더 챔피언스(We Are the Champions)' 등의 노래는 아직도 여러 사람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특히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가는 오페라 형식을 가미한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머큐리의 천재성을 확인시켜주는 노래이다.

영원한 보헤미안 머큐리가 잔지바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 미로같은 잔지바르 뒷골길에서 만나는 차도르 입은 이슬람 여인들.
ⓒ 김성호
그러나 이곳의 강경한 이슬람세력들이 바라보는 머큐리는 이렇다. 그 하나는 머큐리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아버지가 식민지 총독부의 관리로 왔기 때문에 진정한 잔지바르 인이라고 볼 수 없다.

그 둘은 1964년 혁명 이후 모든 가족이 영국으로 이주하고, 잔지바르와 탄자니아의 통합에 반대하는 입장을 노래로 표현했다. 그 셋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동성애를 한 사실은 잔지바르 사람들의 정체성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머큐리의 발자취를 이곳에서 찾으려는 여행객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머큐리의 가족사 자체가 종교적 이유로 이란에서 쫓겨나 인도로 이주한데다, 잔지바르 총독부의 관리에 이어 영국으로의 이주 등 머큐리는 끊임없는 '정체성의 미아'로 살다 갔다.

머큐리의 진정한 조국은 어디인가. 예술가에게 조국은 필요 없는 것인가. 어느 과학자는 말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조국이 없는 예술가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예술가가 추구했던 길이 민족이나 종교, 인종을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가치였기 때문에 국경을 초월해 사랑을 받는 것이다.

프레디 머큐리와 체 게바라. 아일랜드계 할아버지와 스페인 바스크계 할머니 사이에서 '혁명의 피'가 유전자로 내려왔던 체 게바라처럼, 1200여 년 전 페르시아에서 쫓겨나 '인도의 유대인'으로 불리며 인도와 아프리카 잔지바르, 영국으로 끊임없이 이주하는 '방랑자의 피'가 살아있던 머큐리는 진정한 보헤미안이었다.

게바라와 머큐리는 길은 달랐지만, 각자의 분야에서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자신만의 혁명적 길을 갔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먼 훗날 종교나 사랑의 방식을 떠나 혁명적 음악가로 머큐리가 복권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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